18일 당산동에서 고교반창회를 하고 지인의 초대로 오이도 횟센타에서 거하게 대접을 받고
그곳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토요일에 예식이 있어 내려가지 못하고 하루를 더 묵어야 돼서
친구와 예전에 한양도성순성길 탐방 때 못 들렸던 만해 한용운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심우장을
둘러보기로 한다(12/19)
한성대 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 03번 버스를 타고 종점 북정마을 노인회관 앞에서 하차 아래
비탈길로 내려가면 비들기쉼터를 만나고 골목길을 좀 더 내려가면 심우장이 나온다

2018년 12월 한양도성순성길 답사 때 바라본 성북동 북정마을 이곳 어딘가에 심우장이 있다
북정마을은 육이오 때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던 동네이다

03번 종점에서 심우장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시가 걸려있는 언덕에 다다른다.
그곳을 ‘비둘기 쉼터’ 또는 ‘비둘기 공원‘이라고 부른다. 김 시인의 시에서 도시개발에 쫓긴 비둘기들이 갈 곳
없어 헤매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곳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발아래 펼쳐진 북정마을을 바라보면 올망졸망한 집들이 엎드려 있다.
개발이 되지 않고 낡은 집 그대로 보존이 잘돼 있고 적당한 숲도 있어 오히려 떠나간 비둘기들이 다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시인이자 언론인 김광섭(金珖燮 : 1905~1977)이 1969년에 지은 시.
김광섭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의식을 관념적으로 읊다가 차츰 구체적인 현실을 노래한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는 크게 초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성북동 비둘기는 후기 작품에 속한다.
후기의 그의 작품들은 산업화에 따른 물질문명의 폐해를 비유와 상징을 통해 비판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1970년대
사회 현상을 심미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성북동 비둘기는 3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은 자연 파괴로 삶의 터전을 잃은 비둘기의 상황에 대해, 2연은 지향
없이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둘기의 모습을, 3연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사랑과 평화까지 낳지
못하는 비둘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해석이 담겨 있다. 김광섭은 말년에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는데 병상에서
깨달은 자연·인생·문명에 대한 통찰이 이 시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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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바로 아래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집들을 종종 보게 된다. 흔히 달동네라고 부르는데, 북성마을은
서울 사대문 안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로 꼽히는 곳이다.
숙정문과 혜화문 사이 한양도성 백악 구간 초입에 위치한 이곳은 1969년 김광석 시인이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
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 산업화로 인한 도시 개발로 본래 살던 터전을 잃은 달동네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 작가가 비둘기로
비유한 이들의 삶터는 아직도 1960~70년대 골목길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비의 대상이 됐었지만, 지금은 한양도성과 더불어 오랜 세월 누적된 주민들의 삶이 살아 있는 생활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1960~70년대 골목길 풍경 그대로원래 성북동 일대는 조선 후기 왕을 호위하는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자리하던 곳으로 당시 나라에서 거주할 사람들을 모집해 정착시킨 마을이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도시 노동자들이 모여 현재의 마을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지금은 과거 물길이 지나는 원형 도로를 따라 500 가구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리어카가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다니기 힘든 거리였지만,
1985년 2차에 걸쳐 마을 중심을 둘러싼 소방도로를 준공했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 씨가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한용운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땅을 매입한 뒤 1933년 심우장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심우장은 북향이다 북향으로 지은 이유가 있다
1933년 만해는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다.
남향으로 짓던 집의 주춧돌을 돌려세우며 그는 말했다.
“그건 안 돼. 날더러 총독부를 바라보라니, 차라리 북향이 낫겠지.” 심우장은 일제의 그늘 속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있던 마지막 보루였다. 일설에 의하면 이곳은 지대가 북향이라 모두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하는 말도 있다
그는 이곳에서 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고, 단재 신채호의 묘비명을 쓰며, 옥사한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주관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 문학과 불법(佛法)의 실천, 그리고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 정신과 자주성을 일깨웠던 그는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한 해 앞두고 북향집 심우장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만해 한용운 시인 프로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1896년 홀연히 집을 나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였고,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3 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였다.
1919년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1927년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님의 침묵> 등을 저술하여 저항문학을 이끈 승려 · 시인 · 독립운동가이다.
300여 편의 시를 발표하한 한용운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향나무는 담지 못했는데 이해를 구하고자 캡처한 사진임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의성. 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경상도 안동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경상도 의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안동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07년 유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무렵 계몽 운동에 뛰어든
인사들 중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도 양기탁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910년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지린에서 무오 독립 선언에
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김동삼은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하였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위키백과에서
현재 안동시 안동댐 공원에는 김동삼 선생의 유언이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평생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그의 강직함은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만해의 생애

홍성에서 태어나 백담사와 신흥사 검봉사에서 활동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활하기까지의 과정

심우장

작품활동


만해의 일생

전대법륜
만해한용운의 글씨로 큰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1.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의 보물이 세상 어떤 장애물도 깨뜨리 듯 불법도 중생의 번뇌와 죄업을
모두 깨뜨려 사라지게 만든다는 의미
2. 진리의 바퀴이기 때문에 결코 멈추지 않고 영원히 구르는 것처럼 불법 또한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돌아간다는 의미
3. 법륜의 생김새가 원만한 것처럼 불법 또한 어느 곳에 치우치지 않고 원만 무결하다는 이미를 담고 있다
법륜상왕: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 지를 뜻함

오도송
남아란 어디메냐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나그네 근심 잦단 말을 일렀는가
한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 대천 세계 뒤흔드니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만해 한용운 글씨를 서각 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39세가 되는 1917년 12월 3일 늦은 밤 백담사의 암자인
오세암에서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지었다

마저절위
만해한용운의 글씨를 서각한 것이다
머저(磨杵)는 절구공이가 갈고 닳아서 바늘이 되었다는 뜻이며
절위(絶韋)는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져버렸다는 뜻이다
쉬지 말고 열심히 공ㅂ주하라는 뜻으로 제자 효범최범술에게 써주었다고 한다

향로암 야경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樓臺)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치고
가이없는 가을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산방뒤뜰에 올라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네
은자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뜨는 듯한데
헤일 수 없는 짙은 가을 향기 선우(禪衣)를 때리누나
선우:선승의 옷

한용운(韓龍雲) 사진
시인, 독립운동가, 승려 (1879~1944)
1918년 『유심』 창간
아명은 유천, 호적명은 정옥, 계명은 봉완,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79년 7월 12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부락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은거하여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과 세계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년 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08년경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교포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만주를 여행하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의심을 받아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무렵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박한영 등과 승려대회를 개최,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비판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
(1913)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 불교의 현상을 타개하여 불교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불교의 구세주의, 진보주의
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7년경부터 항일투사로서의
행동을 시작했고,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 주재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표현된 그의 독립사상은 대체로 자유사상, 평등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평화사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922년 출옥, 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내설악 백담사에서 1925년에 쓴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는 이미 1918년 『창조』 동인들보다 앞서 『유심』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
(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 한 권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성북구 아름다운 나무 소나무이다
110년 (2024년가 준) 심우정 뜰안에 있다

내려가는 길 주변에는 빈집이 여러 채 보인다
이곳은 북정마을로 6.25 때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며 살던 동네로 아주 낙후된 곳이다
성북동은 부자 동네로 5~70년대만 해도 지금의 강남이었다
지금도 고급 단독주택과 대사관저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한동네지만 명암이 엇갈리는 동네이다

성북 03번 버스종점으로 오르는 길

서재로 쓰던 왼쪽 방 문틀 위에 심우장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서예가 오세창이 쓴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심우장은 직역하면 소를 찾는 집이다 이는 만해의 필명중 소를 키우는 사람이란 뜻인 목부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만해와 님의 침묵시비
님의 침묵 (축시)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생가의 동상

2016년 8월에 방문했던 만해 생가
1879년 7월 12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부락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출가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외면하였다 한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등을 전전하며 수년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만해생가 옆의 만해사당

만해영정
류원정-나는 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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