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4일,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백제시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해체 현장.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미륵사지석탑이 붕괴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001년 10월부터 8년째 이 탑을 해체해오고 있었다. 6층부터
해체해 내려오기 시작해 1층 탑신(塔身)과 기단부(基壇部)에 이른 상태였다. 탑을 해체한다는 것이 시종 긴장된 작업이었지만
1층 해체가 진행되면서 발굴단은 더욱 긴장의 고삐를 조여야 했다. 전통적으로 옛 사람들은 탑 속에 사리장엄구와 같은
중요한 불교 관련 유물들을 집어 넣었다. 그 동안 대체로 기단부나 1, 2층 탑신에서 이들 유물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지표면에
가까워지면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셈이었고 그렇기에 발굴단은 기대와 함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것이다.
세기의 발견
게다가 미륵사지석탑은 보통 탑이 아니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통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큰 탑이다.
또한 사라져버린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 시기 미륵사의 비밀을 간직한 탑이다. 그리고 건축물 모양의 목탑
형식에서 석탑으로 바뀌어가는 한국 석탑의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탑이기도 하다. 탑신(塔身)을 보면 문과
기둥이 있고, 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돌을 올려놓았는데 이것이 마치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돌을 이용해 나무 집을
짓듯 탑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백제 석공들의 돌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여러모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탑이었기에 발굴단의 기대는 더욱 컸다.
미륵사지석탑의 해체작업은 처음부터 조심스럽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 탑이 해체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목탑 양식으로
지어졌다는 점과 연관이 깊다. 목조 건물처럼 탑을 세우면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기둥도 여럿 세우고
그 사이에 돌문까지 설치하고 게다가 대들보 같은 돌도 올려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흔히 보아온 석탑보다 훨씬
많은 돌이 들어가야 한다. 탑을 구성하는 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탑은 위험하다. 자칫 돌 하나만 뒤틀리더라도 연쇄
반응으로 탑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돌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탑은 훨씬 더 안전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처럼 미륵사지석탑은 목조 건축물 모양의 목탑 형식을 계승하다 보니 부재를 많이 써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미륵사에는 원래 가운데에 목탑 하나가 있고 그 좌우에 석탑 두 개가 있었다. 그러나 목탑과
동쪽의 석탑은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무너져 버렸고 서쪽의 석탑만 남게 되었다. 이 서쪽 석탑도 안전할 수 없었다.
원래는 9층이었는데 탑의 꼭대기 세 개 층이 완전히 무너졌고 나머지의 세 개 면도 상당 부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8년에 걸쳐 탈 없이 해체가 진행되었고 드디어 1층을 해체하게 되자 전문가들은 이제 탑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바로 그날, 발굴단은 1층 기단부의 심초석(心楚石) 아래 부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 심초석은 탑 내부의 중심기둥을 받쳐주는 커다란 돌을 말한다.
발굴단은 크레인을 이용해 심초석의 윗돌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순간, 어딘가에서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초석
중앙의 사리공(舍利孔, 사리장엄구를 안치하는 공간)에서 노란 빛이 새어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였다.
사리공 밑바닥에 녹색 유리판을 깔고 그 위로 이들 유물이 안치되어 있었다. 백제 왕실의 안녕과 미륵사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1400년 전 사리장엄구 일체가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발견된 유물은 항아리 모양의 금제 사리호(金製舍利壺),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제 사리기(銀製舍利器) 6점,
장식용 칼로 보이는 단도(短刀) 2점, 금제 족집게, 은제 관장식,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는 얇은 금판 조각, 각종 구슬 등 500여
점. 유물을 감쌌던 천도 함께 발견되었다. 금제 사리봉안기를 통해 확인된 유물의 연대는 639년 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금제 사리호를 발견하고 난 뒤 X선 촬영을 실시해 그 안에 작은 사리호가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 작은
금제 사리호를 개방해 그 안에서 사리 12과(顆, 과는 낱알을 세는 단위임)와 구슬, 사리를 넣었던 사리병의 깨진 조각을 발견했다
. 이 탑과 유물은 7세기 초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미륵사지석탑에서 수습한 유물은 모두 19종 683점에 이른다.
사리장엄의 의미
사리(舍利)는 팔리어인 사리라(Sarir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유골이나 결정체를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하고 부처님이 설법했던 경전(經典)은 법신사리(法身舍利)라고 부른다.
탑은 원래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사리)를 안치하는 무덤이었다. 그래서 인도 불교성지 산치에 있는 산치탑과 같은 인도의 초기
탑들을 보면 그 모양이 무덤처럼 둥글게 되어 있다.
부처가 세상을 뜨고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3번째 왕인 아소카왕(재위기간 기원전 273-232년)은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과 진리를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열렬한 불교 신자이자 불교 후원자였던
아소카왕은 8개 탑에 들어가 있던 부처님의 유골을 꺼내 이를 8만4000개로 나누어 인도 각지 8만4000개 탑에 안치했다. 부처의
유골을 더 많은 곳에 확산시킴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유골은 중국과 한국 등지에도 전해졌다.
불교가 계속 발전하면서 탑은 그 뒤에도 계속 세워졌다. 하지만 석가모니의 사리를 더 이상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탑 속에
사리 대신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불경이나 사리와 모양이 비슷한 구슬 등 다른 것을 넣어야만 했다. 흔히 탑의 심초석이나
기단부 탑신부에는 작은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여기에 사리 또는 불교의 상징물을 안치했다. 이로써 탑은 석가의 무덤이 아니라
불교의 상징이자 중요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사리 등을 넣어 안치하는 이 작은 공간을 사리공(舍利孔)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리를 안치하는 행위를 사리장엄(舍利莊嚴)이라
하고 여기 사용되는 기물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라고 한다.
우리의 옛 사리장엄구를 보면 보통 서너 겹으로 포개어 사리 등을 봉안한다. 사리를 사리병에 넣은 뒤 그 사리병은 작은
사리기(舍利器 또는 사리함) 안에 안치하고 작은 사리기를 좀더 큰 사리기에 넣어 봉안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나서
이 큰 사리기(또는 사리함)를 사리공에 넣어 사리 안치를 마무리한다. 사리병은 녹색 계통의 유리나 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녹색은 무량한 생명력을 지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사리병을 넣는 사리기(또는 사리함)는 금, 은, 동 등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원통이나 사각형의 함, 육각이나 팔각 기둥 모양의 그릇,
전통 건물인 전각 모양 등 매우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백제 금속공예의 백미
미륵사지석탑에서는 유례가 드물게 다양한 종류의 사리장엄구가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680여 점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유물로는
단연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를 꼽을 수 있다.
특히 금제 사리호는 그 조형미와 공예기법에 있어 백제 금속공예의 백미로 꼽힐 만하다. 높이 13㎝, 어깨 폭 7.7㎝에
보주형(寶柱形, 한 쪽이 뾰족한 구슬 모양) 고리가 달린 뚜껑이 있다. 표면은 넝쿨무늬와 작은 원이 나열된 무늬 등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몸체는 중간 부분에서 위아래로 분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뚜껑과 길쭉한 목, 어깨와 몸통으로 이어지는
곡선은 단정하면서도 유려하다. 금제 사리호의 조형미와 표면 장식을 통해 7세기 당시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알 수 있다.
이같이 항아리 모양으로 된 금속 사리기는 매우 드문 편이다.
이 금제 사리호 안에서는 또 하나의 금제 사리호가 발견됐다. 사리호가 외함과 내함으로 되어 있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금제 사리호는 사리외함, 안에 있는 금제 사리호는 사리내함인 셈이다. 이 금제 사리내함은 높이 5.9㎝에 어깨 폭 2.6㎝이다.
보주형 꼭지가 달린 뚜껑을 비롯해 전체적인 모양이나 무늬가 사리외함과 비슷하다. 그러나 외함과 달리 몸체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일체형(一體形)으로 되어 있다.
사리내함에서는 사리 12과와 구슬, 짙은 갈색의 깨진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미륵사지석탑에 안치됐던 사리기는
사리외함 안에 사리내함을 안치하고, 이 내함 안에 다시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했던 전형적인 3중 구조를 보여준다. 유리 사리병이
깨친 채 발견된 것은 적잖이 아쉬움을 남겼다.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당시 백제의 불교적 열정에 비춰볼 때 내함에 들어있던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일 것이란 의견도 제기되었다.
이 밖에 은제 관장식은 백제 특유의 모양으로,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이 돋보이는 공예품이다. 우아한 모습의 금제 족집게,
푸른색과 옥색 등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유리 구슬도 7세기 백제 공예술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유물들이다. 이들 사리장엄구
일체를 살펴본 고고학자와 미술사학자들은 “백제 최고의 공예미술품으로 평가 받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버금갈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 발굴로 백제 미술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새롭게 드러난 백제인의 일상
금제 사리호가 백제 공예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유물이었다면 은제 관장식과 소형 금판, 사리봉안기는 7세기 백제인들의 일상과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또다른 흥미를 자아낸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시대 은제 관 장식은 10여 점이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제작시기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은제 관식’ 2점은 어느 정도 제작시기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정확한 제작 연대는 단언할 수 없어도 일단 탑 내부에 안치된
시기는 639년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은제 관장식은 백제의 고위 관료들이 착용했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불교와 관련되지도 않은 은제
관장식을 탑 속에 사리장엄구와 함께 넣은 것일까? 고분(古墳) 출토 유물 전문가인 이한상 (李漢祥) 대전대 교수는 “639년
미륵사 석탑 사리봉안법회에 참석했던 백제의 고급 관료가 자신이 소유했던 가장 중요한 물품을 공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또 2점의 관장식 가운데 꽃봉오리 5개가 장식된 것의 주인은 은솔(恩率, 16관등 중 제3품)
이상의 관리였고 3개가 장식된 것을 착용했던 사람은 그 아래의 관리였을 것으로 해석했다. 지위가 높을수록 꽃봉오리가 많은
관장식, 그러니까 좀더 화려한 관장식을 착용했다는 설명이다. 물론 아직까지 무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은제 관장식은 앞으로 백제시대 은제 관장식의 발전과정과 특징, 착용자, 불교 시주의 풍습 등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미륵사지석탑 출토품 가운데엔 금제 소형판 18점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해선 백제인들이 화폐처럼 사용한 금화(金貨)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 소형판 가운데 하나에선 시주자가 누구인가를 기록한 명문(銘文)이 확인됐다.
여기엔‘중부(中部)의 덕솔(德率, 백제 16관등 중 제4품) 사람인 지율(支栗)이 금 1량을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兩)’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서체 전공자인 손환일(孫煥一) 경기대 연구교수는 “이들 금판은 사리봉안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미륵사에 시주한 것들이며 이 가운데 하나에 그 단위를 ‘금 1량’(金壹兩)으로 표시했다는 사실은 곧 금화임을 말해주는 것”
이라고 주장했다. 대전대 이한상 교수도 “금제소형판은 그 기능을 화폐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며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금제 사리봉안기도 7세기 백제의 서체와 글쓰기의 풍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흥미로운 출토품이다. 이 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한자를 음각한 뒤 붉은색 칠(주칠, 朱漆)을 해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해놓았다.
여기엔 미륵사의 창건배경과 시주자가 새겨져 있어 발견 당시부터 세간의 큰 화제가 됐었다.
손 교수는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서체가 중국 북조(北朝)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사리봉안기에 새겨진
명문에 빠진 글자가 있었고 그 글자를 중간에 끼어 넣은 흔적이 발견된다고 밝혔다. 사리봉안기 뒷면을 보면 원래
‘진용선근(盡用善根)’이라 쓴 것을, ‘용(用)’과 ‘선(善)’자 사이에 작은 글씨로 ‘이 차(此)’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백제인들이 빠뜨렸던 ‘이 차(此)’자를 다시 새겨 넣었는데 여기서 ‘이 차(此)’자는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일체의 행위
’를 뜻하는 것이다. 이 명문에서 행위의 주체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아주 핵심적인 글자이기에 이 글자를 추가해 넣은 것”
이라고 설명했다.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에는 이처럼 당시 관료들의 관 장식 착용의 풍습, 사리 봉안 법회에서의 시주 풍습,
글쓰기의 풍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유물 하나에 감춰진 역사의 비밀이 참으로 재미있게 다가온다.
또한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백제인들의 불교에 대한 종교적 기원뿐만 아니라 백제 왕권의 강화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 근거로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아래 부분에 주목한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량한 근원을 재산으로 삼아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여기에서‘대왕 폐하’라는 문구는 백제가 대내적으로 왕권이 강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대외적으로도 백제의 왕이
중국의 군주와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정치와 불교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시대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는 개연성이 매우 높은 추론이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는 이처럼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니 백제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촉발되는 왕궁리 석탑의 비밀
미륵사지석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익산 왕궁리 5층 석탑(국보289호)이 있다. 1965년 이 탑의 해체 수리 과정에 탑의 내부에서
사리병, 사리함, 불경을 새긴 금판(이상 국보 123호)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그 후 이 탑과 사리장엄구의 연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대체적으로 9세기 전후의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제작했다는 견해가 유력했지만 간간이 백제시대에
제작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을 계기로 통일신라말-고려초 제작설이 도전을 받게 됐다.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가
왕궁리 5층석탑과 거기서 나온 사리장엄구의 제작 시기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다.
이미 왕궁리 5층석탑 사리장엄구가 백제 것이란 주장을 펼쳤던 한정호 동국대박물관 학예사는 사리장엄구뿐만 아니라 왕궁리
5층석탑 모두 백제 시대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그 근거로 왕궁리 5층석탑 사리기에 장식된 연꽃무늬와 작은 원 모양의
무늬 등의 디자인 방법이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와 상당히 비슷한 점, 왕궁리 5층석탑의 기단부 구조도 미륵사탑과
일치한다는 점(심초석 주위가 열 십(十)자 모양의 통로형 구조라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학계 관계자들은 대체로 신중론을 펴고 있다. 한 불교조각 전문가는 “두 탑의 사리장엄구의 무늬의 유사성은
주목할 만하지만 왕궁리 석탑에서 함께 나온 불상은 연대가 9~10세기 후백제 또는 통일신라 때의 것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왕궁리석탑과 사리장엄구를 백제 것으로 단정 짓기엔 무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미륵사지석탑이라는 타임 캡슐이 개봉된 순간 재점화된 학계의 논의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광표님의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 유물발굴기중에서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2 / 보물 제1753호
우리나라에 전승된 향로들이 보편적으로 다리가 3개이고 장식이 없는데 반해,
미륵사지출토 금동향로는 다리가 짐승 얼굴 모양이며 4개 달린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동요로 잘 알려진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이야기도 6년전 미륵사지 석탑 복원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 되면서 설화 속 인물로 다시 쓰여질 가능성이 높...빌려온글
'전라.광주.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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