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안개로 시야가 너무 흐리다 길도 전에 다녔는데 꼭 새로운길 같다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문설명]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이 돌무덤은,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신라 법흥왕 19년(532년)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왕궁(太王宮)에서 돌아가시자 시호(諡號)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다고 하여, 가락국
제10대 양왕의 능으로도 전하며, 양왕은 신라왕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무덤은 형식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방형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나 후면은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각 층의 등급이 높이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석렬은 전면에서도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모퉁이가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면 중앙에서의 높이는 7.15m이고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4단의 동쪽에 폭 40㎝, 높이 40㎝, 깊이 68㎝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
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석수가 각각 1쌍씩 있는데,
이 석물들은 최근의 시설물들로 돌무덤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이 돌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설이 제기되어 왔다. 먼저 이것을 석탑이라고 보는 것은 이와 같은 형태의 요구가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되어 있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헌 산천조에 '왕산(王山)'이 있고 그 각주(脚注)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에 있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기로는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대한민국 구서구석에서
능 돌담벽을 따라 한바퀴 돌았다
가락국 양왕릉이란 비석 못들어가니 줌으로 땡겨봤다
구형왕릉은 조선 정조 22년 산청군 좌수 민경원이 이 능에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능에서
1km 남짓 떨어진 절에 들러 잠시 쉬고 있다가 시렁에 얹혀있는 궤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중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스님은 ‘예부터 누구든지 이 궤에 손을 대기만 하면 큰 화를 입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민좌수는 더욱 호기심이 들어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궤를 열어보니 기우제를 지낸 큰 석묘가 바로 구형왕의 능이라는 기록과 영정,
갑옷, 칼 등이 들어 있었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이 소문이 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 문중에 알려져 이 때부터 김씨 문중에서 이를 수호하고 있다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한국지명총람 등 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다
덕양전은 화계리에서 특리-매촌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비교적 규모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전각으로
개.보수가 끊임없이 이루어진 듯하다. 양왕과 왕비인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봄(음3.16),가을(음 9.16)에
제향하고 있다. 가락국 시조 대왕인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이 사액되자(조선 고종 1878),
왕산 산자락, 구형왕릉의 위에서 양왕과 왕후를 모셔오던 수정궁(사)도 덕양전이라 이름을 고쳤고 후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1928)
여기나저기나 문이 굳게 잠겨있으니 들어 갈 수도 없고 밖에서 수박 겉핧기 식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동의보감촌 주차하고 들어서니 겨울이고 평일이라서 인지 텅텅비어 인적이 없다
한번 들어가보려다가 문이 잠겨있을것 같은 예감 그냥 지나첬다
축제기간에만 운용하는것인지 너무 조용해 겉만 한바퀴 돌아본다
여기도 약초를 판매하는 시골장터인가본데 고요하기만하다
이소나무는 금서면 특리마을 주민들이 기증한 수령 300년으로 추정
여름에 아이들 이 물놀이하고 놀기 좋겠다
행사장 광장인가본데 넓기는 넓다 저건너는 식당인듯
여기는 체험 민박촌인데 들어가보니 거주하는 사람도 없고 조용하기만하다
개울가에 정자다
동의본가 한의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도없다 조성하느라
돈을 많이 쓴것 같은데 건물들이 너무 아깝다
민박도하고 약초체험도 한다는데 수리중이라는 안내문만 보인다
아래 안내문을 참고하시길
숙소에서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다 많은비는 아니지만 여행중에 비가오면 난망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철수 할 수도 없고 강행군으로 들어간다 먼저 구형왕능으로
이동하는데 꾸불꾸불 산중길인데 생각보다 멀다 비가와서 인지 왕래하는 차도 몇대 안보인다
안개거끼어 조심운전 모드로 구형왕릉에 도착했는데 여기도 문이 잠겨있다
안내문에는 담벽이 무너지고 훼손돼서 출입제한이란다 정말 어디를가든 문화재 구경하려면
이렇게 통제를 하니 기분이 잡친다 어찌하려 뒤로돌아 살펴보고 사진 몇장 찍고 합장하고
기념관으로 왔는데 여기도 문이 잠겨있다 담넘어로 몇장 담고 동의보감촌으로
그런데 여기 동의보감촌도 썰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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