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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문익점 묘와 목화 시배지








                                                           도천서원 전경








                                                  도천서원 일부는 문이 잠겨 밖에서 들여다봤다




본관 남평(). 자 일신(). 호 삼우당(). 시호 충선().

 초명 익첨(). 강성현(: 경남 산청) 출생.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순유박사()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使)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1375년(우왕 1) 다시 전의주부(簿)로 등용되고 1389년

좌사의대부()가 되었으며, 공양왕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밀려났다. 1440년(세종 22) 영의정

추증되고 강성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 사당이 세워졌다.

                                 아래의 사진을보면 어렸을때 지켜봤던 여러모습들이 생생히 기억됩니다







목화씨 도입 100년에 무명배 대중옷감으로 정착

 

고려말 문익점에 의한 면 종자의 유입은 우리나라 직물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산업 및 경제구도 변화를 초래했다.
삼국시대 이래 방직산업은 견직업과 마작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견직물은 대부분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계,백첩포 등도 외국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나 모시와 같은

마섬유에만 의지했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 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때 헐벗음 혁명적 해결사-문익점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물레'라고 한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성명 '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래(文來)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런가 하면, 목화를 재배하여

만들어낸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옷감 짜는 베틀을 만들고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의 이름

'문영'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영(文英), 역시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리고 의성(義城)에 목화를 크게 심어 우리 민족 모두가

'백의민족'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의성현감으로 있던 '문승로(文承魯)' 또한 문익점의 손자이다.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것으로 옷감을 만드는 방법

까지도 연구해낸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의 장인(丈人)이다.


국가경제에 큰 기여 그리고 산업혁명


더욱이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木棉) 생산은 조선시대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麻)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

하는 목면(木棉)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펌글)

 








                                                 파란 비닐 자루에는 목화가 가득 담겨있네요




                                                              이렇게 목화를 제배하고 있다

문익점(文益漸, 1329년 2월 8일~1400년 2월)은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으로,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 시호는 충선(忠宣),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1]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 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다.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의 씨 몇 개를 고려로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이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최초로 한국에 면포를 만드는 목화를 들여왔다고 전해지나, 최근 백제 시대

 면직물이 발견되어[2] 삼국시대에도 목화 재배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그의 목화

 반입과 재배 기록은 후일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곡의 문인이다


생애

문익점은 1329년 2월 경상남도 산청의 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익점의 생년은 다소 불확실하여 1328년생 설과 1331년생 설, 1332년생 설 등이 전한다.

그의 첫 이름은 익첨(益瞻)이었다가 뒤에 익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 문숙선은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12살 때부터 당대의 학자 이곡(李穀)의 제자가 되어 그 아들 이색(李穡)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3]

1360년(공민왕 9) 문익점은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이 되었다.

원나라 사행길과 목화 반입

1363년에 좌정언으로 재직 중 계품사(啓稟使)인 문하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어,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이때 연경

도착한 그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여 고려

진군하게 하자 이를 지지했는데, 원나라덕흥군고려왕으로 봉하자 덕흥군의 추종자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하여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란의 주모자였던 최유가 마음대로 문익점의 이름을 반란군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라는 견해도 있다.

목화 밀반입

귀양지 운남에서 문익점은 사람들이 목화를 심어 옷을 해 입는 것을 보았다.[4] 고려에서는 귀족들이나

왕족들만이 솜옷과 솜이불을 해 입었으므로 그는 이를 고려로 반입할 뜻을 품게 된다.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원나라는 법으로 목화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다.[4]

귀국할 때 수입 금지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귀국, 사행길을 마친 뒤 관직을 사퇴하고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반을 나눠서 목화를 재배한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자신의 시종인 김룡(金龍)과 함께 밭을 지키던 노파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래 원나라의 어느 목화밭에

들어가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다.

목화 재배 성공과 시중 보급

3년 만에 목화의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라서 고민하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실을

 뽑아냈다. 정천익이 호승인 홍원(弘願) 등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기계(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고,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서 이를 배워 다시 시중에 보급시켰다. 이후 이를 근거로 옷과 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그가 심은 것은 실패하고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어서 다시 재배하여

 성공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고 목화 재배를 교육하였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에서 무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귀족 권문세족과

왕족들만이 입고 덮던 솜이불과 솜옷이 시중으로도 확산된 것이다. 후일 조식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며 그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은 실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4] 이 기구를 '물레'라고 부르는데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4] 문래가 발명한 실잣는 기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문래라

 부르다가 말이 와전되어 물레가 된 것이다.

관료 생활

1374년 그는 중현대부 좌대언 우문관제학 겸 지제교(中顯大夫左代言 右文館提學 兼 知製敎)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그는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의 사신을 처벌할 것을 상소했다가 친원파 권문세족의 역공격을 받고

청도군수로 좌천되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해서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감주부(典儀監注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37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왜구의 침입이 있었지만 그는 홀로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시묘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383년(우왕 9) 이성계의 추천으로 효자비가 세워진다.

생애 후반

신진사대부와의 갈등과 은퇴

성리학적 소양이 있던 그는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로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右文館提學 書達同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러, 그해 8월 그 무렵의 토지에 대한 전제개혁(田制改革)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 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때 문익점은 이준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할 때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문익점은 이색, 이림, 우현보 등과

더불어 사전혁파를 비롯한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였다.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사헌부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390년 8월 우문관제학 서연동지사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정에 복직하였다. 그해 10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한 시무론 8조를 올렸으며, 11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진주로 물러났다.

은퇴와 최후

그는 기울어져가던 나라 일, 자신의 학문을 소신껏 펴지 못하는 안타까움, 학문이 더욱 깊어지지 못함을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삼우거사라 불렀다.[4]

1392년 이성계, 정도전 등이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한 문익점은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4] 1400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삼우당실기》 (三憂堂實記)가 있다.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그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익점은 중국에서 면화를 가져와 민간에

 보급하고, 직조(織造)를 가르쳐 백성들을 크게 이롭게 했다며 매우 높이 평가되고 숭배되었다. 또한 그의

 치적은 성리학의 초기 인사인 이곡의 직제자의 한사람이자 이색, 정몽주의 동문이었으므로 성리학 이념의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후

묘소는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고 묘 근처에는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세워져 있다. 조선 건국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다.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제향되었다. 단성의 사당에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정조1785년 직접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을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묘소는 1983년 8월 24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66호 《산청문익점묘    위키리백과에서

                                                            부민각 앞에 멋진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