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한옥마을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서 8km 거리에 있는 지곡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은지
100여 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 채가 전통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 예부터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비록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다시 1504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고난을 겪은 인물이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개평한옥마을이 있는 지곡면에 들어서면 '함양일두고택'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고, 그 아래로
' 오담고택', '하동정씨고가', '노참판댁고가' 등 의 표시가 보인다. 고풍스러운 고택도 여러채 있어
비교적 마을규모가 큰 개평한옥마을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배형상을 띄고 있는 마을 형태 때문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울길을 따라 마을길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마을의 전설을
확인하게 해주는 종바위가 우물과 우울자리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다섯개의
우물외에는 일절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 강점기때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새로 우물을 판 이후로 마을이 기울었다고 한다.
개평한옥마을은 14세기에 경주김씨와 하동정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 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살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은 530년
전통의 가양주인 지리산 솔송주가 유명하다. 하동정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온 솔잎으로 담그는 솔잎술로
1997년 후손들에 의해 복원,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개평한옥마을의 골목길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 하고 있다. 1880년에 지어졌다는 하동정씨고가, 1838년에 지어진 오담고택, 또, 풍천노씨 대종가 등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
현재 보이는 건물들은 순조 24년(1824) 건립되었으며 1940년대에 중수한 것이다.
남부 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이며 독립된 채들로 구성되었지만 사대부 집답게 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곳간은 초가였으나 기와로 변경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둔 팔작지붕이며 5량가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했고 약한 민흘림이 있다. 대문간채는
양반가답게 솟을대문으로 삼문 형식이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에 전퇴를 두었고
팔작지붕으로 근래에 신축했다. 기와는 옛것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큰 제사가 있을 때
남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풍천 노씨를 대표하는 종가이지만 정여창 고택에 비해서는
공간 구성이 약하고 영역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건물을 지을 당시 하동 정씨에 비해
힘이 크게 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채
정여창은 김굉필과 함께 도학(道學)의 개창자로서 평가되는 인물이다. 도학의 개창자라는
점에서 이들의 도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으며 그것이 이후 조선의 성리학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여창의 경우에는 근대 이후 새롭게
편집된 문집에서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그 성리학 사상이 비교적 폭넓게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본고를 통하여 그간 정여창의 성리설 연구에 활용되었던 자료들이 모두
정여창의 것이 아님이 밝혀지게 되었다.『一두續集』에 추가된 세 편의 논설은 물론, 두 편의
서간문까지도 모두 정여창의 저술이 아니며 정여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의 글들이 잘못
수록된 것이었다. 특히 정여창의 대표적 저술로 알려진 「理氣說」, 「善惡天理論」, 「立志論」
세 편의 논설은 호남의 유학자 정개청의 글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정여창의 논설이라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던 그간의 연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정여창의 성리설에 대한 연구는 다시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기론과 마음에 관한 정여창의 성리설을 살피는 데에는 현재로서는 남효온이 남긴
정여창 관련 자료가 가장 신뢰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간접적 자료를 통해 밝힌 것이기는 하지만,
정여창은 이기론과 마음의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였고, 정여창의 성리설은 이후 조선의
성리학사에서 다양한 관심 속에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모습으로 잘보존돼 있어서 다행이다
뜰에 서있는 소나무가 일품이다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고있습니다. 동방오현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다섯 뛰어난 현인을 말하는데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聖殿)에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두 선생 외에 네분의 선비들을 보면 다 대표적인 유학자들입니다.
사옹(蓑翁)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입니다.
중요한 것이 김굉필-정여창이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광채
사당인듯 문이 잠겨있다
안채 뒷뜰
기와로만 든 굴뚝
안채모습
중문채 문간방을 겸하면서 좌우의 벽이 막힌 통로형식 으로 만들어 졌으며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통하여 속세로 출입을 한다는 의미로 만들었다 즉 안사람들의 거칠은 바깥
세상의 물정에 물들지 않고 순박한 생활을 할수 있다는 의미다 중문늬 문지방의 가운데를
낮게 만들어 치마입은 부녀자들으이 다니기 쉽게 만들었으며 문간방에는 안채에 딸린 문간
방에는 안채에 딸린 하인들이 거주하였다
광 지금의 창고인듯
일두선생 기념관은 자물쇠로 체워져있고 썰렁하다
남사 예담촌에서 봤던 아름다운 돌담길 여기서도 볼수있다
하동정씨 고택을 뒤에서 들어왔다
하동 정씨고가
경남 문화재 자료 제361호인 하동 정씨고가는 큰길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런 곳에 문화재가
있다니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정경이 바로 우리 유산의 별미다.
이 집으로 가는 골목은 돌담이 가지런히 좌우를 호위하는 형상이다. 대문채를 지나자 눈앞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앞마당에 아무 치장이 없는 것이 기본이며 여기서도
그 규범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정면 여섯 칸에 측면 한 칸인 5량가로, 300년 이상 된 一자형이다. 전후 툇마루와 동쪽에 툇마루를
가진 맞배집이다. 중앙에 두 칸의 대청마루를 두었고 오른쪽에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왼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방과 인접한 후면에 툇간을 두어서, 배면에서 보면 광창 판벽이 특이하다.
또한 건넌방 동쪽 편에 눈썹지붕을 내서 건넌방에 기거하는 며느리와 아이들의 편리를 고려한
것이 인상적이다. 건넌방 온돌은 전면에 함실각주[8] 아궁이를 두고 있으며, 여름에는 넓은 안마당에
여백을 두어 충분한 햇살과 바람을 받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햇살이 강렬한 여름날 오후 안채의
대청마루에 서 있으면 시원한 안마당과 남풍에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든다
마을 앞은 개울이 흐르고 위에는 폭포도있다
어디를가나 아름다운 곳에는 정자가있다
일두 선생이 산책했다는 산책길
종암우물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산수유
노참판댁 고가
노참판댁 고가는 개평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안채 앞마당 좌우로 광 1채, 억새로 만든 3칸 집, 대문 밖에 하인들이
거처하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및 사당만 남아 있다.
마을 전경의 일부를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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