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의 장의순 대선사를 기리는 곳, 초의선사 유적지 *
초의(장의순) 대선사의 출생지인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그 분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추모의
장을 마련하였다. 초의선사의 생가가 위치한 이곳에 생가복원, 추모각, 추모비, 유물전시관,
* 초의선사 의순에 대하여 *
초의선사는 조선 정조10년(1786) 에 우리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수행하면서 선 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대선사이자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으로서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으며 시, 서, 화에 능통하여 5절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등 당대 최고의 거유 석학들과 깊은 교류를 통하여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다.
1866년 80세에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초의집(草衣集)》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이선내의(二禪來義)》가 있다.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면서 지은 차서(茶書)인
《다신전(茶神傳)》이 있다. 다신전의 내용은 찻잎따기, 차만들기, 차의 식별법, 차의 보관,
물을 끓이는 법, 차를 끓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차의 향기, 차의 색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대각문
대각문을 지나니 차밭이 먼저나온다
초의선사 동상
탱화를 잘그려서 당대 오도자(吳道者)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한국 최고의 근대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서예는 천의무봉(天衣無縫) 바로 그것이었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으로부터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완당 김정희(金正喜)등
당대의 석학들과 종파를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일지암 초당
뜰에는 불두화가 많이 피어있네
명선관
조선 차 역사박물관
각종 다기들
조정대신들과 왕의 티타임
금오초당
초의선사의 뒷모습일까?
초의선원
용호백로정 저 문턱을 넘의면 연못이 있다
초의가 완당 김정희와 2년여간 동고동락했던 정자를 복원하였다.
보제루(체험관)
초의선사 생가
39세때 대흥사 뒷편에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하고
이곳에서 초의선(草衣禪),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專)등을 저술했다.
55세(1840년)에 헌종(憲宗)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
(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58세(1843년)에 고향을 찾아 집은 다 헐물어가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보며 눈물로 시를 지었다.
1866년(고종 3년) 7월 2일 입적하시니 세수(世數) 81세요 법랍(法臘)은 66세였다.
돌아나오며 봉수산과 대각문을 바라보며
봉수(烽燧)란 봉화불을 피워 각지에서 서울까지 전달되는 다섯 가지 루트를 이야기하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봉수대는 전국에 5거준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유달산 봉수는 제5거준에 속하여
진도의 첨찰산, 해남의 황원, 목포의 유달산, 무안의 군산 봉수산과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전라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 남산으로 연결되는 연락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무안 군산은 지금 이곳에 있는 봉수산을 말하며 황원은 해남 화원의 일성산을 말하는 것 같다.
봉수산 정상을 올라가면 주변 해안가를 한눈에 살필 수 있고,
유달산 정상이 매우 가깝게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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