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면에있는 능가산 개암사를 둘러보고 곰소 젓갈시장에서 새우젓과
황석어 바지락 젓을 사고 바로 래소사로 직행했다 옆지기의 부탁인데
절대로 잊고 통과하면 안되지 ㅎㅎ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무왕 34)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靑旻)이 대웅보전을 지어 중건하였고,
1604년(인조 18)청영(淸映)이 설선당과 요사를 지었다.
1902년관해(觀海)가 수축한 뒤 1983년 일주문을 세우고 198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으며, 1986년
천왕문을 짓고 설선당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1987년 봉래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88년 요사인
진화사(眞華舍)를 건립하였다. 1995년 수각(水閣)과 종각을 짓고 범종을 조성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은 중국의 소정방(蘇定方)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하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현존하는 당우 및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鐘),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경(法華經折本寫經), 보물 제1268호로 지정된 괘불 등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요사채, 설선당(說禪堂)·보종각(寶鐘閣)·봉래루(蓬萊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3년(인조 1)에 완공되었는데 그 의장(意匠)과 기법이 매우 독창적인 조선 중기의
대표작이다.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법당 내부의 벽면에 그려진
관세음보살상 등의 그림도 일품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다 하고,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그때의 일화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고려동종은
1222년(고종 9)변산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든 종인데, 1850년 땅속에서 발굴된 뒤 이 절로 옮겨졌다.
그리고 법화경절본사경은 조선 초기에 이씨 부인이 망부(亡夫)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필사한 것이다.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인 설선당은 인조 때 승려의
수학 장소로 건축되었고, 봉래루는 1414년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하였으며, 현재 산문(山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입구의 지장암(地藏庵)과 절 후방 1.5㎞ 지점에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절 일원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행하며 여행하며 수도 없이 들린 내소사지만 언젠가 아침에 옆지기와 오니 저 전나무
숲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얼마나 좋던지 그향기를 못잊어 또 찾는데 그뒤로는
한번도 그 그윽한 향기를 맏아본적이 없어 아쉽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단풍나무 숲이 이어진다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1000년 수고 20m 둘레7.5m
貞祐 10年(1222), 청동, 전체높이 105.3cm, 종높이 71.0cm, 입지름 66.8cm, 주종장 한중서, 전북 부안 내소사, 보물 제277호 고개를 숙인 신라종과는 다르게 용뉴가 앞을 향하고 있으며, 특히 꽃잎모양으로 발달한 입상대와 천개 아래에 앉은 삼존불을 갖추어 고려 후기 종의 전형적인 특색을 구비하고 있는 종이다. 꽃잎을 두겹으로 빽빽이 돌려 매우 화려하면서도 특징적이다. 이 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장면은 삼존불이다. 연꽃으로부터 피어난 구름 위에서 본존은 연화좌에 정좌하고 있으며 협시불들은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서 있다. 삼존불의 두광 뒤쪽으로는 구름꼬리가 S자로 휘날리고 있다. 섬세한 천개의 영락들은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분위기에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들어간 구리가 700근에 장인은 한중서라는 내용이 몸체에 새겨져 있다 . 지금은 내소사 범종각에서 조석예불에 타종되고 있다. |
봉래루는 1414년 태종 12년에 건립되었다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제각각 틀릴 뿐 아니라, 주춧돌 위에 올려놓은
기둥들도 짧았다 길었다 천연덕스럽기만 하다. 삐뚤고 짧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이렇듯 훌륭하게 재목으로 쓴 옛사람들의 지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봉래루 2층 누각에는 ‘내소사만세루중건기(1856)’, ‘변산내소사사자암중건기(1856)’,
‘변산내소사영세불망기(1875)’ 등의 편액과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시문(題邊山蘇來寺)과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다. 다음은 정지상의 시문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이다
이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으로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짜은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앞쪽 문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지붕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조사전이란 조사스님 또는 사찰 창건주 스님의 공덕과 위업을 위해서
세운 전각이다
조사란 종파를 개설한 스님또는 그 가르침을 이어 전한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각 사찰에서 수행하여 귀감이되는 스님을 포함 하기도한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이 봉안된 곳이다. 명부전이라고도 불린다.
지장보살은 머리카락이 없는 민머리의 형상으로 때로는 천관(天冠)이라는
두건을 쓰고 있기도 하다. 손에는 석장을 쥐고 있기도 하다. 부처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부처 없는 세상에서 육도(六道)의 중생(衆生)을
교화한다는 보살이다. 또한 시왕들과 함께 봉안되었을 때는 시왕전으로 불린다.
지장보살은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과 함께 한다. 나한전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존재로 주로 서역인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석가모니부처가
주불로 봉안된다.
진화사.1988년 우암 혜산선사가 요사인 진화사를 건립하였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꽃살문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건물 정면 여덟짝의 창호엔 꽃무늬 문살이 가득하다. 문짝 하나 하나가 그대로
꽃밭이고 꽃가마다.
사방연속무늬로 끝없이 이어진 꽃들은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다.
단청(丹靑)의 화려함은 세월에 씻겨 내려갔고 이제는 속살을 드러내 나무빛깔
나뭇결 그대로다. 담백하고 청아하며 깔끔하고 순박한 한국의 멋,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깊은 밤, 꽃살에 붙은 창호지 틈새로 은은한 달빛이라도 새어 들면 세속의 욕망은
소리 없이 흩어지고 금방이라도 해탈의 문이 열릴 듯하다. 꽃살문 하나에도 이처럼
깊은 무념무상의 경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이름 없는 목공의 섬세한 손끝
하나에도 이처럼 지극한 불심과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답사기에서
불교 체험관
두부부가 삼남매와 같이 줄곳 오손도손 설명하고 답하고 참 좋아보인다
너무 조용하다
줌으로 땡겨본 청련암 날씨가 무척 더워 올라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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