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드러서면 맨먼저 작은집 사랑채가 나온다
수당인지 인촌인지 아리송 친부 김경중
굴뚝을 낮게 한게 특이하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라는 마음에서일까?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조선 후기의 부농 주거로 남북으로 긴 장방형 대지 위에 큰집과
작은집이 앞뒤로 나란히 북향해 건립되어 있다.
큰집에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안 문간채, 바깥 문간채 솟을대문 등이 있으며 작은집은
큰집에 비해 곳간채만 없을 뿐 집의 규모나 격식에 큰 차이가 없다. 각 채의 건립 년대는
큰집 안채 1861년, 사랑채 1879년, 작은집 안채 1881년, 사랑채 1903년이다.
집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큰집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一자형 홑집이다. 남부지방의
일반적인 민가의 간살과 같이 부엌ㆍ안방ㆍ대청ㆍ건넌방 순으로 실이 구성되어 있다.
큰방과 부엌의 한쪽 모퉁이에 부엌방이 있으며 그 옆에 도장이 있다.
건넌방은 전면에 벽장을 달아 심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며 측면은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 전면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곳간채가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며 억새로
지붕을 이어 물매가 다소 급하다. 각각 2칸의 곳간과 헛간, 그리고 온돌방이 있으며 헛간에는
디딜방아가 놓여져 있다.
사랑채는 안채 동쪽에 문간채들과 함께 별도의 일곽을 이룬다. 一자형 팔작집이며 칸살은
좌측부터 큰방ㆍ대청ㆍ건넌방으로 구성되었다. 전면과 측면에 모두 툇마루가 있으며 안방
뒤에는 조그만 골방을 덧달아 내었다. 이와 같이 큰방 뒤쪽에 골방이나 도장방을 만든 것은
이집의 공통된 특징이다. 작은집은 큰집과는 달리 각 건물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一자집이며 부엌ㆍ큰방ㆍ대청ㆍ건넌방 순으로 구성되어, 큰집 안채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대청의 규모가 1칸이고 건넌방 뒤쪽에 도장방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사랑채는 ㄱ자집으로 전면에 돌출한 누마루까지 갖추고 있어 큰집보다도 더 격식을
갖추었다. 왼쪽부터 부엌과 골방ㆍ안방ㆍ대청ㆍ건넌방과 윗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넌방
앞에 누마루가 위치한다. 삼면에 세살문이 있고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안 문간채가 있어 남녀유별(男女有別)에 따라 공간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안 문간채는 억새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나 나머지는 모두 기와집이다.
민족문화 대백과
작은집의 사랑채를 돌아가면 당시 식용수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촌은 울산 김씨로 하서 김인후(장성.황룡면.필원서원)선생 13대손이다
인촌 선대도 장성에 살았는데 고창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인촌의 증조부 김명환이
고창 해리에 볼일을보러 갔다오면서 부터다 선비였던 그는 날이 어두어지자
학식과 재력으로 소문난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 있는 정계량 진사댁에서 하룻밤
묶게되어 사랑채에서 술잔을 나누며 서로 의기투합하여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다
그의 아들은 처가가 아들이 없기 때문에 이곳인촌마을에 와서 처가의 천석지기
재산을 물려받아 살게 되었다. 인촌의 조모 정씨부인은 근검절약과 부지런 함으로
재산을 늘려 만석지기가 됐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뱃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빌리려오면 사람됨됨이만 보고 액수가 얼마가 되었든 언제 갚겠다는 약조도
없이 그들이 원하는 만끔 빌려주었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큰 돈을벌어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이자를 계산하지않고 훨씬 많은 돈을 갚아 재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한다. 그래서 도깨비 얘기도 나온게 아닐까?
사랑채에는 원인모를 불이 자주 일어났고 급기야 화적떼의 행패까지 받게되자
양부와 생부는 집을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 보존케하고 부안줄포로 이사를 했다
이집에 재앙이 올것을 미리알고 도깨비들이 그랬다는 말
이집은 도깨비 불이 난다고 소문난 곳으로 인촌집안의 재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도 도깨비의 도움이라고.인촌의 조모 옷장 속에는 도깨비가 살았는데 얼마나
장난이 심한지 옷장속의 옷이 자고나면 방밖 나무에걸려잇는일이 수시로 발생했다함
김성수 처 고광석 아들 김상만 양부 원파 김기중
맨 안쪽에는 1861년에 건립된큰집의 안채가 북향을 향하고 있네요
헛간에는 디딜방아도있고
소박한 부엌의 모습
인촌 생가를 둘러보고 줄포로 넘어가는데 뜻밖에도 길초에 만정 김소희님의
생가가 있어 발길을 멈춘다
판소리 명창 김소희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본명:김순옥)는 1917년 12월 1일에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소리를 듣고 감동을 받아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한다. 1930년에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934년에 정정렬에게, 1938년에 박동실에게, 광복 후에 정응민,
김여란, 박록주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김소희는 춘향가의 경우에 정정렬제를 배우고 나서 먼저 배웠던 송만갑제를 거의 잊었다가 박록주,
박봉술에게 그 일부분을 되찾았다. 그리하여 김소희는 춘향가를 <긴 사랑가>는 정정렬제(사랑 사랑)와
정응민제(만첩청산) 두 가지로, <기생점고>부터 <십장가>까지는 송만갑제로, <옥중가>는
정정렬제(천지 삼겨)와 박동실제(동풍가) 두 가지로, <방자가 춘향집 가르키는 데>부터 <사랑가>는
대개 정응민제로, 나머지 대목은 대개 정정렬제로 불렀다.
김소희는 심청가의 경우에 일제 때 박동실에게 배웠고 광복 후 정응민에게도 배웠는데, 두 바디를
섞어 한 바탕을 짰다. 박동실과 정응민의 소리 모두 부침새와 시김새가 복잡하며 아기자기하게 짜여있는데
, 정응민의 소리는 동편제의 특성이 많이 들어있는 만큼 박동실의 소리보다 매우 진중하다. 그리고 흥보가는
박록주에게 배웠고 적벽가와 수궁가는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김소희는 1936년에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했고, 1948년에 사단법인 여성국악동호회 설립 이사를,
1954년에 민속예술원 설립 원장을, 1957년에 대한국악원 이사를, 1962년에 국립창극단 부단장을, 1962년에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1962년에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공연을, 1969년에 일본 공연을,
1972년과 1973년에 미국 공연을, 1979년에 국악 생활 50년 기념 대공연을, 1981년에 일본 공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김소희는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귀명창의 꾸준한 인기를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판소리 명창 중
유일하게 유성기음반 시대부터 콤팩트디스크 시대까지 폭넓은 기간 동안 많은 녹음을 남길 수 있었다.
김소희는 1930년대 중반에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춘향가 중 <옥중상봉>, 심청가 중 <범피중류>,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데> 등을 녹음했고 오케이 음반회사에서는 심청가 중 <심봉사 딸 기르는 데>,
<심청이 부친 봉양>, <심봉사 황성 가는 데> 등을 녹음했다. 그리고 김소희는 1936년에 빅타 음반회사에서
춘향전 전집, 춘향가 중 <이별가>와 <옥중상봉>, 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가는 데>,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등을 녹음했다. 이 가운데 빅타의 김소희 녹음 중 일부는 1993년에 서울음반에서 빅타 유성기 원반 시리즈(1)
음반과 시리즈(10) 음반으로 복원하였다.
김소희는 1959년에 KBC레코드에서 제작된 해외 소개용 국악 음반(1LP)에 남도민요,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녹음했고 1964년에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후 문화재관리국에 춘향가 전바탕을 녹음했다. 이 춘향가 전바탕 녹음은
1976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전통음악 전집에 담아 제작한 바 있고 1988년에 중앙일보사에서 국악의 향연 전집에
담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소희는 1960~70년대에 지구레코드, 신세기레코드, 시대레코드, 힛트레코드,
현대음반, 미국 넌서치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여러 장의 단가, 판소리, 창극, 민요 음반을 냈고 사가판으로
1974년에 심청가 음반을, 1978년에 춘향가 음반을 냈다. 그리고 1985년에 국악보급진흥회에서 제작된 한국의
전통음악 전집에 김소희의 춘향가 토막소리 녹음이 담겨있다. 1991년에 성음에서 김소희의 구음 음반을,
1994년에는 신나라레코드에서 김소희의 남도민요 음반을 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서울음반에서 김소희의
사가판 춘향가와 심청가를 재발매했다.
김소희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안향련, 한농선, 박초선, 박송희, 김동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남해성,
박윤초, 지수복, 이명희, 이일주, 박계향, 신영희, 유정이, 박미숙, 박양덕, 박소영, 김차경, 유수정, 한정아,
이영태, 정미정, 김유경, 오정해 등이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김소희의 문하에서 이화중선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안향련이 나왔으나 안향련은 안타깝게도 요절하였고 그 뒤를 이었던 김동애 또한
요절하고 말았다. 현재는 김소희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안숙선이 김소희의 소리를 가장 잘 물려받은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영희는 1992년에 김소희제 춘향가 보유자 후보로 인정받았다.
안숙선은 자신의 스승인 김소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1968년 무렵에 김소희 선생님 문하에 들어갔다
. 김소희 선생님은 과다한 감정 표현은 피하고 감정이 최대한 절제된 판소리를 하셨다. 재담도 해야 할 사설만
묻어떨어지게 하셨다. 김소희 선생님은 맑고 티없는 성음으로 잔잔하게 부르시는 심청가 중 <추월만정>이
특기셨다. 김소희 선생님은 여러 바디를 배우셔서 <긴 사랑가>나 <옥중가> 같은 경우를 보면 여러가지 소리제로
다 부를 줄 아셨다. 김소희 선생님이 북반주를 하면서 선창을 하시고 나면 내가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졌다. 대체적으로 알기 쉽게 가르쳐 주시는 편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잘 따라 부르지 못하면 ‘아야,
쉬운 대목인데도 이상하게 잘 안될 때가 있는 법이니라’ 하시면서 잘 못할 때도 꾸짖지 않고 용기를 주셨다.
발음, 음정이 정확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발림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흔히들 김소희 선생님은 성격이 차고
내성적이시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지만, 속 마음이 무척 따뜻한 분이었다. 김소희 선생님은 인정이 많으셔서
어려움을 겪는 국악인이 있으면 궂은 일도 마다 하지 않고 나서서 많이 도와주셨다. 여러 방면의 예능에 두루
능하신 분이었다.”(1995.5.2.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안숙선 자택에서 증언)
김소희는 단가 <만고강산>, 춘향가 중 <이별가>, <옥중가>, <옥중상봉>, 심청가 중 <범피중류>,
<추월만정>, 흥보가 중 <박타령~돈타령>, 구음, 남도민요 <새타령>, <육자백이>를 장기로 불렀다.
김소희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명창은 정정렬과 박동실이다. 김소희의 소리 스타일이 이들의 소리를
가장 많이 닮아있고, 정정렬과 박동실의 소리제가 김소희의 청아한 목소리와 여성적인 섬세함, 서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소리 이념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소희가 판소리에 입문하는 데 동기를 제공한
이화중선도 김소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김소희는 장단과 붙임새의 운용에 있어 변화가 많고 매우 기교적이다. 슬픈 대목이 많은 심청가도
감정적으로 부르지 않고 서정적이고 청아한 느낌이 나게 부른다. 거친 성음이나 힘겨운 고음 처리는 청중에게
자칫 부담을 줄 수 있는데, 김소희는 고운 목을 지녔고 옛 더늠을 자신의 목에 맞게 다듬어 깔끔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부담이 없다.
김소희는 <들국화>와 같은 신민요도 작곡한 바 있고,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립창극단의
창극 공연시 편곡을 해주기도 했고, 신작 판소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김소희는 1955년 7월 22일 HLKY 라디오
방송에서 최초로 성서의 내용을 판소리로 부른 바 있는데 <탕자가>(주태익 가사)가 바로 그것이다. 김소희는
1975년 3월 30일에 종로 YMCA에서 예대 달리는 교회 주최로 열린 ‘우리 음악 부활절 예배’에서 김소희가
성서의 내용을 <부활가>라는 제목의 판소리(고수:김동준)로 짜서 공연한 바 있다. 그리고 김소희는 심청가
중에서 <범피중류>를 <뱃노래>로 편곡하여 즐겨 불렀고 '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때는 <뱃노래>를 <
떠나가는 배>로 편곡하여 불러 전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김소희는 안숙선의 말대로 판소리 외에도 여러 방면의 예능에 두루 능했다. 김소희는 강태홍, 정남희, 김종기
, 정남희, 성금연, 김윤덕에게 가야금산조를,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정성민과
손창식에게 승무를, 김희조에게 서양 악보를 배웠다. 그리고 김소희는 서화에도 능했고 승무, 덧배기춤, 살풀이
등의 무용은 무용가들이 놀랄 정도의 수준급이었다.
1995년 4월 17일, 김소희는 세상을 떠났다. 김소희의 영결식은 국악인장으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치루어졌다. 수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5명창의 가르침을 받은 마지막 여류 국창의 타계를 애도했다. 장지인
고창으로 향하는 길에는 길고 긴 가뭄을 해갈하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렸다. 대명창의 소리를 통채로 가져간
하늘도 어찌할 수 없어 눈물을 터뜨리고 만 것일까.
관리를 제대로 안한 표시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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