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46호. 지정면적 182,596㎡.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하여 1417년(태종 17) 합하여 두 고을 첫자를 떼어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이라 하였다. 성안에는 뱀의 두 눈처럼 생긴
지형에 두 곳의 샘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둘레가 대략 1.2km이고 성벽은 바깥의
돌이 흙 속에 묻힌 채 높이 1∼2m로 확연하게 남아 있다. 해자는 너비 4m, 길이 574m가 남아 있다.
성에는 남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성안에는
조선시대의 각종 건물터와 사직단·여단(厲壇)·성황단 등의 터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으로는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중요성이 매우 크다. 성안의 중요한 건물들은 별도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별
파취루 연회장이 아니었을까
복원중인 성벽
객사와 한참 떨어진 뒤에 이 지역 관리가 업무를 보던 공간인 내아가 있다.
내아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전들이 근무하던 공간과 사또가 근무하는 공간이다
뒤로는 토성으로 쌓았다
고창 지역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난 곳으로 동학 농민 혁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내부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던 전봉준의 태생지이며,
동학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였다.
성안에는 방형의 못(방지)과 큰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연못 안에는 섬을 조성해 놓았다.
연꽃이 피는 계절에 오면 이곳은 또 다른 구경거리를 보여줄 것이다.
철과 돌과 새겨 놓은 그들의 공덕이 그렇게도 많았다면 어찌 동학농민군이 들고 일어났을까
현관과 탐관을 결정하는 것은 백성의 몫
동학농민군의 점령은 이 공덕비에 새겨진 이름의 가치를 알려준다.
비를 세워주면서도 미운구석이 있어 거북목을 비툴어 놨다는 얘기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 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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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중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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