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백사장 길이가 3.5㎞, 너비는 100m, 면적은 3만㎡이다.
백사장의 모래질이 동양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개껍질이 잘게 부서진 패각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에 달라붙지 않으며 물에 잘 씻긴다. 평균 수심 1.5m로 얕은 수심과 경사가 완만하여
가족을 동반하여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해안에 심어진 3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백사장을 따라 줄지어 있고, 백사장 남쪽으로 4㎞ 지점에 위치한 무인도섬인 다보도와
기암괴석이 잘 발달되어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1930년에 개장하여 기반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한해 방문객 수가
1천만 명에 이른다. 계절별 축제와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있어 사계절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98년 개최하기 시작한 보령머드축제는‘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대형머드탕·머드씨름대회·머드슬라이딩·갯벌극기훈련체험
등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머드체험 프로그램과 록콘서트·머드미인 선발대회·행글라이더 대회
· 용왕굿 한마당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관광객에게 해수욕과 머드체험을 동시에 경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해수욕장 북쪽으로 1㎞ 지점에 있는 대천항은 수산물 집산지로 싱싱한 해산물은 물론 대천의
명물인 꽃게와 배오징어의 특별한 맛을 볼 수 있으며, 인근의 원산도·외연도·삽시도·녹도 등의
섬과 안면도의 영목항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운행되고 있어 피서철이나 주말에는 피서객들과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주변에는 석탄 박물관·폐광의 자연풍을 이용한
냉풍욕장 등이 있다.
이제 대천해수욕장은 여름만이 아닌 사계절 전천후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관광지가 된다.
한국의 대표 관광특구인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2016 열린 관광지 공모전'에서 '2016 열린 관광지'에 선정됐다
열린 관광지란?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동반가족 등 모든 국민이 이동의 불편이나 관광 활동의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장애물 없는 관광지나 관광 사업장을 말한다.
짚트랙과 스카이 바이크 출발지
스카이 바이크는 바다위와 백사장을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다
스카이 바이크
보기만해도 시원해요
스카이레일과 짚 트랙 높이 52m길이613m 거리의 바다위를 가르며 신나게
질주하는 짚트랙의 짜릿함 아는 사람은 알겁니다
유카꽃도 활짝피어있다
머드광장은 축제가 끝나서인지 조용하기만하다
머드광장을 다시 찍어본다
바다의 여신상도 담아보고
비가오려는지 날씨가 흐려지기시작한다
탠트를 설치하고 다시 해변으로 나와봤다
몇채의 탠트가 설치되고 왼쪽에는 초라한 내탠트
아주 오래된 탠트다 아이들 어렸을때 가지고 다녔으니까 35년쯤 된거같다
그동안 30년정도 다락에 처박혀있다 이제야 빛을 보게됐다 주위 탠트들을 보니
세상 많이 변했다 이제 어디에 얼굴도 못내밀겠다
세번째 찾은 대천 해수욕장 그렇게 밤을 또 맞이한다
저녁먹고 돌아보는 주위는 불빛도 찬란하고 한가하기만하다
야간에도 친구들과 도란도란 속삭임을 이어가는 새내기 학생들같다
연인의 발걸음도 이어지고
밤이 깊어가는줄도 모르고 족구에 열중인 학생들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에 바가내려 탠트안으로 약간의 물이 들어왔네
많은비는 내리지 않아 안심하고 햇반을 끓여 간단히 아침 때우고 홍성으로출발
보령 시내를 지나니 어찌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앞이 안보인다 그래도 아침일찍이라
차량이 적어 세월아 내월아 내 페이스대로 달린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사상가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 실천 무대가 바로 마포였다. 이지함은 마포 강변 옆 물이 흐르는 곳을 메워 흙집을 지었다.
그래서 집 이름이 토정이고 그의 호도 토정이다.
이지함은 모산수(毛山守), 정랑(呈琅)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 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자주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
- 《선조수정실록》, 1578년 7월 1일
토정에 관한 기록은 여타 인물들과는 달라서 마치 위인전처럼 읽힌다. 토정의 고향은 충남 보령으로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다.
서경덕 문하로 들어가 수학했는데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이 동문이며 백사 이항복은 그의 제자다.
학문에 뜻을 든 후로는 밤을 새워가며 날이 밝도록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게 되었다. 한때 과거에 응시하려고도 했는데, 마침 이웃에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어 연희를 베푸는 장면을 보고는 그것을 천하게 여겨 마침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초야에 있으면서도 뛰어난 학문과 행실이 도성에까지 알려져 관직을 제수받기도 하였으나 본디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으므로 백성을 위한 활동이 아니면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는 성리학 이념이 향촌 사회까지 파고들어 백성의 자유로운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토정 이지함은 아주 통쾌하고 유쾌하게 세상을 풍자하며 돌아다녔다. 조선 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 그의 용모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이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좋았으며 발 길이는 한 자가 거의 다 되었고, 목소리 또한 맑고 우렁찼다. 말수가 적었지만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그의 행적은 참으로 기이해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가 홀연히
나타나곤 했는데, 열흘 동안 걸어 다니며 익히지 않은 생식을 해도 오히려 눈은 밝은 빛을 내고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또 길을 가다가 졸리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몸을 굽인 채 머리를 숙이고 서서 5, 6일이나
자는데 숨 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솥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목이 마르면 그 솥으로 물을
떠먹고 배가 고프면 그 솥으로 밥을 해먹고 세수할 땐 대야로 썼다고 한다.
동패낙송(東稗洛誦)》이란 책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하루는 율곡이 토정을 찾아갔는데, 토정은
머리에 흙을 구워 만든 갓을 쓰고 허리에는 굵은 줄을 차고 있었다. 율곡이 웃으며 그 이유를 묻자,
토정이 이렇게 답했다. "내가 세상 모든 병을 시험해보았는데 온갖 병 가운데 간질병이 가장 지독했네.
그 병에 걸리기 위해 일부러 벽 틈에 누워 백회혈에만 바람을 씌었더니 석 달 만에 간질병이 생겼지.
그런데 약으로 치료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어. 그래서 흙으로 구워 만든 갓을 쓰고 굵은 띠를 찬 채로
석 달 동안 면벽 수행하는 중인데 효험이 있네그려."
이 일화에는 병들어 죽는 백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치료법을 개발하는 토정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정치권이 당쟁에 열을 올릴 때 정치의 가장 근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란 점을
몸소 실천한 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병들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크고 작은 일로
고민 많은 백성들은 토정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다보니 토정 이지함이 직접 쓰지도
않은 《토정비결》이 그의 저술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토정이 잠시 공직 생활을 한 것은 벼슬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백성을 위해 여러 차례 국가에 상소를 올렸다. 포천 현감으로 일할 당시에는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국가에 상소하기를 "바다에 물고기가 많고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바다에
저렇게 많이 떠 있는데 그리고 해만 뜨면 소금이 만들어지는 이 넓은 바다를 두고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포천 현감인 소인에게 소금 염전 사업을 주신다면 온 나라에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초야로 돌아갔다.
벼슬은 물론 어떠한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토정은 말년에 아산군 현감으로 재직하다 갑자기
병으로 죽는다. 너무도 급작스러웠던 만큼 그의 죽음을 두고 여러 소문이 돌았다. 이를테면 평소
지병이 있어 약으로 지네 즙을 마시던 토정은 해독제로 생밤을 먹었는데, 토정을 못마땅해하던
아전이 생밤 대신 버드나무로 깎은 밤을 주는 바람에 그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내용이다.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그를 데려간 것은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일념으로 몇 세대를
앞서나간 그가 당시 세상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16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마포에서 민중의 등불로 살았던 그가 죽자 충청도 사람들은 물론 한양, 마포 주변 백성이 마치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위글은 백과사전에서
Only Love - Nana Mousk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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