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화백의 생가를 신주소로 네비에 입력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하여 찾느라
애를 먹었다 비가오니 오가는 사람도 없고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고 내려가면서 좀 자세히
봤으면 될터인데 길이 커브가 심해 운전에 신경쓰다보니 또 지나처버려 되돌아오는
고행을했다 주차하고 연방죽을 지나 들어가니 9시가 조금 않돼 아직 개관전 관리인에게
찾기 힘들었다고 부산에서 왔다하니 친절하게 문열어주며 설명을 해주신다
입구에서 바라본 기념관 모습
생가도 보이고
새로 복원했기에 옛스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홍천마을은 고암 이응노 선생이 태어난 생가 터이다.
선생은 열일곱 살때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자라며 그림에 뜻을 품는다.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에 싸인 평온한 마을풍경은 소년을 예술가로 이끌어준 스승이자
벗이였다. 평양 서울, 일본과 유럽 등 넓은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예술을 탐구하는 동안
고향은 늘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고암은 유럽 예술계에서 동양예술의 정신으로 높이
인정 받지만 암울한 시대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타향에서 눈을 감는다.
홍성은 2011년 11월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을 개관하면서 이응노 선생을 고향으로 맞이한다.
집과 주변 마을은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설계하고, 기증과 구입을 통한 다양한 컬렉션을 갖추어
동양의 전통 시서화와 서양 현대미술을 아우른 생가미술관을 갖추게 된다.
생전에 입었든 코트와 그림그리는 소품들
이응노화백의 생애를 연도별로
이응노 화백의 작품들을 대략 담아봤다
수덕사에도 가서 수덕여관에도 들릴거라니 어찌그리 잘아냐고 반겨준다
수덕여관을 모르면 이응노화백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수가 없지
수덕여관은 다음 기회에 수덕사를 올릴때 얘기하기로 합니다
군상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는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의 월산 자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10년 부친의 서당에서 한자를 익히다가 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일본식 신식 교육을
거부했던 집안의 뜻에 따라 3년 뒤 학교를 그만둡니다. 17살에 충남 당진의 송태회에게
서화을 배우며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1922년에 더 넓은 곳을 찾아 서울로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암은 해강에게 서화를 지도 받으며 필법은 날로
발전해 제3회 선전에서 입선하고, 1926년 스승의 품을 떠나 전주에 내려가 개척사(開拓社)라는
간판점을 차려 독립생활을 시작합니다.
1934년 전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갑니다. 고암은 동경의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남종화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의 덴코화숙에 입문하였습니다.
일본화원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특선에 오르기도 합니다. 1945년 초 고암은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암은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해방 후 서울로 상경하여
고암화숙을 개설합니다. 1948년 그의 나이 45세에 전통화단에서의 좋은 평가로 초창기 홍익대학교의
주임교수로 임용되어 1950년6월까지 동양화부를 지도합니다.
년 프랑스 평론가 쟈크 라센느의 초청으로 1958년 도불기념작품전을 성황리에 마친 뒤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1960년 파리 파게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으며 작품 활동에 몰입하던 중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는 고난 속에서 창작욕은 더욱 크게 나타납니다.
석방 후 수덕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 창작에 몰입을 하던 중에 또다시 1977년
두 번째 정치적사건에 연루되게 됩니다. 두 번째 사건이후 국내에서의 작품발표와 매매가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고암이라는 이름은 점점 잊혀졌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제자를 양성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83년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귀화하였습니다.
1989년 고암의 국내활동에 대한 모든 금지조치가 풀리고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렸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1월 10일 그의 나이 86세에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고암은 다양한 재료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은 <묵죽>, <풍경>, <문자추상>, <구성>,
<인간-군상시리즈> 등이 있습니다.
부인 박귀희 여사와 같이
부근에 성삼문선생 유허지가 있어 들려봤다
성삼문 선생 유허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며,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입구 길가에 두 개의 비가 세워있는데, 하나는 유허비로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노은서원 유허비이다.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 1973년 12월 24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76년(숙종 2) 사인(舍人) 이량(李湸)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1685년(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하였다.
1692년(숙종 18)에 조정에서는 이 사우를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년
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의 ‘노’자와 은의(恩義)의 ‘은’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1687년(숙종 13)에 봉안하였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되었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현 노은단 자리에 매안하고 단을 모아 ‘노은단(魯恩檀)’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 제향을 올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삼문을 개축하고 정화하였다.
이전의 노은단 자리는 이곳에서 동북방 약 50m 지점이며 유허비는 남쪽 30m 거리의 마을 앞에 있고
비각이 있다. 마을에서 국도로 통하는 길 왼쪽 옆에 선생의 부인 묘소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전액은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죽임을 당한 후 성삼문의 일가는 멸족을 당했고
그의 시신은 팔도로 나뉘어져 보내지는 조리돌림을 당했습니다.
이 후에 그의 시신의 일부와 일가족의 시신의 일부를 김시습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가묘을 세워 성씨지묘라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의 고향인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성삼문의 유품을 모아 그의 가묘를 만들게 되는데
숙종 때 이 곳에 우암 송시열이 친필로 쓴 유허비를 세우게 됩니다.
1691년 숙종 17년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관직이 모두 복권이 됩니다.
이 후 영조는 성삼문에게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 그를 기렸고
1970년대에는 그의 처와 부모의 묘소가 있는 홍성군 일대가 성역화 되었습니다.
노은리에 또다른분 최영장군의 사당이 있어 찾아보았다
홍북면 노은리는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이 1316년에 출생한 영지이다.
노은리 삼봉 산정에 있던 무민공의 사우는 어느 때 철거되었는지 기록이 없고 1995년
말 삼봉산정에 사당을 재건축하였다.
최영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영민하고 남다른 용맹과 지모가 있어 문무를 겸비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공민왕 이후 각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뛰어난 장군이자 고려정권의 핵심에
있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각하고 죽음을 당한다.
1995년 문화제 행사시 제 1회 최영 장군 영신제를 갖고 1996년 이후에도
영신제를 올려 최영 장군의 넋을 달래고 있다.
기봉사안에는 최영장군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하얀수염과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최영장군을 그대로 표현한듯한 느낌이다.
예전에 본 김종서 장군과 비슷한 느낌인것 같기도 하다.
이 초상화는 실제 최영장군의 초상이 아닌 무신도의 도상을 원용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강렬해보이는 채색과 이목구비가 과장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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