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를 찾았다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1913년에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하여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주석에 취임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했다.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홍성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 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 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 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92년에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아마도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왜군을 무찔렀다면 김좌진 장군은 우리네 현대사에 있어서 일본침략군을 무찔러 이 민족의
사기를 드높인 분이라 할 수 있다. 장군의 역사적 위치는 높고 높다.
우리 나라는 조선5백년 동안 문인만 우대하고 무인을 홀대하였다. 그러다 보니 모든 국민이 군인이
되기를 싫어하고 심지어 수치스럽게까지 생각하였다. 요즘에 고시에 일생을 걸 듯이 조선시대
선비들은 문과시험에만 매달려 일생을 망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문약(文弱)에 빠진 나라에서
영웅이나 장군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 우리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본에서는 상무 정신을 길러 무강(武强)한
나라로 발전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었지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일본은 또다시 강대국이 되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갔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이 사실을 모르거나 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기 직전 우리는 왜 영웅이 나와서 이 나라를 구해주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끝내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도 후손들에게 "너희는 절대
나와 같은 무인이 되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였다고 하니 이 나라에 장군이 나타날리 만무했고
영웅호걸인들 당쟁으로 인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영웅이란 무인이지 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국의 영웅이 기적적으로 나타났으니 이가 바로 백야 김좌진이었다. 불모의 땅 한국에 김좌진 장군이의 등장한 것은 참으로 기적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우리 민족은 또다시 영웅이여 나오라고 목매어 소리쳤다. 아무리 3찬민 민족이 소리높이 만세를 외쳐도 독립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 문인들은 열강의 동정에 호소하여 독립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자기 힘으로 쟁취하라는 것이었다. 이 때처럼 영웅을 필요로 할 때가 없었는데 마침내 김좌진(1889-1930)이란 이름의 장군이 나타났던 것이다. |
백야 김좌진 장군의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김 장군 자신은 어려서 서당 공부를 했고 16세에서 18세까지 2년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 다른 정규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의 글씨는 다른 어느 문인보다 뛰어났고 학식
또한 높았다. 문무를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불과 19세에 「한성신보」라는 신문사의
이사가 되었고 오성학교 교감이 되었다. 그리고 신민회. 기호흥학회와 같은 단체에 가입하여
애국교육운동에 나섰다. 그러니 김좌진 장군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문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일
1910년의 망국이 없었다면 김좌진은 장군이 안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기둥은 기울고 있었다. 교육이나 언론만으로 나라를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로지 무력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하였다. 무관학교를 세우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2년 6개월(1911-1913)의 옥살이를 하여야만 하였다. 이때 김좌진은 사내
대장부에게 있어 실패란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志士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풀려난 김좌진은 이 같은 시를 짓고 뜻한 일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비밀결사 대한광복단에
북간도로 건너 간 것이다. 김좌진은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위와 같은 단장지통 시를 읆었다
1918년 12월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군정부軍政府의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이 되었다. 마침내 김좌진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겠다는 필생의 숙원사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고 동년 4월에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정부라는 이름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바꾸어 총사령관이 되고 임시정부가 지원해 준 돈 1만원으로 사관양성소를
설립, 스스로 교장이 되었다.
1920년 9월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고 이어 일본침략군과 청산리에서 독립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이 때 홍범도 장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였으니 세계 전쟁사상 유례없는 대전과를 올렸다
. 그러나 독립군은 북간도를 떠나 낯선 시베리아 땅으로 가야만 했다. 김좌진은 처음부터 시베리아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과연 소련 공산당의 독립군 원조는 속임수였다.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무사하였으나 다른 많은 독립군은 소련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다시 간도 땅을 밟은 김좌진은 옛날 우리의 발해 수도였던 영고탑(발해진)에서 신민부新民府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하여 새로이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웠다. 김좌진은 칠전팔기, 쓰러지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는 교포사회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주석主席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이란 자가 쏜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향년 41세. 아직도 많은 일을 남겨 둔 채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이처럼 억울하고 분한 일은 다시 없었다.
장군의 장례식은 그 곳 교포들의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루어졌다. 우리 교포는 물론 중국사람들까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통해 했다. 광복 후 장군의 공로를 기려 대한민국 훈장 중장을 수여하였다.
출처:기념사업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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