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또한 옥중에서
' 조선 독립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에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에《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
,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만해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위키리백화사전
만해는 고종 16년인 1879년 8월 29일에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溫陽 方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유천(裕天)이고 자는 정옥(貞玉)이며 용운은 출가 했을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그의 형제로는
형 한윤경이 있었다.
본관은 청주이며,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明溍)의 후손이었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했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출가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때 그는 외면하였다 한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뒤 한동안 설악산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1896년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하였으나 거처가
없던 그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재입산,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김연곡(金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8년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한 뒤 1909년 5월부터 6개월간 원종종무원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시찰하고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여행 하던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9년 12월에 귀국한 뒤 1910년 이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
을 저술하였다. 1910년 10월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여 1910년 초에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암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09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5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을 청원서
형식으로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진정서로 올렸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미혹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도록 바라셨으나,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달라서 부득불 천하에서 정을 제거하고 욕망을 끊어 버린 사실들을 모두 연설하였던 것이니, 각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 인도하시고자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방편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 이를 제거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 | ” |
— 건백서 중에서 |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1월에 한용운은 다시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올렸으나 두 번째 탄원 역시 묵살당하고 만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내지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인도
산스크리트어로서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그는 피신하지 못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체포된 만해는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
1922년 5월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를 발표하였다.
한편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은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지만 그는 형의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종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디 아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
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에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
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
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
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
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
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
고 돕니다
---- 한용운 ----
해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킨 구조에 있다. 그렇다면 슬픔을 희망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만남과 헤어짐의 실상을 깊이 있게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은
곧 만남이라는 것, 다시 말해 헤어짐음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떠났다고 생각했던 ‘님’은 사실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 침묵하고 있는 임을 위해 ‘스스로 주체할
길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어법은 임이 떠나 버린 슬픔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아니면 혼자서 독백을
하는 듯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임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어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내용을 더욱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작품 전체에
사용된 비유의 기법도 정서를 고양시키고 심미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황금의 꽃’과
‘한숨의 미풍’,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같은 감각적 표현도 이 시의
심오한 주제 의식을 독자에게 친근한 것으로 바꾸어 준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님의 침묵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화자는 님이 떠나가
버렸고 현재 침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는 님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조국 상실의 시대적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만해기념관과 생가를 보고 안면도로 가면서 간월암에 들렸다
전언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달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고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
(看月庵)이라 하고 섬 이름을 간월도(看月島)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보낸 간월도 어리굴젓이 궁중의 진상품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하동문
1530년(중종 25) 찬술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월도만 언급되어 있고
간월암은 언급되어 있지 않아 조선 후기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엽에 폐사되었는데
1914년 승려 만공(滿空)이 다시 창건하였다.
간월암 북동쪽으로 간월호가 있으며 남쪽은 천수만과 연결된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육지도 되고
섬도 되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관음전과 요사채,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음전에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와 부석사를 지켰다는 선묘와 흡사한 형태의 불화가 모셔져 있는데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무사귀환의 염원이 담겨진 그림이다.
2007년 9월 20일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된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나무와
종이로 틀을 제작한 뒤 금칠을 입힌 불상으로 관음전에 안치되어 있다. 양식적으로 볼 때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에 높이 솟은 보계, 부드러운 옷 주름 등에서
형식화하기 시작하는 임진왜란 이후의 보살상과 차별성이 있다.
바늘꽃
간월도와 간월암을 사진에서 얼마나 많이 접했는지 여기와도 별 감흥이 없다
이렇게 일몰도 볼수있으면 좋겠는데 하루쯤 묵으며 봐야 제대로 볼것 같다
이렇게 물이 차있을때 보면 알마나 좋을까 위두장의 사진은 빌려왔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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