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불상. 높이 좌불 2.07m, 우불 2.09m, 중앙보살 1.3m.
국보 제307호. 바위의 동면에 감실을 마련하고 삼존불입상을 새겼다. 보살의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국보 제307호. 거대한 바위의 동면(東面)에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삼존불입상을 새겼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 배치와 달리, 중앙에 보살,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좌우의 불상은 큼직하고 중앙의 보살은
상대적으로 작아 1보살(一菩薩)·2여래(二如來)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좌우의 불상은 기본적인 형태가 같다. 다만 오른쪽 불상의 얼굴이 뚜렷하고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두 손의 인상(印相)이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한 모습이 약간 다를 뿐이다.
왼쪽 불상은 소발(素髮)의 머리에 팽이 모양의 육계(肉髻)가 표현된 것이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軍守里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29호)과 비슷하다. 그래서 얼굴의 기본 골격과 함께 같은 백제불의
전통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살이 붙어 양감이 있는 데다 근육이 팽창되어 강건한 인상을 보여 준다. 가는 눈, 꽉 다문 입과
보조개, 큼직한 코 팽창된 뺨과 함께 만면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고졸하고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신체 역시 장대하여 얼굴과 잘 조화되어 있다. 하지만 얼굴은 신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아서
서로 대비된다.
큰 바위에 삼존을 조각하고 여기에 목조전실(木造前室)을 조영하였던 일종의 마애석굴사원
내의 불상이다. 북위(北魏) 말 이래 중국의 산둥 지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생각된다. 또한 양식상으로는 중국 북제불 양식 계통을 따르고 있어
제작 연대는 7세기 초로 볼 수 있다. 지역적으로도 당시 삼국시대에 중국과의 교역에서
교두보 구실을 하였던 태안반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새로운 석굴사원 양식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감모대는 태을동천에서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약주를 주고 받으며
화담을 나누던 시설인 것 같습니다.
중앙에 탁자 용도로 쓰일 다듬돌이 놓여 있습니다. 도가적인 성격을 가진 시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태을동천 위쪽에는 암반 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습니다.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이 태을동천에
왔다가 신선 놀음으로 바둑을 즐기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같게 합니다.
태을동천(太乙洞天)
태을(太乙)은 태일(太一)의 딴 이름으로 도교(道敎)에서는 천제(天帝)가 머문다는 태일성(太一星:북극성)을 말하며
천지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를 뜻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천(洞天)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이 산다는 별천지를 말합니다. 신선이 내려와 노는 곳이니 대부분 계곡과
물과 바위가 어우러진 경치가 좋은 곳을 말합니다. 서울에도 백사실계곡을 백석동천이라하며 삼청동천, 청계동천,
수락산의 수락동천, 함허동천, 옥류동천 등 전국에는 많은 동천이 있습니다.
태을동천(太乙洞天)은 1800년대 후반에 김규황이라는 분이 쓴 글이라고 전해지며,
그아래 일소계(一笑溪)라고 새겨진 글 역시 몇 년 전에 작고한, 그의 자손인
김윤석씨라는 분의 작품이라 한다.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는
대략 높이 3.5m의 자연석이며, 같은 면에 '가락기원일천팔백십삼년갑자
(駕洛紀元一千八百十三年甲子)'와 '김해김씨장보품(金海金氏藏譜品)', '
계해맹추해초김규항제(癸亥孟秋海超金圭恒題)'등이 음각되어 있다.
사실은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현장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당시 유생들이 이곳 감모대(感慕臺)에 앉아 맞은편 삼존불 부처님께
돌을 던져 맞히는 놀이를 하고, 한 문중의 족보 보관 장소로 일소계 일대를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맞은편 바위 윗편에 새겨진 바둑판은 이런
유생들이 남긴 훼불의 흔적이라고도 한다.
서산 마애여래 삼존불로 이동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본존상 높이 2.8m, 보살입상 높이 1.7m, 반가사유상 높이
1.66m, 국보제84호, 서산 운산면.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마애불은 가야산 계곡
한쪽 절벽에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여래상은 고부조로, 좌우 협시보살은 저부조로 조각되었다
국보 제84호. 높이 2.8m.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다. 즉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지점에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은 행인형
(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는 나형(裸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시보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대좌(覆蓮臺座)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 형식과 같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백제 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시대 사찰에 건립된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로서의 의의가 있다. 이상 백과사전에서
가까운 보원사지로이동
복원작업중 발굴된 기와파편들
건축에 사용됐던 각종 돌들
서산 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사역 내에 있는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普願寺址石槽)[보물 제102호]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普願寺址幢竿支柱)[보물 제103호],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普願寺址五層石塔)
[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普願寺址法印國師塔)[보물 제105호] 및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瑞山普願寺址法印國師塔碑)[보물 제106호]로 인해 보원사(普願寺)는 통일 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 시대 융성하였던
사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1968년 사역 내에서 6세기 중반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원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普願寺址出土金銅如來立像)이 수습되어 보원사의 창건 연대가 백제 시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문헌상에서 확인되는 보원사에 관한 최초 기록은 장흥 보림사(長興寶林寺)의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탑비에
나타나는데, 827년(흥덕왕 2)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904년(효공왕 8) 최치원(崔致遠)[857~?]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의 주에서는 웅주가야협
보원사를 화엄 10찰(華嚴十刹)에 포함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입적하였고, 보원사 계단에서 경율 시험을 봤다는 1036년(정종 2) 기록이 전한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시대까지 사세가 계속 유지된 듯하며, 당시 만들어진 경판이 인근 개심사(開心寺)에
소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보원사가 강당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보원사의 법당은 2층 고각에
부도전과 나한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사세가 기울게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폐사지로
남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통일 신라 화엄 10찰일 정도로 내포 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보원사가 폐사지로 된 이후 보원사에
대한 역사를 밝히고자 현재 발굴 조사 중이다. 발굴 조사가 완료되면 보원사의 시대별 변천이나 복원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특히 백제 시대의 금동 여래 입상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서산 지역이
고대 백제 불교와 관련이 큰 지역임을 밝혀 주는 것이다. 서산 보원사지는 인접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함께 서산의 백제 불교에 대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백제에서의 서산의 역할과 중요성도 함께
밝혀낼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또한 서산 보원사는 고대 이후의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하며 내포 지역의 거찰로 자리하였기 때문에,
보원사의 역사를 밝힘으로써 서산 지역 불교의 역사와 변천도 함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5층석탑에 새겨진 조각상
서산 보원사지철불좌상(瑞山 普願寺址鐵佛坐像)은 높이 1.5m, 충남 서산시 운산면의 보원사지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철불좌상(鐵佛坐像)은 둥그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낮고 팽팽한 원만형의 얼굴,
탄력 있는 가슴의 표현, 벌어진 어깨, 무릎너비가 넓은 육중한 다리 등의 존안은 젊고 밝은 표정이며
장대한 체구와 함께 9세기 말에서 10세기까지의 불상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불의(佛衣)는 우견편단
(右肩偏袒)의 착의법으로 간결한 옷주름을 형성하며,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군의(裙衣)로
덮힌 두 다리가 굵고 좌폭도 넓다. 양손은 절단되었지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인 것 같다.
이러한 특징들은 신라 중기(650∼775)의 석굴암본존불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체구가 당당하고
세부의 도식화가 심화되지 않아서 광주철불좌상(廣州鐵佛坐像)으로 이어지는 신라말과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普願寺址)에 있는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의 비문에 의하면, 탄문이 고려 광종
즉위년인 949년에 석가삼존금상(釋迦三尊金像)을 조성하고, 또 광종 6년(955)에는 왕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삼존금상을 주조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불상들이 모두 보원사지에 봉안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이 철불좌상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고 여겨진다.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서산리 운산면 용현리 105)는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5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자료출처: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불교미술대전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2005년 사적지 정비를 위한 조사를 실시하여 ‘보원사지 종합 정비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2년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1~5차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건물 터와 유물들이 확인되었으며, 현재는 서산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6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도 저렇게 발굴조사가 진행되고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 1987.07.10 지정)는 주변에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으며,
보원사지에서는 1968년에 백제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그 창건연대를 백제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다. 기록상
고려시대에 최전성기를 이루었고 조선시대까지 그 법등이 이어져왔으나, 이후 법등이 끊기면서 민가가 들어서고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충청남도와 서산시에서는 사역의 종합적인 정비를 실시하고자 2006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협약을 맺었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총 7차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사역 서편영역은 오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는 영역으로 고려시대 중후반~조선시대 후반의 사찰 건물지들이 중복된
양상으로 확인되었다. 상층에서는 조선시대 중후반대 사찰 관련 건물지들이 오층석탑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보원사의 최종 가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講堂寺'와 관련된 사역으로 생각된다.
하층에서 확인 되는 건물지들은 고려시대 후반~조선시대 초반에 해당되는 보원사의 중심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부에서 확인되는 유구들은 구역별로 그룹을 이루는데 중심부는 서회랑과 남회랑지의 존재로 볼 때
회랑으로 둘러싸인 형태로 추정된다. 남편부의 동쪽은 축대를 쌓아 경계를 이루고, 내부에 크게 2단으로 구성된
건물군이 확인되었는데, 상단과 하단 건물지가 그 중심축을 달리하는 등의 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남편부의
건물지는 중심부의 건물지와 서로 다른 그룹을 이루고 있어 선대 사찰 건물이 다원식(多院式) 구조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보원사는 법인국사보승탑 및 탑비, 문헌자료 등을 통해 매우 번창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창건시기 및
폐사 시점이 불명확하였다. 그러나 이번 조사를 통해 현재 오층석탑이 위치한 사역 중심부에서 최종 가람의
범위와 조성시기가 확인되었다. 또한, 동편 영역의 조사에서 9~10세기대에 해당되는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됨에 따라 이 일대에 그 창건기 혹은 번성했던 고려시대의 중창가람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사적지로 지정된 거의 전역에서 고려시대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일부 동편 산사면까지
확장되는 점 등으로 볼 때 당시 사역의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원사지 발굴조사의 목적 중 하나이기도 했던 서산 마애삼존불과 연관된 백제사찰은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보원사지 사역 범위 내에는 그 존재가능성이 희미한 것으로 생각되며, 추가적으로 이 주변 거점지역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미륵불은 강댕이로 진입하는 지점에 설치된 강당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의 전(前) 군장동 안,
현(現) 고풍저수지안에 있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지금도 섬처럼 되었으며 풀이 자라고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이 저수지로 수몰되게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
~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는 216cm,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하는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졌다고 하며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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