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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영조대왕 생모 생가지와 피향정

 

       영조생모 숙빈최씨가 민유중을 만난 곳 당시 민유중은 영광군수로 발령을 받아 영광으로 가던 길이었고

       숙빈최씨는 천애고아였다.민유중은 최씨를 거두어 딸처럼 귀하게 키웠고 민유중의 딸이 왕비(인현왕후)로

       간택되어 궁권로 들어갈때 최씨도 같이 들어 갔고 훗날 영조의 어머니가 되었다.

 

                    전라북도 태인에 있는 만남의 광장 영조생모 숙빈최씨가 후에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된 민유중을 처음 만난 곳

 

 

 

          고아였던 숙빈최씨가 인현왕후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곳이 조그만 공원으로 만들어져 기념되고 있다

 

 

             위는 숙빈 최씨의 생가터이고 아래의 파주는 숙빈최씨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소령원(昭寧園)을 찾는 중년 남성들이 늘고 있다.

    “운기(運氣)를 뿜어내는 명당(明堂)”이라는 입소문이 돌면서 40~50대 남성들이 솔솔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사적(史蹟) 제358호인 소령원은 조선 21대 임금 영조(英祖)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

    (淑嬪 崔氏)의 무덤이다. 지난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 탤런트 한효주가

    주인공을 맡아 연기한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이자 영조의 친어머니가 바로 숙빈 최씨다.

 


사적 제358호. 처음에는 소령묘(昭寧墓)로 불렀으나 영조의 사친이므로 1753년(영조 29)
6월숙빈최씨를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고, 묘(廟)를 궁(宮)으로, 묘(墓)를 원(園)으로 승격시켰으며, 같은해 9월에 이 사실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반사(陳賀頒赦: 축하를 하고 널리 알림)하였다

1757년 11월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각 능의 예에 따라 소령원에도 동지제(冬至祭)를 지낼 것을
주청하였으나 원묘(園墓)에는 정해진 예가 없다 하여 영조는 이를 반대하였다.</P>
영조 만년에는 각 지역 유생(儒生)들이 원을 능(陵)으로 승격시키자는 상소가 수년간 잇달았으나 시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능으로 승격시키자는 유생들의 속셈은 최씨가 영조의 생모라는 점을 들어 그러한 소를 올림으로써 조정에
관심을 끌어 벼슬자리라도 얻어보려는 의도적인 것이 강하였다. 영조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상소자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그 수가 증가되자
단호히 대처하였다.[Daum백과] 파주소령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령원은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보다 한 단계 아래인 원(園)이고, 큰 길에서

     떨어진 산자락에 숨겨진 듯 자리잡고 있어 평소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곳이다.


 


        ◇ “운기(運氣)를 뿜어내는 명당(明堂)”

    최근 소령원을 찾았다는 한 기업체 간부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50년 넘게

    임금 자리를 지키고 80세 넘게 장수한 영조대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묻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호기심에 가 봤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 최장수 왕이자

    성군(聖君)을 낳은 숙빈 최씨의 음덕(蔭德)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겠냐”

    고 했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궁중 최하층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 숙빈 최씨의 이야기.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궁중 최하층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 숙빈 최씨의 이야기.
 

 “천한 무수리 출신인 최씨는 숙종의 마음을 독차지하려는 장희빈의 모진 구박을

  받았다. 하지만 승은(承恩)을 받아 영조를 낳고 결국 정일품(正一品) 숙빈까지

  올랐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최후의 승자’가 된 숙빈 최씨의 기운을

  내려받고 싶다”는 40대 남성도 있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중요한 인사(人事) 이동을 앞두고 소령원 주변을 거닐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기(氣)를 받아갔다는 기업체 고위 간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 말했다.

  서울의 모기업에선 이사 승진 대상 30명을 대상으로 소령원 인근에서 연수를

  했는데 이중 소령원에서 참배한 절반 가량이 이사로 영전했다고 재계 관계자는

  말했다.

  서원밸리나 송추컨트리클럽, 파주프리스틴밸리 등 인근 골프장에서 주말 라운딩을

  마친 뒤 잠깐 들르는 정·관·재계 인사들도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주말섹션 ‘Why?’에 ‘국운풍수(國運風水)’를 연재하는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소령원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힘이 있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장소”라고 말했다.

    ◇ 영조의 절절한 효심(孝心)이 깃든 곳

‘소령원 주인’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년)에 태어나 7세 때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궁궐 생활을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시며 지내던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된 뒤 밤마다 그의 복위(復位)를 기도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는 것이다.

  질투에 눈이 먼 장희빈의 악행(惡行)과 구박에 시달렸지만 1693년(숙종 19년)에

  숙원(淑媛·종사품)으로 책봉됐다. 그해 10월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지만 두 달

  만에 잃었다. 이듬해 9월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그가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숙종 25년(1699년)에는 정일품 숙빈으로 봉해졌다.

 

 

파주 소령원/ 문화재청 제공
파주 소령원/ 문화재청 제공
 

  숙빈 최씨는 1718년(숙종 44년) 4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는 당시 양주땅이던

  지금의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묻혔다. 효심이 깊었던 영조는 무덤 동남쪽에

  시묘막(侍墓幕)을 짓고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지금도 소령원에는 영조가

  시묘살이하던 흔적이 주춧돌과 돌담 일부로 남아있다.

  소령원은 처음에는 소령묘(墓)로 불렸다. 왕실의 법도에 따라 무덤은 왕과 왕비는

  능(陵), 왕세자·왕세자빈이나 왕세손·왕세손비는 원(園), 왕위와 관계 없는

  왕족은 묘에 모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영조는 소령묘를 육상궁(毓祥宮)이라 부르면서 친필 비석을

  세웠다. 1753년(영조 29년)에는 소령원으로 승격시켰다. 나중에는 능으로까지

  승격시키려 했지만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숙빈 최씨의 무덤은 소령원 왼쪽 끝에 동쪽을 바라보고 들어서 있다. 봉분 주변에

  담을 둘렀고, 봉분 양쪽으로 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石物)을 배치했다. 정면에는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늘어서 있다. 근처에는 ‘숙빈해주최씨효령묘

  (淑嬪海州崔氏昭寧墓)’, ‘유명조선국후궁최씨지묘(有明朝鮮國後宮崔氏之墓)’

 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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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나오니 농장이보인다

                          농장마당에 잔디밭이라 한컷 또 담아보고

                              제법 멋스럽게 만들었는데 관리부실로 방치되어있고 찾는이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는 고마리만 무성하고

                                      예전에 다리는 폐교가 되고

           저다리도 농기계나 다니고 차들이 다니지를 않는다 지금은 왕복4차선도로가 시원하게 뚤려있다

                                            수명을 다한 시멘트교

                                다리옆에는 가든인것 같은데 조성도 잘돼있다 그런데 운영은 안하는듯

 

                                      방치된 가든은 잡초만 무성하다

                                 이도로가 7~80년대 까지만해도 광주와 전주를 잇는 번잡한 도로였으리라

 

        
20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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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데이터
© NAVER Corp. /OpenStreetMap

 

 
 

 

 

 

 

元亮新埋土   도연명은 땅에 묻혔고
孤雲己上天   고운은 이미 하늘로 올라갔네.
空餘池水在   쓸쓸하게 연못만 남아 있고
白露滴秋蓮   흰 이슬이 가을 연잎에 내렸네. 

 
임억령 〈피향정〉

 

 

 

前後經過廿載中   앞뒤로 지내온 스무 해 동안
水亭疏雨又秋風   정자에는 잔비 내리고 가을바람도 불어왔지.
離離破葉渾依舊   이리저리 흩어지는 가을 잎들은 옛날과 같은데
不見當時萬朵紅   만발했던 붉은 꽃송이들은 어디서 찾아보나.

 

 이민서 〈피향정〉

 

 

 

 

秋池白露幾回漙   가을 연못에 허연 서리 가득 내려
泣閱紗籠獨倚欄   홀로 난간에 기대어 울며 바라보네.
七十八年多少感   일흔여덟 해 살아온 인생 생각하는데
敗荷依舊雨聲寒   연잎은 또다시 시들고 찬 비바람 소리만 들려라.

 
 김수항 〈선조들의 시운을 차운해 삼가 피향정 시를 짓다〉

 

 

 

 

護水元央兩兩飛    물 지키는 원앙새는 짝을 지어 쌍쌍 날고
蜻蜒款款點行衣    잠자리는 다정스레 내 옷 위에 내려앉네.
多情太液池邊客    다정할사 태액지 가 서성이는 나그네여
駐馬官橋盡落暉    다리 옆에 말 멈추고 석양빛을 받는구나.

 
 김상헌 〈피향정에서 판상에 있는 시를 차운하다〉

 

 

 

 

 

此夜逢君處    이 밤 임 만날 정자에 올라
憑欄月上天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볼 때
殘香猶可愛    나지막이 풍겨오는 사랑스러운 향기여
秋氣在衰蓮    가을 기운에 저무는 저 연꽃에서 오는 구나

 
 고용후 〈피향정 탕경 목대흠을 차운해서 짓다〉

 

 

 

 


淸絶湖中地    맑디맑은 호수 안엔 땅이 솟았고
虛明鏡裏天    명경 같은 허허로움은 하늘 속에 잠겼구나.
秋宵一枕夢    가을 밤 베게 배고 자다 꿈꾸었더니
霜倒半池蓮    연지의 반을 서리가 덮고 있더라.

 
 목대흠 〈피향정차판상운시지주〉 

 

 

 

 

孤雲与石川    외로운 구름 냇가의 돌
駕鶴已歸天    학 타고 하늘로 돌아갔으니
獨來池上雪    나 홀로 연못에 내리는 눈을 바라볼 뿐
何處賞秋蓮    어디메 가야 가을 연꽃 볼 수 있을까

 
 이하곤 〈석천운에 차운하여 짓다〉 

 

 

 

 

 

客到官亭宿    객으로 와 관아의 정자에 묵었더니
蕭條八月天    8월의 하늘은 호젓하고 쓸쓸해라.
秋陰五更黑    가을의 스산함은 새벽 마냥 어둡고
涼雨敗池蓮    서늘한 비마저 내리니 연지도 얼어붙누나.

 
 양경우 〈피향정을 소재로 석천운을 써서 짓다〉 

 

 

 

詩仙己騎孤雲去   시선은 이미 외로운 구름을 타고 떠났고
雲外靑山點點開   구름 밖에 푸른 산은 점점이 늘어섰네.
八月芙蓉君子志   팔월의 연꽃은 군자의 뜻과 같고
十年湖海故人來   십 년 후에 호수에는 친구가 왔네.
西風霽景生衣快   서풍의 개인 경치 소매에 들어오고
南斗秋光入配杯   남쪽 하늘 가을빛은 술잔에 비치네.
獨倚披香亭畔立   홀로 언덕에 서 있는 피향정에 기대니
上池下池綠渾苔   위아래 연못에는 뒤섞인 이끼가 푸르네.

 
 심능숙 〈피향정〉 판상운

 

 

 

 

割鷄當日播淸芬    닭 잡던 날에 맑은 향기를 뿌리니
枳棘棲鸞衆所云    탱자나무와 가시나무에 난새가 깃든 격이네.
千載吟魂何處覓    천년의 시 읊던 마음 어디서 찾으리
芙蕖萬柄萬孤雲    부용(연꽃) 만 줄기가 모두 고운 같네.

 
 김종직 〈피향정〉 판상시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에 있는 피향정(披香亭, 보물 제289호)은 연꽃 향기와

사람의 향기가 시공을 초월해 해로 뜨고 달로 지는 아름다운 정자다.

정자 이름의 피(披)라는 글자는 ‘나눈다’는 의미와 ‘연다’, 그리고 ‘옷을 입는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에는 이 정자를 중심으로 아래위로 두 개의 연지(蓮池)가 있었고

‘향국(鄕國)을 둘로 나눈다’는 뜻에서 피향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 영조 20년경에 현감 오언부가 아래쪽에 하나를 더 파면서

두 개의 연지가 된 것이라 하니, ‘향국(鄕國)을 둘로 나눈다’는 의미는 그 후에 부여된 것일 게다.

많은 자료들이 “신라 헌안왕(憲安王, 857~860 재위) 때 최치원(崔致遠)이

태인 현감(혹은 태산군수)으로 재직 중 세웠다고 전하나

정확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잘못된 정보다. 최치원은 857년에 출생했으니 헌안왕 원년에 벼슬을 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제11권 신라본기에 ‘헌강왕 11년(885) 3월에 최치원이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857년에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신라에서 6두품은 그리 높지 않은 품계여서 출세도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당나라 유학이 대세였고 최치원은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마라.나도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등을 떠미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조기유학을 감행한 셈이다.

아무튼 당나라로 간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하여 유학 6년 차인 874년에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884년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3월에 신라에 도착했다.

최치원이 태산군 태수를 지낸 것은 890년(진성여왕 4)부터

서산태수로 옮겨간 893년까지의 3년 남짓이다.

그러므로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다면 890년에서 893년 사이가 될 것이다

 피향정은 제가 알고 있는 곳인데 깜박하고 못가서 장태명님의 글을 빌려왔습니다

 

 

 
 
 
 

 

 

 

정읍사공원

전북 정읍시 시기동에

한글로 쓰인 백제가요 정읍사()가 생긴 곳에 조성된 공원이다.

 공원에는 시를 상징하는 백제 여인의 망부석과 정읍사노래비를 비롯하여

 사당·정읍사예술회관·정읍사국악원·시립도서관·야외공연장 등이 갖춰져 있다.

 

     

        정읍은 1300여 년전 백제여인의 숭고한 사랑과 부덕이 서려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가요인 정읍사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발원지이며 전라우도농악,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이며 천혜의 단풍명소로

        유명한 내장산의 자연과 역사가 접목되어 어우러진 도시이다. 정읍사 여인의 숭고한고 아름다운 부덕과

        정절을 기리며 정신을 계승하고 천혜의 비경 내장산의 아름답고 붉은 단풍과 함께 정읍사문화제를 개최한다.

 

                             

 

       정읍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로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실에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백제여인 장사나간 남편을 무사귀한을 기원하는 망부석 

 

 

                                             망부사 내삼문

                                    망부사

 

 

 

 

 

                                             시립미술관

                                        예술의전당인듯 공연도하고 전시회도하고

                          

                                              야외 공연장도 갖추어 있고

                                       잔디공원 넘어로 전북 과학대가보인다

 

                           우물정자가 말해주듯 약수터에는 물이 콸콸 수도물처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