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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전봉준 동학 농민군 전적지

 

 

 

 

 

 

 

 

 

 

 

 

 

 

 

 

 

 

 

 

 

                              오래전에 왔을 때는 기념관이 따로 없고 전적지에 조그마한 기념관이 있었는데 언제 쯤 기념관이

                              생겼는지? 옆지기와 한바퀴 돌고 동학혁명 전적지로 이동한다 너무나 더운 7월중순 문상을 마치고

                              유적지 답사길에 올랐다

 

              황토현전적지 안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문, 바로 제세문이다. 세상을 구제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문이다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는 사적 제 295호로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입니다.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싸움터입니다. 

          황토현은 해발 35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1894년(갑오년, 고종 31년) 3월 20일에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무장에서 제폭구민, 광제창생을 기치로 내걸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4월 7일 새벽에 황토현에서 전라감사 김문형의 명령을 받아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감영군과 보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향병 수천 명과 싸워

          첫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좌(明佐). 초명은 철로(鐵爐). 별명은 전영준(全永準).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다

                 [생애]

        아버지 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 東谷) 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

        )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활동사항]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

      ·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민족 대백과사전에서

 

                              보국(輔國) 나라님을도와 국정을 보살핌. 보국(保國)나라를 보호하여지킴으로 되어있다                         

                                  제민당 안에는 동학혁명 자료전시와 전봉준선생 영정이 모셔저 있다 문이 잠겨있슴

                                  언젠가 들렸을때는 여기가 기념관이었는데 앞으로 옮겨 새로 설립했다

                                  뱍정희 시절에는 전적비와 전적지를 성역화 했고 전두환 시절에는 기념관을

                                  대대적으로 건축했다 무슨 의미에서 바라봐야될지 상상에 맏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위의 민요는 많이 들어보셨죠^^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 한 곳이 찡해지는데요.
         이 민요는 미완의 혁명인 동학혁명의 한 장군을 기리는 노래입니다. 
         민요의 가사에는 이런 뜻이 있다고 하네요.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아
         녹두밭은 전봉준, 동학 농민군을 상징하고
         청포 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다(위키백과

 

                                여기에 적혀 있는것 처럼 장군이 아니고 선생이라고 부르는게 옳을 것 같다

                                예전에는 반란군수괴 였고 현재는 장군이다 시대에 따라 이렇게 호칭도 달라진다

                                구테타도 성공하면 혁명이되고 실패하면 수괴가되는 것이니까 웃을 수 밖에

 

 

 

 


        이 사진을 보고  100년 뒤에 안도현 시인은 시 한 편을 짓는데요.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 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 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시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전적지에서 바라본 기념관

                                                                            전적지 주위의 소나무숲

 

                                    전적지를 뒤로하고 전봉준 장군이 살았다는 장내리 조소마을로 이동 그러나 보시다싶이 수리중

                 이 건물은 일명 녹두장군인 전봉준 선생이 동학운동(東學運動)을 일으킬 당시 거주하였던 집이다.
                 전봉준 선생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철종(哲宗) 6년(1855)에 이 지방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

                 고종(高宗) 27년(1890)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서당(書堂) 훈장(訓長)으로 있었다.

          이 고택(古宅)은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정읍시에서 1974년에 국비와 군비로 크게 수리한 집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위치하여 이에 이어서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인데 이 집은 이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

          끝방은 방(房)으로 보다는 살림살이 등 속을 넣어두는 도장으로 사용된 것 같다.
          큰방과 윗방은 장지로 칸막이가 되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장은 두 가지 다 연동(連動)

          천장이다. 그리고 두 방의 전면에는 퇴를 놓았으며 대살문으로 드나드는 끝방 전면에 반쪽에는 짧은 담을

          두르고 이곳에 땔나무 등을 두었으나 이것이 본래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부엌의 전후벽에는 널문을 달아 필요한 때에는 잠글 수도 있도록 되었다.
          대문의 동편에는 잿간을 겸한 변소(草家)가 있으며 출입문으로는 한 짝의 열매문을 달았다.

          주위에는 흙담이며 짚으로 된 이엉을 덮었다.
          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 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陽橋里 양간다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갑오년(甲午年 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按 使 李容泰)가 내려와 동학교인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질러 버렸는데 이 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동안에 이론(異論)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補修)를 하면서 해체(解體)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上樑文)에무인(戊寅) 2월 26일(高宗 15年 1878) 세운 것으로 되었으니 어쩌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 있는 폐옥(廢屋)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적지를나와 장내리를 찾았으나 그분이 살았다는 초가집은 보수공사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서 찾아가봤으나 이렇게 우물터만 보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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