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白貞基.1896.1.19∼1934.6.5)
독립운동가ㆍ항일투쟁자(抗日鬪爭者). 전라북도 정읍(井邑) 출생.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정치적 식견도 높았다.
3ㆍ1운동 후 24세의 나이로 동지들을 규합, 경인간(京仁間)의 일본 기관을 파괴할 공작을
하다가 탄로되어 만주 봉천으로 망명했고, 1924년 일본 동경에 가서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꾸미다가 역시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상해(上海)에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연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투신,
1928년에는 남경(南京)에서 열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
1932년에 상해에서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만들어 파괴공작을 추진하더니,
1933년 3월 17일 이강훈(李康勳)ㆍ이원훈(李元勳) 등과 함께 홍구(虹口)에서 주중일본대사
(駐中日本大使) 유기치(有吉)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독립운동가. 호는 구파(鷗波). 전라북도 정읍 출신. 1919년 서울에 올라와 3ㆍ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해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폭로되어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뒤 주로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이회영(李會榮)ㆍ유자명(柳子明)ㆍ
이을규(李乙奎)ㆍ정화암(鄭華巖)ㆍ신채호(申采浩) 등과 자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 때 이회영ㆍ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 9월 중국
후난성(湖南省) 둥팅호(洞庭湖) 근처에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4년 여름, 일본 동경에 잠입해 수력공사장ㆍ주요건물 등을 폭파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못해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1924년 9월 일본관헌의 탄압을 피해 상해(上海)로 가서 정화암 등과 함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히면서 노동문제에 관한 이해가 깊어졌다. 1925년 상해에서
5ㆍ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해 10여 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7년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를 조직해 농촌의
자치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운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28년 5월 초에는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했고, 5월 말에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북만주에 있는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1931년 9월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ㆍ요인 사살ㆍ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비티피(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에는 각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회영ㆍ정화암과 함께 이들을 규합, 남화한인청년연맹
(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有吉明)가 상해 훙커우(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
六三亭)에서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키스트 이강훈(李康勳)ㆍ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병으로 죽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가. 호는 구파(鷗波).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 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 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
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보훈처)
【연보】
▶1896년 1월 19일 : 전북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新雲里)(前東津面 下長) 백남일(白南一: 字 士順)과
파평윤옥문(坡坪尹玉文)의 장남으로 음력 1월 19일 출생하다.
▶1906년(11세) : 부안군 남하면(南下面) 내진리(內辰里)로 이거하다.
▶1908년(13세) : 정읍군 영원면(永元面) 앵성리(鶯城里) 조병열매(曺秉烈妹) 조팔락(曺八洛)과 결혼하다.
▶1911년(16세) : 부친 별세하고,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隱仙里) 갈산(曷山) 마을로 이거하다.
▶1919년(24세) :
(1) 2월에 강토를 강점당하고 왜정하에서 신음하는 설음을 설진하고저 무력투쟁을 통하여
결사구국할 것을 결심하다. 이때 전국에서는 민족봉기의 기운이 성숙하자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였다.
(2) 8월에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동분서주하는 중 본 계획이 누설되어 일시 봉촌(奉天)으로
피신하다.
▶1920년(25세) : 서울로 잠입하여 재기를 꾀하던 차에 당시 본정(本町) 경찰서(中部署)에
피검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 방면되다.
▶1922년(27세) : 왜정의 탄압으로 부득이 봉천(奉天)을 떠나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이회영,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 전선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923년(28세) : 일본에 밀입국하여 동경 부근 하야가와(早川)수력공사장에 은신하며 일왕(日王)
암살을 기도하던 중 동경 대지진으로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다.
▶1924년(29세) :
(1) 북경에서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정화암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동지들과 주간지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였다.
(2) 11월에 상해로 가서 영국인 철공장에서 일하면서 폭탄 제조 기술을 익히며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 지도하였다.
▶1925년(30세) : 상해에서 5월 30일 총파업이 단행되자 중국인 아나키스트(화남연맹)들과 수만의
노동자를 동원 총파업을 지휘하였다.
▶1927년(32세) : 이을규, 이정규와 푸젠성 취안저우(복건성 천주시)에 민남25현 민단편련처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의 자치자위(自治自衛)운동을 한(韓)⋅중(中)⋅일(日) 삼국동지 합작으로
일으키다.
▶1928년(33세) : 5월 남경에서 조(朝)⋅일(日)⋅중(中)⋅비(比)⋅인(印)⋅안남(安南) 등 제국대표로
조직된 동방무정부주의자(東方無政府主義者) 연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하고 동연맹기관지
[동방(東方)] 편집위원이 되었다.
▶1930년(35세) : 10월말 북만주 길림성(吉林省) 해림으로 가서 그곳 재만동지(在滿同志) 김종진,
김야운 등과 같이 김좌진, 이을규 등 동지들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가담하여
재만동포(在滿同胞)의 조직 강화와 혁명사상 고취에 전력하다.
▶1931년(36세) :
(1) 5월 병 치료차 상해로 돌아와 몸을 요양하는 한편 영국인 전차회사(戰車會社)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하다.
(2) 9월 만주사변 촉발을 계기로 이회영, 유자명 등과 협의하여 남화 한인청년연맹
(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단체로서 남화구락부를 두어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다.
(3) 10월말 중국인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한일구국연맹(韓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산하
행동대인 흑색공포단(B.T.P)을 편성하다.
▶1932년(37세) : 12월 일본육군과 군수물자를 싣고 천진항(天津港)에 입항한 11,000톤급 일청선
(日淸船)에 폭탄을 던져 선체일부를 파괴하고 이여산과 함께 천진 일본 총영사관 관저에도 폭탄을
던지다.
▶1933년(38세) : 이강훈, 원심창, 정화암, 오세민과 함께 왜적이 중국 군관을 매수하고자
주중(駐中) 일공사(日公使) 유길명(有吉明)과 왜군요인 중국정부친일거두들이 상해 무창로
(武昌路) 63정(六三亭)에서의 밀회를 탐지하고 동 회의장을 격파하여 일망타진하려는 순간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일본장기버부언(日本長崎法院)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형을
선고파고 복역하게 되다.
▶1934년 6월 5일(39세) : 갑술년(甲戌年) 음 4월 24일 양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에서 3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1946년 7월 6일 : 병술년(丙戌年) 7월 6일 국민장(國民葬)으로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효창원 묘역에 안치되시다.
▶1963년 3월 1일 :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7년 4월 : 의열사 기공
▶2004년 6월 5일 : 구파 백정기의사 순국 60주기 추모행사 겸 의열사 준공 및 영정봉안제를 올렸음
【구파 백정기 의사 고택지(鷗波白貞基義士古宅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영원면 갈선1길 17-13(은선리). 가옥은 원래
한옥 초가였으나 무너지고 그 자리에 1975년 경에 세운 시멘트 블록조에 슬레이트 지붕을 한
가옥이 들어서 있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의 건물로 세울 당시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구파 백정기의사기념관】
백정기 의사는 알제침략에 항거하여 겨레의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상호 공존의 인류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헌신하였다.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걸고 일제[와 멎서 싸웠다. 이러한 항일
독립운동가 구파 백정기 의사의 조국 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고귀한 뜻을 새기고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비롯하여 기념관을 조성하게 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에 있는 본 기념관은 백정기 의사가 1934년 39세의
나이로 서거한 지 62년 후인 1996년부터 이루어진 선양사업을 시작으로 2004년 6월 5일
개관되었다.
총 부지면적은 20,850㎡으로 기념관에는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의열사,
백정기의사의 유출 밑 활동상을 전시ㆍ설명하는 구파기념관, 역사의 산교육장인
청의당(聽義堂) 강당, 백정기의사의 민족의식과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고귀한 뜻을
새기기 위한 의열문(義烈門), 백정기의사의 애국정신과 독립정산을 기리기 위한 승의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독립정산을 기리기 위한 숭의문(崇義門)과 백정기의사를 형상화
한 동상, 어록비, 순국비,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육삼정 의거 준비 중에 체포된 이강훈, 원심정, 백정기 의사를 다룬 당시 기사에서
인물 사진과 사용했던 폭탄 사진을 발견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눈빛이 살아있다.
외삼문
기념관 입구에는 백정기 의사의 어록을 읽고 나니
시의 뜻을 새삼 가슴에 새겨 볼 수 있어서 뭉클함이...
한동안 어록을 읽고나서 멈추어 있었어요.
육삼정 의거에 사용되었던 무기 - 육삼정 의거당시 백정기의사와 이강훈의사가 소지했던 도시락형 폭탄과 브로닝형 권총
삼열사 추모화보
1946년 백의사를 비롯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운구해 와서
효창원에 안장했을때 이들 삼의사를 추모해서 발간했던 화보
청의당(聽義堂),
건평 90㎡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내부는 대청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뜻을 받들어 정신함양 및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이용할 계획이며
현판의 글씨는 우산 송하경 선생이 쓰셨습니다.
구파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북 부안에서 빈농인 백남일과 윤옥문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1908년 8월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 10월 조팔락씨와 결혼 후 처가
인근 전북 정읍으로 이사하였다. 1909년 정읍군 소성명 흑암리의 <영주정사>에서 간재 전우
문하에서 한학 수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가을 무렵 <영주정사>
학감 고인주의 주도로 동문수학하던 학동 10명과 함께 망국제를 지냈다. 1914년 인근 농가에서
목화 씨앗을 짓밟고 물레를 파괴한 일본 경찰을 구타한 사건으로 도피생활을 시작하였고 농촌의
피폐와 망국의 설움을 통탄하며 일제와 결사항쟁할 것을 결심했다.
24세가 되던 의사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의 현장을 겪고 일제 폭정에 비분하여
직접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규합과 자금염출에 동분서주하던 중 8월에 계획이
누설되어, 중국 봉천으로 망명했고, 서울, 중국 북경, 일본 동경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1923년 8월 정읍의 박승규, 최동규, 김기홍과 함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은신하며 일왕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관동대지진(9월 1일)으로 여러 동지를 잃고 <세계사상대전집>을 소지하고
귀국하였다. 1928년 9월 중국 남경에서 한, 중, 일,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여러나라 동지들이
조직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기관지 <동방>
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10월에는 정화암, 양여주, 장기준, 김지강 드리고 우당 이회영의 여식인 이현숙, 이규숙
자매 등 15명과 함께 북만주로 들어가서 신안진과 산시 근처의 조선족 소학교에서 청장년 훈련과
동포 자녀교육 및 농사지도를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10월 일제의
대륙 침략이 점점 도를 더해가자 의사는 우당, 정화암과 협의하여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아나키스트연맹><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을 기간으로 중국 동지 왕아초, 화균실 등과
제휴하여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자유신문(한자지)>을 발행해서 항일투쟁을 선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한, 중, 일 동지들과 일본의 기관 및 군사시설
파괴, 일제 요인암살, 반역자 처단, 반일 선전을 목적으로 11월 <흑색공포단(Black Terrorist Party)>
이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였고, 중국 천진으로 가서 일본 운송선을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3년 3월 주중일본공사 유길명을 중심으로 일제군부 수뇌부들이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해 중국 국민당정부 내 친일 거물을 매수하려고 상해 육삼정에서 회동한다는 정부를 입수하고
<흑색공포단> 전원이 모여 회의장을 습격을 결의하고 추진하던 중 미리 정보를 탐지한 일경에
의해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일본 장기지방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밤 11시 일본장기형무소에서 39세의 일기로 순국하셨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에 봉장하기로 결의되어, 백 의사의
유해는 일본 장기에서 봉송되어 1946년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봉장되었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순국 82주기 기념식에서
효창공원의 삼열사 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구파 백정기 의사 어록 및 평가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공존을 이룩함이나 공생 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몸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겨래에 미치는 마지막 소원을..(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해)
나는 몇 달을 더 못 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 이다. 형들은 자중 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 독립과 조국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것이 잊혀 지지 않을 뿐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위에 놓아주기
바란다.(일본 나가사끼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백정기 의사는 나의 졸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청렴, 결백, 의리, 강직, 신뢰, 의용 등 모든 미덕을
갖춘 자유혁명가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그는 사지로 나갈 때는 항상 앞장서기를 원하였으며 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는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표현해도 지나친 평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성인에 가까운 점도 없지 않았다. _청뢰 이강훈(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거사 협력자,
전 광복회장,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장)
구파 백정기 의사가 활동하던 1920, 1930년대의 상하이(上海)에는 우리 열사 한 사람에
일제특무연관첩자들이 열배 넘는 숫자의 대세를 이루면서 온갖 핍박을 자행했다. 그런 까닭에
백 의사는 평생에 행장의 흔적을 남기는 일도 없었거니와 언설의 흘림도 남긴 바 없다. 그래서
의사가 39년 생에 걸쳐 남긴 것은 오직 편지 한 통이 있을 뿐이다_
조광해(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 전기 저자)
위자료는 관란시간이 지나 문이 잠겨있어서 못들어가고 여러군데서 자료를 가저왔슴
의열사는 구파 백정기의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어요.
현판 글씨는 전 김대중 대통령께서 필획 했다고 합니다.
의열사에 모셔져 있는 구파 백정기의사 영정,
밖에서 바라본 기념관
외삼문
주차장에서 바라본 기념관 전경 어렸을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에 대한 방송 을들었던
기억은 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전봉준 선생 생가지를 가며 이정표를보고 들렸는데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시간이라서 관람 마감이었지만 외부만 살펴보고 돌아와
자료를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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