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 공원을 출발 정순왕후 태생지로 이동한다 지난번 충청도 여행때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태생지를 둘러보았는데 그때 자료를 찾다보니 단종비 정순왕후 생가지를 알게되어
이지방에 왔으니 찾아보는 것이다
이수로는 섬진강 발전소 도수로관이다 섬진강 땜은 저기 상부보다 수위가 높아 산에 턴널을 뚫어
물을 끌어와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을 하고 발전을하고 버린 물은 부안 계화도까지 수로를통해 농업
용수로 이용한다
섬진강의 물을 동진강 하류지역의 평야지대로 보내는 관개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댐 건설 당시 극심했던 호남지방의 전력난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발전에 이용한 용수를
동진강으로 유역변경시킴으로써 김제·정읍·부안·계화도 및 임실군 하류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했다. 이 댐의 건설로 연간 1억 8,100만 kWh의 전력생산과 4억 600만t의 관개용수를
공급하며, 301.70㎢의 관개면적 확대를 비롯해 최대 홍수유입시(3,268㎤/s)에는 그의
70%인 2,288㎤/s를 조절할 수 있다. 그밖에 댐과 저수지를 관광지 및 낚시터·양어장
등으로 이용하고 있다. 댐의 건설로 인해 전라북도 정읍시·임실군의 5개면 28개리의
92.95㎢가 수몰되었으며, 운암저수지·옥정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갈담저수지가
조성되었다.
섬진강의 물을 동진강 하류지역의 평야지대로 보내는 관개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으며, 중력식 콘크리트 댐으로 댐의 높이 64m, 길이 344m이며 수문 24개가
설치되어 있다. 댐으로 조성된 갈담저수지의 용수를 약 6㎞의 수로를 통해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섬진강수력발전소로 유역변경하여, 151.7m의 고낙차를
이용해 발전하고 있다. 총시설용량은 3만 4,800kW이다. 백과사전에서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동편마을 정순왕후 유허비각
<정읍 칠보 무성서원근처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가 출생한 곳>
조선 5백년을 통틀어 가장 한 많은 왕이 누군가 하면 아마도왕위를 삼촌에게 빼앗긴채 목숨마저 잃은 단종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단종의 아내인 정순왕후는 조선조 여인네중 가장 한이 많은 여인일 것이다.
정순왕후는 명문가 여산 송씨로 여산은 현재 익산지역(백제 무왕 즉 서동왕자가 태어나 자란곳)을 말한다.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아름답고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453년(단종 1년)에 간택되고, 이듬해 왕비에 책봉되었다.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된
정순왕후는 얼마 안있어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되면서 단종과 헤어지게되었고 정순왕후는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
그후 단종은 죽임을 당하고 18세 소녀 왕비 송씨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 왕 단종을 눈물로 영원히 이별한다. 단종이
죽은 뒤 정순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당한채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고 왕후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산봉우리에 소복을 입은채 올라 단종이 유배되어 뭍힌 동쪽을 향해 통곡을하였다 한다.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이사사된지 64년 뒤인 1521년에 승하하였다
아래 사릉은 정순왕후의 능이다
모든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고(회자정리會者定離),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거자필반去者必返)는 말이 있다. 불경
에 나오는 말이다. 이별은 언제나 슬프고 괴롭지만, 사람들은 한편 그 이별의 순간을 두고 만남의 시작이라고도 한다.이별
뒤엔 만남이 있음을 알기에 그런 것 같다. 해후(邂逅)의 기쁨은 석별의 아픔과 비례하니 더더욱. 그런데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이별도 있다. 살아 64년, 죽어 495년이 지났어도 계속 이별 중인 한(恨) 많은 영혼들이 있다. 바로 영도교(永渡橋. 한
양 청계천)의 별리(別離)로 유명한 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이별이 그렇다. 인왕과 북악산을 내린 물이 옥류로
흐르는 흥인지문 밖 청계천의 돌다리가 오늘날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영도교)로 이름되어 진 사연이기도 하다. 지금
도 단종의 장릉은 영월에 단릉(單陵)으로 있고, 사릉은 남양주에 또한 그렇게 있다. 몽중루님 글에서
사릉(思陵)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1440 ~1521)의 능이다. 1454년(단종 2년) 열네 살에 왕비로 책
봉되었다. 그러나 1457년 단종이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감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떠날 때 정순왕비도 같이 부
인(夫人)으로 감봉되어 궁궐(창경궁)에서 쫓겨나게 된다.지금의 청계천 영도교에서 마지막 이별을 나눈 왕비는 이후 낙산
(駱山) 청룡사(靑龍寺)로 들어가 비구니(법명 허경虛鏡)로 일생을 지냈다. 이별 후 단종은 4개월 만에 승하하였지만 왕비
는 그 후에도 64년을 더 살며 낙산 거북바위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떠난 님을 그리워 했다 전한다. 그 당시 왕비께서 옷
감에 물을 들이며 사용하던 샘인 자주동천(紫芝洞泉)과 거북바위는 지금도 창신동 비우당(庇雨堂) 뒤란에 그대로 있다.
몽중루님 글에서
지난 일요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을 찾았다. 사릉을 알리는 일자 기둥 모양의 높이 세운 표지판 앞엔 재실
(齋室)이 마주하고, 정문은 100여 미터 그 서쪽에 있었다. 능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수 백년 창송들이 유난히 울울하고, 금천
교를 건너자 곧바로 소나무 사이로 홍살문이 눈길을 가져간다. 능원은 솔숲으로 된 진입공간에, 잔디밭 잘 다듬어진 제향
공간과 능침공간으로 구분이 뚜렸하고 또한 아름답다. 마치 한 폭 초록 수채화 같다. 사릉도 장릉과 같이 외로운 단릉이다.
정순왕후의 능호가 사릉(思陵)인 것은 일생동안 영월땅을 바라 보며 단종을 사모하셨던 왕비의 마음을 헤아린 뜻에서라 한
다. 하지만 안타깝다. 사 후에도 영월과 남양주에서 서로 떨어져 있음이 임들의 뜻일까? 애사 당시의 두 분은 왕과 왕비이
기 이 전에 홍안(紅顔)의 청춘이었는데. 반 천년이 지난 두 분은 아직도 거자필반을 모른다. 홍살문을 들어서며 혹여 잔디
를 밟아 상할까봐 참도를 따라 걷는다. 정자각 뒤로 돌아가 능을 향해 읍(揖)하고 장릉의 소식을 전해 본다. 사릉의 영월에
서 온 장릉송이 잘 자라듯, 사릉에서 보내어진 영월 장릉의 정령송도 잘 자라고 있더라고. 몽중루님 글에서
정순왕후의 무덤, 사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조선 왕조 시대 때 가장 비운의 여인으로 꼽히는 단종(端宗)의 비(妃)인 정순(定順) 왕후(1440∼1521년)는
1453년 왕비로 간택되었으며 2년 뒤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덕(懿德) 왕대비에 봉해졌다. 하지만 1457년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있는 유배지로 보내지고 정순 왕후도 부인으로 강봉된다.
그 해 단종은 사사되면서 정순 왕후는 궁궐에서 추방당해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들어가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에 왕후는 늘 통곡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정곡(同情哭)과 동망봉 이외에도 많은
유래가 생겼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정순왕후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을 끝내 받지 않았다. 평생을
청빈(淸貧)하게 살다간 정순 왕후는 죽어서도 여인네들의 한을 달래는 토속신으로 숭앙되었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하지만 살아 생전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분은
죽어서도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 한 곳으로 모으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창신동 비우당 뒤란에 있는 자주동천
김동수가옥에 도착하니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는데 혼자라고 그러는지 해설도 않해준다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814(공동길 72-10)
이 집에는 유난히 지네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집이 앉은 오공리의 '오공(蜈蚣)'이 바로 지네를 뜻한다.
집의 그루터기 구실을 하는 창하산 역시 모양이 지네를 닮았다고 해서 지네산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다 베이고 기록 속에만 남은 숲이지만, 집 앞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든 것도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지네의 습성을 배려한 것이다. 게다가 집 앞으로 동진강이 흐르니 습한 곳을 좋아하는 지네에게는
더없이 맞춤인 안식처다. 평야 지대에 지은 집임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까닭이다. 집 자체가 커다란
은유가 되어 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버린 것이다. 지네가 다산 다복을 뜻하는 것을 보면,
자자손손 집이 복덩어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 이 집을 지은 김명관은 이곳이 12대가
복을 누릴 만한 곳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집을 팔지 말라는 뜻을 후손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런 까닭일까?
이 집의 관리는 정부에서 하고 있지만 주인은 여전히 그의 7대손인 김용선이다. 1784년에 지어져 현재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된 이 집은 안채, 사랑채, 안사랑채, 행랑채, 안행랑채 등 아흔아홉 칸
규모의 집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호남 지역의 한옥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순례지다.
행랑채 대문
집을 지은 김명관의 뛰어난 건축적 재능은 대문간에서부터 보인다. 탁 트인 마을을 지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담장이 시야를 가로막아 선다. 한 평 남짓한 대문마당이어서 답답할 만도 하지만
, 실제 집에 들어서면 전혀 답답하지 않다. 넓은 곳에서 막다른 곳으로 들어서며 느끼는 극적인
공간 변화를 대문마당의 아늑함이 잘 흡수하기 때문이다. 시선을 막아선 담장은 안채로 가는
눈길을 차단하는 내외담 구실도 한다. 애초에 내외담과 대문마당을 하나로 기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마당에서 일각문(문기둥이 좌우에 하나인 작은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홑처마에 네모기둥으로 지은 단출한 사랑채가 나타난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어서
실망할 수 있겠지만, 사랑대청에 올라 보면 생각은 달라진다. 이곳 대청은 여느 집의 그저 평범한
대청마루가 아니다. 외관상 대청마루라고는 하지만, 주변의 창호를 열어젖히면 대청은 어느새 탁 트인
누마루로 변신하여 주변의 경치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김동수가옥의 사랑채
벽으로 집을 칭칭 동여맨 여느 나라의 집과 달리 김동수가옥에서는 벽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벽을 뻥뻥
뚫어서 햇살이며 바람이며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다. 한옥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뿌듯하다.
호남 지방의 민가(民家)는 대청을 마루방으로 만들어 건물 끝에 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마리'라고 부른다. 곡창 지대인 호남에서 이 마루방은 안채에 딸려 있는데, 보통 곡식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인다. 알곡이 생명인 농경 지대이므로 이곳은 의식(儀式)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이다. 김동수가옥의 사랑대청은 바로 민가의 마리를 닮았다. 건축적으로 시선의 중심점이라는
점에서 사랑대청 역시 중요한 공간이다. 양반가이지만, 민가 안채의 구조를 빌려 사랑채를 짓는
열린 태도가 이런 창의적인 공간 구성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동학혁명의 중심지답다는
생각이 든다. 대청뿐 아니라 기단도 민가의 그것처럼 아주 낮다. 기단이 낮은 이유는 밖에서
건물이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한 흔적이기도 하다. 부잣집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누마루를 짓는 대신
대청을 누마루로 활용한 태도는 집을 낮추려는 일관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집을 지은 김명관은
굳이 세상에 나서기를 애쓰지 않던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자신의 삶의 태도를 집에
구현한 것이다. 이런 태도가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움으로 나타났을까? 사랑채 앞 행랑채에도
꽤 넓은 대청이 마련되어 있다. 보를 두 개나 받쳐 댄 특별한 모습이다. 하인들도 그들만의
누마루에 앉아 주변에서 다가서는 풍경을 즐겼으리라.
행랑채에까지 대청을 만들고 사랑마당을 아랫사람과 함께 나누어 쓰던 김명관은 아마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옛 부자들과 양반가의 양심적인 분들은 이렇게 굴뚝을 낮게 조성하여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창고의 장독
생활가구들
관리인들이 살았던 공간인듯
건물의 좌우가 정확하게 대칭인 안채
한옥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모습이다. 엄격하게 좌우 대칭으로 지어진 안채를 안채보다 더 큰
안행랑채가 감싸고 있다. 낮은 기단도 이채롭다.
창고
김동수가옥에는 안사랑채가 있다. 안사랑채는 다른 곳에서는 별당으로 불리는 곳이다.
안사랑채는 안손님의 거처나 출가하기 전 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안사랑채는 원래 이 집을
짓기 전에 주인이 기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집이라고 한다. 따라서 집이 웬만한 집의 안채의
규모로 구성되어있다. 전면 6칸 반의 규모로 가운데 두 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의 칸 반은 부엌으로 꾸며졌다. 대청의 칸이 다른 방의 칸살에 비하여
작기 때문에 대청이 4칸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좁아 보인다. 아마도 임시거처로 계획하였기
때문에 대청을 크게 만들지 않은 것 같다
김동수가옥을 돌아보며 정말 좋았던 것은 다른 문화재들과 달리, 방문객 위주로 고택을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대청과 안대청에 누구나 올라가 한옥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끼도록 배려한다.
집 자체도 안채와 사랑채가 답답하게 모인 여느 한옥과 달리 넓은 대지에 개성 있는 건물들이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한옥을 감상하는 이들이 넉넉한 공간감을 가지고 고택을 감상할 수 있다.
그시절 사용했던 우물
김동수가옥은 풍수 상으로 길지에 자리 잡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씨 집안은 이 집을 짓고
가산이 크게 불었다고 한다. 한해 추수로 1200석을 하는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집터가
명당자리이고 12대까지는 그 기운이 미칠 것이라는 풍수해석을 굳게 믿은 김명관은 후손에게
] 이곳을 절대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집이 화를 당하여 무너지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다지 지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안채의 땅속에 표적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다. 그러나 7대를 넘지 못하고 빈집이 되고 말았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앞의 안산을 쪽을 바라보니 안산의 일부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풍수의 근간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풍수의 덕을 보기는 글러진 것 같다.
주위 건물도 돌보는이 없으니 잡초만 무성하다
새로 건축한 위락시설인지 너무 조용해서 접근을 안했다
쏠베이지의노래
'전라.광주.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성서원과 정극인선생묘 (0) | 2016.11.16 |
---|---|
대장금 마실길과 옥정호.천담마을과 구담마을 (0) | 2016.11.11 |
영조대왕 생모 생가지와 피향정 (0) | 2016.11.07 |
정읍 백정기의사 기념관 (0) | 2016.10.29 |
전봉준 동학 농민군 전적지 (0) | 2016.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