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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무성서원과 정극인선생묘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정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서원이 위치한 태인은 이미 신라 시대에 태산현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도 이곳의 현령을 지냈다. 최치원이 합천의 군수로 전출된 뒤, 고을 사람들이 최치원을

기리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생사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선현사(先賢祠)이고, 조선 시대인 성종 15년

(1484년)에 선현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바로 태산사(泰山祠)로 무성서원의 전신이다. 광해군

7년(1615년)에 태산사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서원을 짓고, 80여 년이 지난 1696년 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과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서원에는 최치원 외에도 조선 시대의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배향하였다.

무성서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및 방법 등 일체의 교육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원규》(일종의 학칙)에

 따르면 서원에서는 유학 가운데서도 특히 성리학을 공부하는데 힘썼는데, 《격몽요결》, 《소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입학 기준에 있어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게 되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오로지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를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고 잡담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현재 서원에는 《원규》를 비롯해 성종(成宗) 17년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호남 땅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이자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배향 인물들

  •                       최치원(崔致遠, 857∼? )
  •                       정극인(丁克仁, 1401∼1481)
  •                       송세림(宋世琳, 1479∼? )
  •                       정언충(鄭彦忠, 1706∼1771)
  •                       김약묵(金若默, 1500∼1558)
  •                       김관(金灌, 1575~1635)
  •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고, 고려 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 신잠(申潛)의 생사당을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안세림(安世琳)·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祠宇)·현가루(絃歌樓)

    ·명륜당(明倫堂)·장수재(莊修齋)·흥학재(興學齋)·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는 1884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3칸에 홑처마 맞배기와지붕으로 되어있으며, 최치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신잠·정극인·안세림·정언충·김약묵·김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현가루는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바닥은 흙으로, 2층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28년(순조 28) 중건되었다. 정면 5칸과 측면 3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기와이다. 명륜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의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각 4칸의 장수재와 흥학재는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이후 중수한 것으로, 유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기범연의(箕範衍義)』 1책 등 40여 종의 전적이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무성서원이 있는 위치는 넓은 호남평야의 우측 기슭입니다. 동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면

     상류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우리나라 지형 구조에서는 이런 지점에 큰 마을이 형성됩니다.

    (지금이야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높지만.) 즉, 양반(지주)들이 많이

     사는 집성촌이었습니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 옛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 미칠가 / 천지간 남자 몸이

    날만한 이 하건마는 /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를 것가 (후략)"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진 [상춘곡], 최초의 양반가사(노랫말)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지은

     [정극인] 선생님이 이 곳 분이었습니다. 즉, 당시 유명한 학자분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정극인 선생님은 이 지방의 [향약]을 만들었는데, 무성서원이 그 중심지였습니다. 향약은

    지금으로 치면 지자체 법규, 시행령 정도이니 지역구 의원도 하셨던 셈입니다.

    처음에는 [향음서]라는 책을 만드셨는데, 나중에는 향약 연구가들에 의해 29권의 책으로

    불어났습니다. 이 향약은 [고현동 향약]으로 불리며, 정읍, 태인 일대에 널리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이 향약에 대한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 자료는 조선시대 지방 자치

    , 농민들의 삶 등을 공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사고의 실록을 이 곳으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동학혁명 때는

     이곳 출신의 선비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즉, 무성서원은 당시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자그마 해서... 겨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서원 자체가

    사립이었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카페에서 가져온 글

     

     

     

    사액서원, 액자를 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임금이 주는 겁니다. 임금이 이유 없이 액자를 주지는 않습니다

    . 뭔가 잘했으니까 주는 거겠죠. 그래서 상이 같이 내려갑니다. 대표적인 게 면세와 노비의 면역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방 사립대학인데 일종의 국립대학이 되는 셈입니다. 세금과 노비의 부역 의무를 없애줄테니

    학문에 더 힘써라 이런 뜻입니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그자리에 있는데 말이 없구나

                                                나오며 현가루를 다시 담아본다

           무성리 삼층석탑(武城里 三層石塔)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고려시대삼층석탑이다.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무성리 마을의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높게 마련된 축대 위에 서 있다.

    바닥돌 위로 1층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탑신의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다.

     기단과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있다. 얇아 보이는 지붕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보주(寶珠:구슬모양 장식)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너비에 비하여 길쭉해 보이며, 기단보다 높은 탑신의 1층 몸돌 탓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들고 있다.

     1층으로 줄어든 기단, 3단의 지붕돌 받침, 형식적인 기둥조각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곳이 옛 백제지역이었던 만큼, 지붕돌의 곡선에서 백제탑의 양식이 살짝 보이고 있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위키리백화에서

    이 석탑은 각 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신에 비해 기단부가

     왜소하고 낮을 뿐만 아니라 초층 탑신을 구성하는 부재가 다른 층에 비해 크고 높게 조성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석탑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 가치가 있다.

     

     

     


     


     

    무성리 석불입상,


    "화강암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하반부가 땅에 묻혀 있으며 땅 위로 드러난 불상의 크기는

    높이 355㎝, 하부폭 115㎝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장대하면서도 중후한 양식으로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1매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뒷면은 다듬지 않고 앞면만 조각하였다.

    머리부분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소발로서 두건을 쓴 것처럼 표현되었고

    장타원형에 가까운 상호에 비하여 코는 크지 않고

     입은 윗부분이 불룩하게 표현되었고 두건처럼 흘러내린 귀는 목부분에 이어지며

     목은 굵어 상호의 하부폭과 거의 같은 크기를 보인다.

    짧은 목에는 이도(二道)만이 가슴부분에 표현되었고 납의는 통견으로서

    가슴부분에서 크게 U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 이하 대좌는 요사체의 마루밑에 있어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출처; 문화재청> 

     

     

     

     

    정극인의 시문집 〈불우헌집〉에 실려 있다. 정극인은 단종이 폐위되자 정언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인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교육했다. 그 때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봄 경치를 완상하며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작품에 그려진 전체적인 내용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던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도 실력을 쌓아 중앙 정계로 진출하려다가 거듭되는 수난을 겪던 조선 전기 사림파의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입장을 알 수 있다. 〈불우헌집〉이 정극인 사후 30년 뒤에 편찬된 점

    , 임진왜란 전 표기법이나 어휘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상춘곡〉을 가사의 효시로 보는

     데 많은 이견이 있기도 하다. 〈상춘곡〉이 가지고 있는 가풍은 이후 송순의 〈면앙정가〉로

    이어져 강호가도라는 시풍을 형성했다.

    상춘곡(賞春曲) _ 정극인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을 모르는가

    수간모옥을 벽계수 앞에 두고 소나무 숲 울창한 속에 풍월주인 되었어라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 행화는 석양 속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가랑비 속에 푸르도다 칼로 마름질했나 붓으로 그려 냈나

    조물주의 솜씨가 물물마다 대단하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거니 흥이야 다를쏘냐 .

     

    사립문에 걸어 보고 정자에 앉아 보니 소요음영하여 산속 하루가 적적한데

    한중진미를 알 이 없어 혼자로다 여보소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답청일랑 오늘 하고 욕기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 하세

    갓 괴어 익은 술을 칡베로 밭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먹으리라.

     

    봄바람이 건듯 불어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낙홍은 옷에 진다

    술병이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작은 아이에게 주막에 술을 물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미음완보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맑은 모래 깨끗한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청류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도화로다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이 그곳인가 소나무 숲가는 길에 두견화를 붙들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마을이 곳곳에 벌여 있네 .

     

    연하일휘는 비단을 펼쳤는 듯 엊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사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으리오

    단표누항에 허튼 생각 아니 하네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 한들 어떠하리.  / daum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각(茶角)·다헌(茶軒). 아버지는 부사직 곤(坤)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에 나갔다. 1437년(세종 19) 흥덕사와 흥천사의 중건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부당함을 계(啓)로써 올리고, 이어 요승(妖僧) 행호(行乎)의 방자한 행실을 비판하고 숭유억불의

    이념실현을 주장하는 2,000언이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왕이 진노하여 죽음을 내리려는 것을 황희의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뒤 행호의 요사스런 행실이

    드러나 죽음을 당하자 그의 명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태인현에 돌아가 산림생활을 했다

    .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로 종사랑(從仕郞)이 되었으며, 1453년(단종 1) 비로소 과거에 합격했다.

    1455년(세조 1) 전주부교수참진사로 있다가 그만두고 태인으로 돌아갔으나 곧 조정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성균관주부·종학박사·사헌부감찰·통례문통찬·교수훈도·양전경차관 등을 지내다 1469년(예종 1)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그러나 연로하여 1470년(성종 1) 사임하고 귀향했다. 1471년 조정득실4조(朝政得失四條)와

     민생질고4조(民生疾苦四條)로 된 〈치사후진폐소 致仕後陳幣疏〉를 올렸다.

    이로써 왕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의 호를 내리고 후손에게 음자손유후세(蔭子孫宥後世)의 혜택을 내렸다.

     1472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특지가 내리자 은총에 감격하여 〈불우헌가〉·〈불우헌곡〉을 지었다.

    1480년 말을 타고 입경하여 왕에게 시폐수조(時幣數條)·이가(俚歌) 2장 및 영회시(詠懷詩) 2편을 올렸다.

     병이 들어 1481년(성종 12) 81세로 죽었다. 무성서원에 배향되고 1696년(숙종 22) 사액치제(賜額致祭)되었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논의되는 〈상춘곡 嘗春曲〉의 작자로 유명하다. 그밖에 단가인 〈불우헌가〉

    와 한림별곡체 〈불우헌곡〉이 있으며, 문집 〈불우헌집〉이 있다

     

                                    제사지내기전에 산신에게 먼저 음식과 술을 올리는 상

     

     

     

     

                                                      정극인 선생 사당

     

                                   관리부실로 문도 떨어저 있고 초라한 느낌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