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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해남 대흥사

       11월 14일 두륜산 산행을 마치고 대흥사를 둘러봤다

 

      하루종일 비가 내린 가운데 산행중에 사진기에 물이 들어가 습기가 차서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애를 먹었으며 화질이 좋지 못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인 대흥사는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한국불교의 종가집으로

      그 역할을 다해 온 도량이다.

 

       대흥사는 신라시대 진흥왕 7년(546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호국불교의 정신이 살아있는 도량이며,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

      이지만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

      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

      하였다.

      산내에는 초의선사가 머문 일지암이 있으며 경내에는 석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침계루,명부전,천부전 등 전각들이 있다.

     국보 308호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 보물 제 320호인 삼층석탑 등 8점과

     많은 유형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다.

 

     경내에는 특이하게 사랑의 나무인 거대한 연리근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대웅보전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까이서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합쳐지는 것을 연리(連理)현상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현상은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라고 생각하였다.

     한 나무의 뿌리와 다른 나무의 뿌리가 서로 붙어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연리근(連理根)

     이라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남여간의 애틋한 사랑을 비유하고 있다.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리운다.

     또한 나무가지가 서로 이어지는 것을 연리지(連理枝),나무줄기가 이어지는 겻을 연리목

     (連理木)이라 한다.

 

 

                이곳 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맑고 상쾌하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한번씩 호수의 흐름을 보였는데 절의 스님이 자정무렵 물이 소용돌이치며

                지붕 추녀 끝까지 솟구처 오를때 이물을 마시고 모든 질병을 고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옛부터 약을다리고 차를 끓이는데 있어 이물을 최고로 여겨졌고 장군수의

                이름을 윤선도가 이곳 승려들의 지혜와 기력을 보고 능히 장군을 낳을 샘이라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길어다 먹은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호국문 외삼문

 

 

                                     의중당

 

                         예제문   내삼문

                                                 표충사에는 아래 세분을 모셨다

                                                           사명대사 휴정

                                                         서산대사 유정

                                                         괴묵당 처영


            만년 불패의 터전인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이
            어머니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546(
            진흥왕7)년에 창건된 절이다.

            서산대사가 묘향산 암자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천년 동안
            어떠한 병화도 미치지 않을
터전이요.만년이 지나
            간다해도 끝내 허물어지지 않을 불패의 땅이라고
            일컬어지는 해남 두륜산에 남겨두라는 유언을 해
            대흥사의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데...

           서산대사는 삼재불입지처 만세불휄지처 종통
           소귀지처(三災不入之處 萬歲不毁之處 宗統所
           歸之處)라고했다.즉 삼재도 들어오지 않고 만세
           토록 허물어지지 않고 종통이 돌아 갈 곳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대흥사는 북쪽에서 흘러 내리는 금당천의 물길로
           인해 북원과 남원으로 나뉘어져 있어 의아해할
           텐데...
           이는 아마도 부처님은 세상과 세계의 중심인지라
           남향을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아닌가 싶다.

           표충사는 7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승병들을
           모아 왜놈들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던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의 공적을 기리고 받들기
           의한 사액(賜額) 사당으로 정조 임금이 직접
           표츙사(表忠祠)라는 현판 글씨를 하사 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죠.

           풍수지리적으로는 금당천과 대흥사천이 좌우에서
           흘러와 일주문에서 합수를 하고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은 물이 환포하기보다는 반배를 하는 형국이라
           기운처가 아니고 기운처가 아니다보니 홀쭉배가
           되어 조당이 좁아 수 많은 신도와 인파를
           수용하기에 비좁은 곳이다.

           반면 남원은 두륜산의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곳이라 튼실히면서도 터가 넓어 보기에도 부해
           보이고 마지막 기운 결지처에는 두 남녀가 은밀
           하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연리근(連理根)목이
           있으니 혹 사랑 결실을 원할시 가서 빌어 보면
           결실이 있으리라....

           대흥사 경내 주인자리는 뭐니뭐니해도 서산대사와
           제자인 사명대사 위패와 영정이 있는 표충사 자리다. 현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이나 기운처
           대로 하면 해좌 사향(亥坐巳向)으로 해야만 더 안정적이다. 하남 상불사님 글

                             표충비각

          표충비각에는 서유린(1738~1802)이 1791년 조선정조 15년에 지은 서산대사 표충사기 적비명과

          연담유일(1720~1799) 스님이 1792년 정조16년에 지은 건사사적비명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60년에

          표충사를 이건할 때 지은 것이다

                                  조사전( 스님들의 위패를 모신곳)

 

 

                             수행정진중이라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인증만

 

 

 

                                            문수전

                               보현전

                                     심검당

                                밖에서 바라본 표충사

                              삼층석탑 건립한지 얼마 안되는듯

                                  수행정진중이라는데 들어갈 수도 없고

 

 

 

          초의 스님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선사로서 선의 법맥을

          이어 갔다. 시(詩)·서(書)·화(畵)·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렸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불화나

          인물화 등 대흥사에 있는 그림은 거의 대부분 초의 스님이 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남종화의

          거두인 소치 허유를 길러 내기도 했다.

          초의 스님은 ‘한국의 다승’으로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했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직접 차를 기르고 좋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힘써 그 지역을 차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비롯해 수많은 다시(茶詩)를 지어 다도의 이론적 확립을 모색했다. 스님의 선

          사상 역시 다선삼매(茶禪三昧)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으니, 스님에게 있어 차는 “불가의 오랜 음다풍(飮茶風)을

          넘어서서 예술과 선 수행의 경지로까지 승화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초의 스님은 뛰어난 시승(詩僧)이기도 했다. 초의 스님의 시는 ‘맑고 심오하고 소순기를 벗었으며

          담백하면서도 높은 뜻과 격조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선사의 시풍이 맑고 깨끗하며 그윽하다는

          것은 불가(佛家) 한시의 주류적 시풍, 즉 언외지지(言外之旨)를 강조한 직관주의 시학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초의 스님은 두릉시사(杜陵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두릉시사의 구성원은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진재(眞齋) 박종림(朴鍾林), 광산(匡山) 박종유(朴鍾儒) 등이다. 이외에도

          ≪초의시고≫에는 연사(蓮社), 청량사(淸凉寺) 모임 등등 많은 모임명이 나오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문사들의 수를 세어 보면 전체적으로 37명에 달한다. 40여 년을 국토의 최남단 해남 땅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에서 주석한 것에 비해 많은 인물들과의 잦은 만남이라 여겨진다. 이 역시 스님의

          인품과 빼어난 문학적 재능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백과사전에서

 

 

 

                          요사채인듯 들어갈 수가 없다

 

 

 

천불전은 대흥사 남원(南院)의 중심 불전이다. 큰 대문채와 같이 평범한 단층 5칸 맞배집으로 구조된

가허루의 중앙 문간을 거쳐 천불전 안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의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서향하여 자리한

천불전이 마주보이고 왼쪽에는 봉향각이, 오른쪽에는 옛 강원이던 용화당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에 비하여 마당은 크지 않지만 공간에 맞게 각 건물의 규모와

형식을 갖추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인 천불전은 높은 장대석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어

남원(南院) 공간의 중심건물로서 격식과 품위가 느껴진다.

 

                                                         천불전 법당 천불상

                                     용화당

                                           봉향각

                                           연못

 

                                           종각

 

                                사찰안에는 곳곳에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다

                                       침계루. 원교 이광사의글씨라함

 

 

 

 

 

                                              산신각과 은진당

 

 

                                             원종대가람 대흥사는 종루와 북루가 떨어저있다

 

                              설악에서도 제대로 못본 단풍을 여기서 원없이 보게 될 줄이야

 

 

                      하산시간에 쫓겨 대충 돌아봤는데 천천히 자세하게 들여다 보려면 한시간은 더 걸려야 될 것 같다

                      항상 산행을 하다보면 시간이 없어 문화재를 꼼꼼히 관람 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중산행 비와 안개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사찰을 돌아본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단풍구경을 하면서 저녁식사 장소로 줄다름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