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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남원 만인 의총과 만복사지

                     오늘이 오늘이소서 탑

           400여 년 전까지 전승되었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 노래는 고려시대부터 정유재란 당시까지 남원지역에서 널리 불렸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전승의 맥이 끊겼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도공들의 후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불렀었다. 1988년 이 노래를 남원에

           되돌려주는 행사를 계기로 재조명 되었고, 남원문화원에 의해 만인의총

           앞 광장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만인의총:사적 제272호.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침투한 일본군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 오응정, 김경로, 신호, 임현 등이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군사와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1597년 8월 이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여 명이 전사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했다.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1971년에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1979년 완공했다.

 

충의문은 외삼문 입니다. 

삼문은 조선시대 출입구를 세개를 나누어 각 신분에 따라 들어갈수 있는

문이 정해져 있는 문입니다. 

 

 

                                                                성인문은 내삼문 입니다. 

충의문과 마찬가지로 대문이 세개이며 안쪽에 있기 때문에 내삼문 입니다.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기 위해 대문을 양쪽으로 열수 있게 두쪽으로

해놓았고 붉은색을 칠했다고 합니다. 

훗날 순절한 이들을 한 곳에 묻고 사당을 지어 추모하니 국왕이 이름을 내려

충렬사(忠烈祠)라 하였다. 충렬사는 1612년(광해군 4) 창건되었고, 1653년

(효종 4) 사액사당(賜額祠堂)이 되었다. 1675년(숙종 원년)에 남원역 뒤로

이전한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다시 제단을 세우고 제향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제단이

파괴되었다. 광복 후 중건되었으며 제사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신 정기원 접반사와 이복남 전라병마사등 50여 충신의 위패와

의롭게 싸우다가 순국하신 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50기(騎)를 이끌고 탈출했으나, 접반사 정기원·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

임현, 통판 이덕회(李德懷), 광양현감 이원춘(李元春)·진안현감 마응방과 명군 이신방(李新芳)·장표·

모승선 등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여 명이 전사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했다

 

 

 

 

 

 

 

 

 

 

 

 

 

 

 

 

 

 

 

 

 

 

 

 

 

 

 

 

 

 

 

 

 

 

 

 

 

 

 

 

 

만복사(萬福寺)는 고려 문종때 창건한 절이다.[1]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김시습금오신화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다. 1991년 3월 3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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