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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사선대와 오수 의견비

(지번) 임실군 관촌면 관촌리 222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선대유래비(四仙臺由來碑)'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을 읽어 보면,


'사선대(四仙臺)'는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1985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임실군민은 물론 전북도민과 문화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이곳은 명승고적 설화집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 마이산(馬耳山)의 두 신선과 영수산(靈水山, 임실)의 두 신선이

하루는 이곳 관촌(館村)의 오원강(烏院江)

기슭에 모여 놀다가 병풍처럼 아름다운 둘레의 풍경에 취하여 혹은 대(臺)에 오르기도 하고

혹은 바위 위를 거닐기도 하면서 맑은 물에 목욕하고

즐기더니 까마귀 떼가 날아와 함께 어울리고,

 

이 때 홀연히... 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네사람의 학발신선(鶴髮神仙)들을 호위하여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후로 해마다 이맘 때면

그들 선남선녀(仙男仙女)들이 내려와 놀았으므로 어느덧 이곳을 사선대(四仙臺)라 하고

까마귀 놀던 강을 오원강(烏院江)이라 불렀다.

사선대 주변의 명승지로는 동북쪽에 성미(城嵋)산성과 북쪽에 방현(芳峴)산성,

서쪽에 대리(大里)산성이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무왕6년(605) 봄 2월에 각 산성을 축성하였고, 가을 8월에 신라가 동쪽 반경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바로 성미산성과 방현산성,

그리고 대리산성을 뜻하는 것이다. 성미산성은 1999년 4월에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100호로

지정되어 2007년 도예 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고, 원형의 석축집수시설 2기와 각종 오부명(五部名)인장와가 등이

출토되었다.

옛부터 이 지역은 조선시대 남부지방에서 전주와 한양을 가는 길목으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바, 동과 서(진안, 장수 - 순창, 정읍),

남과 북(남원 - 완주)이 교차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지방유형문화재 135호인 운서정(雲棲亭)은 1928년 당대의 부호인 승지 김양근의 아들인

 김승희가 부친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6년간에 걸쳐

지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관촌면 내 6인의 유지들이 사재를 모아 영벽정(暎璧亭)을

 지었다. 1998년도에 제전위의 창의적인 노력으로

국도상에 사선문(四仙門)을 세우고, 2001년도에 사선대 광장에는 경복궁 경회루를 축소한

사선루(四仙樓)를 세웠다. 그 외 사선대 주변

에는 천연기념물 387호인 '가침박달나무 군락지'와 388호인 '산개나리 군락지'가 있어

경관이 뛰어나며, 매년 사선대 광장에서는 전국 규모의

소충(昭忠), 사선(四仙) 문화제가 열리고 있어 이곳은 유서 깊은 곳으로 전국의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국민관광 명승지이다.

 

                               입구에있는 연못

 

 

 

                        사선루 앞에는 무대를 설치하고 행사를위한 천막들이 처지고 준비에 한장 바쁘다

                        9월22일부터25일까지 소충제와 사선녀의 이름다운 전설을 바탕으로 문화제 행사를 개최한다

                        경복궁의 경회루를 축소한 형태로 만들었다는 '사선루(四仙樓)',

 

 

 

 

 

고 최갑석(崔甲錫) 원로가수는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736번지에서 1938년 9월 16일

父 최종근(崔鍾根)과 母 백옥순(白玉順) 사이에 6남매 중

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실에서 성장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6.25후 제주도 제1육군훈련소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으며, 부산에서 잠시 생활을

 하던 중에 부산가요콩쿨대회에서 1등을 한 결과 작곡가들에게 선발되어 가요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수로서 노래를 시작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여 ‘삼팔선의 봄’ ‘고향에

찾아와도’ ‘내 고향 찾아가면’ 등 23곡을 히트시켰으며, 28곡을 취입하여 50여 곡

이상의 영원한 노래를 남겼다. 그는 1970년대 초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동료가수인

‘도미’와 함께 베트남으로 가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아 모든 사업을

 청산하고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사랑방님 글중에서

 

 

최갑석
1950년대 말, 맑고 트인 목서리로 ‘38선의 봄’ ‘고향에 찾아와도’ 등의 히트곡과 함께 인기를 누렸던

가수 최갑석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에서 향년 66세로 2004년 10월14일 별세했지요.

1974년 미국으로 이민한 고인은 필라델피아 인근 랜즈데일에 살면서 노인아파트 관리사무소장으로 일해왔으며
8년 전부터 고혈압 증세와 심장·신장 질병으로 고생중 이었읍니다.

2004년 9월 말 대동맥 확장으로 긴급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의식불명 상태로 있었으며,

가족과 합의 아래 이날 생명 연장 보조장치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유족은 부인 이형숙씨와 4남1녀가 있읍니다.
박용옥님글중에서

 

 

 

 

 

 

 

 

 

 

 

 

 

 

 

 

                                             운서정에서 바라본 사선대

 

 

 

 

 

 

                                           사선대에서 바라본 운서정

                           사선대를 뒤로하고 오수 의견상으로왔다

오수개 설화는 1973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잘 알려진 얘기다. 현지인들의 오수개 사랑은

그래서 더욱 더 각별해 보인다. 둔남이란 전통 지명조차 버리고 오수라 개명(1992년)할 정도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의 생가를 만들어 놓았고, 이 개를 기리는 비석인 의견비(義犬碑)는

 오수면에 있다. 오수면에 원동산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오수(獒樹)라는

 느티나무가 있다. 여기에도 돌로 개를 만들어 놓았고 의견상(義犬像) 옆 비각 안에 있는 것이

의견비이다. 지금 보는 의견비는 1955년에 만든 것이다.

 

역사와 유래 및 기원

오수개(Osoogae, 獒樹犬)는 고려시대의 문신(文臣최자(崔滋 1188~1260)가 쓴 보한집(補閑集)’ 중권

 주인을 구한 충견(忠犬)에 대한 의견비(義犬碑, 1971년 지방민속자료 제1호)의 내력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당시 남원군(南原郡) 거령현(居寧縣),

 현 지사면(只沙面) 영천리(寧川里)에 살던 고려시대 김개인(金盖仁)이란 사람이 개 한 마리를 애지중지

(愛之重之) 길렀다. 어느날 외출할 때 그 개를 데리고 나갔다. 개인(盖仁)이 술에 취하여 길을 가다가 

풀밭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는데, 들에서 불이 일어나 그의 몸 가까이 번져왔다. 이를 본 자신의 개가 인근

 냇가에서 몸에 물을 적시어 거듭거듭 왔다갔다 하면서 주인 주변의 풀을 적시었다. 이렇게 하여 개는

 불길을 잡았으나 기운이 다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개인(盖仁)이 깨어나보니 개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알고 감동하여 노래를 지어 슬픔을 달래고,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 뒤 자신의 지팡이를 세워 표지를

 삼았더니 그것이 나무로 살아나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있어 거령(居寧)이라는 지명은 개오(獒), 나무수(樹) 두 글자를 쓰는 오수(獒樹)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김개인(金盖仁)이 무덤을 만들어 죽은 개를 장사 지내고 지은 노래가 견분곡(犬墳曲, 개 무덤 노래)이다.

 최자(崔滋)는 이 노래의 창작 동기를 그의 보한집(補閑集)에 남겼다. 1,000년이 지난 지금, 전북 임실군

오수리에서는 당시의 명견(名犬)을 기리기 위해 오수 의견 문화제(獒樹 義犬 文化祭)를 매년 열고 있으며,

오수개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견분곡(犬墳曲)

사람은 짐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공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린다네.​

주인이 위태로울 때 주인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족히 개와 한 가지로 논할 수 있겠는가.

人恥時爲畜 公然負大恩

主危身不死 安足犬同論​

 

또한 의견비는 백제 향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중요 고전의 하나인 고려악부(高麗樂府)에 나오는

 견분곡(犬墳曲)의 발상지라는 사실이 1975년 가람 이병기(李秉岐) 박사가 고증을 했고, 이를

 뒷받침할 문헌이 전북대 도서관에서 발견돼 역사적 유물로서의 객관적 가치가 인정되었다고 밝혔다.

 의견비 주변은 폐허화된채 오수 시장 안에 방치돼 오던중 1975년 9월 임실군에서 5백여 만원을 들여

주변 624평을 조경하고 수령 1천년이 넘는 네 그루의 느티나무도 보호를 받는 등 관리되어 왔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대정 13년) 보통학교 ‘조선어 독본’ (4권) 65페이지에 ‘의구(義狗)’​라는 제목으로

그림과 함께 의견비의 내용이 실려 있었던 사실이 당시의 교과서를 찾아냄으로써 밝혀졌으며, 일제

강점기에 도 교과서에 나온 만큼 우리 교과서에서 빠진 것은 옳지않다면서 1982년 당시 오수(獒樹)

 번영회(대표 심병국)에서 이를 고증하는 자료들을 모아 교과서에 수록해 줄 것을 문교부(文敎部)에

 건의하였다.

▲ 원동산 의견비각​

더욱 감동적인 내용은 일제 강점기에 의견비를 발굴한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무거운 비석을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오수개는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그리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대표하는 무형의 가치가 어우러진 한국의 값진 자원이다.

 

 

                           지팡이를 꽃아둔 나무가 이렇게 자랐을까?

 

 

 

                                              원동산 의견공원

        원동산 공원을 둘러보고 점심시간이라 옆에있는 한정식집에 들렸는데

        글쎄 한사람은 않된다는 이야기 두사람 이상이어야 상차림이 된다는 말씀

        아마 반찬이 여러가지 나오니까 한사람거 준비하면 이익이 없나보다

        그래서 점심은 남원에서 해결하기로 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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