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운봉읍 비전길 69(063-620-6905)
설립취지와 목적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 운봉에 위치하고 있는 국악의 성지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혼이 담긴
국악의 본 고장이요, 성지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국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염원을 모아
조성하였다. 남원은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될 만큼 예로부터 국악의
산실이었으며 오늘날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국악은
우리 민족의 역사이고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이며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 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로서 국악의 역사가 보존 전승되어온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 문형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국악의
보존·전승·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전통문화의 고급화·관광 상품화를 통한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이곳 남원 운봉에 ‘국악의 성지’가 설립된 것이다.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 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로서 국악의 역사가 보존 전승되어온
국악 본고장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판소리의 유네스코 세계문형문화유산 등록에 따른 국악의
보존·전승·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전통문화의 고급화·관광 상품화를 통한 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바로 이곳 남원 운봉에 ‘국악의 성지’가 설립된 것이랍니다.
가야금 산조
5∼6개의 장단구성에 의한 악장으로 구분되며,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산조보다
먼저 발생하였고, 또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다. 19세기 말 고종 때 김창조
(金昌祖)에 의하여 틀[型]이 짜여졌다고 하나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다.
즉 김창조와 동년배인 한숙구(韓淑求)·심창래(沈昌來)·박팔괘(朴八卦) 등도
산조를 연주한 점으로 미루어 김창조산조를 효시로 볼 수 없다는 설이다.
그리고 산조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시나위(또는 심방곡)와 판소리가
연주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틀이 잡히기 전의 유사 산조는 김창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창조가 그 가락들의 틀을 짜서 오늘날과 같은
산조의 체계를 세웠다는 이론이 지배적이다. 김창조 이후 많은 가야금산조의
명인이 탄생하였는데,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가락을 지어서 보유자(保有者)의
이름을 붙여 ○○○제(制)·○○○류(流)로 가야금산조를 전하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야금산조의 계보를 보면, 이 중 널리 알려져 있는
한성기류(韓成基流)·최옥삼류(崔玉山流)·김병호류(金炳昊流)·강태홍류(
姜太弘流)·안기옥류(安基玉流)·김종기류(金宗基流)·박상근류(朴相根流)·
심상건류(沈相健流) 등이 있다.
거문고 산조
산조를 거문고로 탔을 때의 이름이다. 빠르기가 다른 4∼5개의 장단으로
구성되며 장단의 이름이 악장의 이름을 대신한다. 1896년(고종 33),
당시 20세였던 백낙준(白樂俊)이 남도(南道)의 무악(巫樂)인 시나위가락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봉건사상에 젖어 있는 일부층에 의하여
백악지장(百樂之長)인 거문고로 천악(賤樂)을 탄주한다는 심한 반발을
샀으나, 개화기의 물결을 타고 점차 그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거문고산조의 명인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선율에
나름대로의 선율을 첨가하여 보유자의 이름을 붙여서 ○○○류(流)·
○○○바디·○○○제(制)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남기고 있다. 장단은
가야금산조와 마찬가지로 진양·중모리·자진모리가 중심이 되며,
중중모리·엇모리 등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휘모리장단 이하는 악기의
주법상 너무 빨라서 연주되지 않는다.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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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 명이 고수(鼓手) 한 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肉聲)과 몸짓을곁들여 창극조(唱劇調)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 엇모리·엇중모리 등 일곱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고, 또 아니리(白:말)와 발림(科:몸짓)으로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데, 이 때의 대사만을 가리켜 극가(劇歌)라고 한다. 무렵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박타령)》, 《토별가(수궁가:토끼타령)》, 《적벽가(赤壁歌:華容道)》, 《장끼타령》,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橫負歌》, 《무숙이타령(曰者타령)》, 《배비장타령(裵椑將打令)》,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가짜神仙타령)》, 《옹고집타령(雍固執打令)》 등 무당의 12굿처럼 12마당으로 이루어졌다. 하한담(河漢潭)·최선달(崔先達)·우춘대(禹春大) 등 명창이 나와 판소리의 기틀을 잡았고, 순조(純祖) 때와 그 이후에는 권삼득(權三得)을 비롯한 고수관(高壽寬)·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모흥갑(牟興甲)·신만엽(申萬葉)· 박유전(朴裕全)·김제철(金濟哲) 등 이른바 판소리 8명창이 나와 조와 장단을 확대시킴으로써 그 음악성을 충실히 발전시켜 판소리를 크게 번성하게 하였다. 광대소리 12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6마당으로 개산(改刪)하고 그 대문과 어구도 실감나도록 고쳐 이후로 광대들은 이 극본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밖에 이선유(李善有)의 오가(五歌)도 있는데 이는 판소리 6마당에서 《변강쇠타령》 이 빠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판소리 5마당이 바로 이것이다. 출신이 많았으며 신재효 이후 근 1세기에 걸쳐 연창(演唱)되어 왔다. 광무(光武) 연간의 원각사(圓覺社) 이후 서양 연극의 영향을 받아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형태로 연출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나 이는 엄격히 보아 판소리와는 다르다.
민 요 - 성주풀이, 남원산성, 진도아리랑민요는 통속민요와 토속민요로 나눌 수 있는데, 토속적인 민요는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주로 불리어진 노동요가 많으며 재한된 어느 지방의 특징적인 가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박하고 향토적인 민요를 가리킨다. 이러한 민요들이 적업적인 소리꾼들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세련화되어 불리어지고 널리 전파된 노래가 통속민요이다. 한국 민요의 지방적 특성에 따라 대표적으로 남도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소리/ 박계숙, 채원영, 김선영, 조선하, 김은원) 지롱님의 글중에서 |
우룡(雨龍)의 아들이고 광록의 손자이다. 4세부터 할아버지 광록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 때
'아기명창'이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16세 때 광록을 따라 전주대사습에 구경을 가서 명창들의 소리가
끝난 후 단가를 불렀는데 8명창들보다 관객을 압도하여 인정받게 되었다.
박만순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천은사에서 독공했는데 소리가 폭포를 뚫고 나오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자 세상으로 나왔다. 어느날 서편제(西便制)의 명창 정창업의 소리를 듣고 서편제를
자기 가문의 동편제에 도입시켰는데 송씨 일가의 법통을 그르쳤다 하여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또다른 동편제 명창으로부터는 '소리를 통속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송씨 일가의 소리 법제를
벗어나 스스로 독특한 소리를 얻어 명성을 얻었다.
이에 전라감사 이재각에게서 참봉의 벼슬을 얻었고 어전광대가 되어 고종으로부터 사헌부 정6품 벼슬인
감찰을 제수받아 '송감찰'이라고 불렸다. 1902년 원각사 시절에 김창환과 함께 창극운동을 전개했다.
원각사가 해산된 후 궁내부 별순검(別巡檢)의 직책을 잠시 맡았다가 광무대 개관 이후 이동백·김창룡·
장판개 등과 전속으로 있었으며 판소리와 창극공연을 했다. 1930년 조선음률협회와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만들어 후배양성과 창극발전에 힘을 쏟았다. 그의 소리는 둥글고 맑으며 곡조의
변화는 적고 아니리가 별로 없다. '십장가'·'이별가'·'남산촌한량'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다. 판소리
5마당에 모두 능했으나 특히 〈심청가〉·〈흥보가〉에 뛰어났고 〈적벽가〉 중 '화용도'를 잘 불렀다.
그의 더늠은 〈춘향가〉의 '농부가'에 전한다.
송우룡은 헌종시대에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출생하였다. 송광록의 사자(嗣子)이요 송흥록의 사질(舍侄)로서
금지옥엽이다. 자가의 법통을 계승하여 철고(哲高) 양대간을 울린 명창인데 중년에 성대가 상하여 후배에게
도리어 밀린 감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그 고매한 것과 자가의 자래의 전통이 있는 만큼 도처에 압도적 세력을
가졌었다 한다.
제배(儕輩) 박만순과 병견하여 백중을 다투다가 송이 목 께낀 후에 박은 독판을 쳤다고 한다. 향년이 62세이었고
소장은 토끼타령으로 그 중 더욱 특장처를 들면 여좌(如左)하다.
“광리왕이 분부하시되 ‘내 우연득병하여 백약이 무효키로 명의더러 문의하니 네 간을 먹으면 즉효하리라
하기에 원해 3만리 밖에 가서 너를 잡아왔으니 너는 조그마한 토신이요 나는 수국의 용왕이로구나.’ ...(중략)...
‘이런 줄을 알았더면 간을 가저(가져) 왔을 것을 절통하기 칭냥(측량) 없소.’” 운운. 진양조 우조. 문도 전도성 방창.
송광록(宋光綠, ? ~ ?)은 조선시대의 판소리 명창이다. 노래의 왕으로 이름난 송흥록의 아우이고
근대 명창 송만갑의 조부이다. 형인 송흥록의 고수로 있었으나, 고수가 푸대접을 받는 데 분발하여
제주도로 건너가서 4 ~ 5년간 소리 공부를 하여 명창이 되었다. 춘향가에 능하고 그의 더늠으로는
진양조 우조로 부르는 《긴사랑가》의 〈만첩청산 늙은 범이〉가 전해지고 있다. 판소리 평론으로도 유명하다.
송광록의 형이고 판소리 진양장단의 창시자 김성옥의 처남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8세 때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고 아버지 송첨지에게 〈춘향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명창 권삼득의 수행고수였는데 흥록에게 기대를 걸고 어릴 때부터 소리를 가르쳤다.
12세 때 백운산에 들어가 월광선사에게 글을 배우면서 그의 도움으로 소리 공부에 전념했다.
입산한 지 5년 만에 소리를 터득했고 10년 만에 득음대성했다. 하산하기 전날 밤, 망령의 옛 무덤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귀곡성(鬼哭聲)을 배웠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상에 나와 대구 감영 선화당에서 '옥중가'를 불렀는데 그때 만난 대구 감영의 명기 맹열과의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맹열과 이별하게 되었을 때 비통한 심정을 진양장단의 '단장곡'(斷腸曲)에 남기고 있다.
1858년 봄 의정부 좌찬성 김병기의 부름으로 서울에 올라와 철종 앞에서 여러 차례 소리를 했으며
, 정3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이후 그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져 헌종의 총애를 받던 판소리
명창 모흥갑으로부터 '가왕'(歌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863년 봄 김병기를 비방하다 함경도로 귀양갔으며, 1864년 흥선대원군이 송흥록을 수소문했으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장기는 〈춘향가〉·〈적벽 가〉·〈변강쇠타령〉이었고, 특기는 〈춘향가〉의
'옥중가'였는데 귀곡성으로 유명하다. 그의 창법과 더늠은 박만순에게 전해졌다
통일신라사회의 귀족층인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며, 사찬(沙飡) 공영(恭永)의 아들이다.
지리산(地理山 : 智異山)의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익히고 스스로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그의 금도(琴道)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줌으로써
신라 땅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도록 큰 공헌을 하였다.
경상북도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금송정(琴松亭)은 옥보고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고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옥보고가 지은 30곡이 다음과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오나 어떠한 음악인지는 알 수 없다.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1, 기암곡(倚嵒曲)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庵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朝曲) 2,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吾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호곡(遠岵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이다.
나는 운봉이 첩첩산중인줄만 알았는데 제법 큰 들판도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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