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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사당 의암사

장수 논개사당 의암사(전라북도 기념물 제46호)

-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 -

 

 

이곳 출신 논개는 1593년 진주싸움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 또는 충

황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김천일·최경회·황진·고종후 등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

하고 가토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군

에게 진주성이함 락되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

살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외삼문에서 의암사 본관까지는 무려 3개의 문을 거쳐야 된다. 휘광문이란 내삼문을 들어서면
길게 펼쳐진 계단길이 있는데, 그 끝에 자리한 문턱을 지나야 비로소 본관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논개의 영정이 소중히 모셔져 있으며, 건물 좌측 칸에 마
련된 참배록에는 이 곳을 찾은 이들의 이름 석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논개에 대한 대중의 인
기를 보여준다.

촉석(矗石) 의기(義妓) 논개(論介) 생장향 수명비(生長鄕竪命碑)

 

격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구차하게 살지 않고 쉽게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은 열사(烈士)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일개 여인이 대의(大義)를 판별하고 죽음을 보기를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여겼으니 그 열렬함이 어떠했겠는가. 당일의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늠연(凜然)한

열기가 해와 별처럼 밝았을 것이니 그 장렬함이 어떠했겠는가. 산에는 영지(靈芝 : 영험한 풀)가

 있고 물에는 예천(醴泉 : 단맛이 나는 물이 나는 샘)이 있으니 군자에게 어찌 상응하는 것이

없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는 천성(天性)에 근원을 두고 사람의 귀와

눈에 펼쳐짐에 있어서랴.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나이를 먹은 썩은 유자(儒者)로서 끝내 자신을 성취하는 공을 이루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오고 있는데 이 사람은 세운 공(功)이 많고 의리가 열렬하여 사람들이

즐겨 복종하고 더욱 공경하여 늘 감개(感慨)해하고 있다. 이제 의로운 기생(妓生)이라

 수명(竪名)하여 후세에 전하니 평소의 바람을 이룬 것이다. 삼가 글로 적어 표시한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병오년(헌종 12, 1846년) 계추(季秋) 상순에 지현(知縣 : 현령(縣令)과

같은 말) 서원(西原) 정주석(鄭冑錫)이 삼가 짓다.

아들 유학(幼學) 기영(基永)이 삼가 글씨를 쓰다.

비(碑)를 건립하는 일의 유사(有司)는 밀성(密城) 박길인(朴吉仁)이다.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

疾風板蕩不苟不易烈士所難而一女子辦別大義視死如歸何」

其烈也想像當日凛然烈氣炳如日星何其壮也山有靈芝水有」

醴泉君子稱尙况人之名節源扵天性布人耳目者乎愧余六旬」

腐儒終无成己之㓛每於如斯人豊功義烈艶服起敬尋常感慨」

今扵義妓竪名傳後以生平趍走下風之願謹以書記識」

崇禎紀元後四丙午季秋上澣知縣西原鄭胄錫 謹識」

子㓜學基永謹書」

碑有司密城朴吉仁

♠  의암 주논개(朱論介, 1574 ~ 1593)의 생애


 ♣ 논개의 생애가 밝혀지기까지


충의의 고장 장수가 낳은 인물,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
寅)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하지만 논개의 집안이나 생장과정에 대한 기록은 전혀없었다.

18세기 초,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순절을 널리 알리고 기려줄 것을 나라에 건의했다. 이에 조
정에서는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 논개의 후손을 찾아 포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병영은
영남 일대에 관문(官文)을 띄워 후손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논개는 후손이 없음)
그 후, 논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가차원에서 논개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우선 18세기 중반 권적(權適)의 '경상우병사 증좌찬성 최공시장<慶尙右兵使 贈左贊成 崔公 諡狀,

 여기서 최공은 최경회(崔慶會)>'을 비롯하여,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읍지(湖南邑誌)','

동감강목(東鑑綱目)','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의 여러 문헌과 장수, 진주 지역에 전해오는 논개 관련 이야기들, 그리고 노공(老公)들의 증언을

 통해 논개에 대한 많은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논개의 탄생
논개는 1574년 9월 3일 밤, 지금의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주달문(朱達文)의 외동
딸로 태어났다. 주달문은 선비로 마을에서 서당을 꾸리고 있었으며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논개의 집안은 '신안주씨(新安朱氏)'로 넉넉하진 못했지만 기풍이 서린 양반가의 집안이었다.
일부에서는 논개가 기생 출신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논개는 특이하게도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한다.

술년은 개의 해인데, 월과 일, 시(時)까지 모두 개를 상징하는 시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주달문은 딸의 사주를 살펴보고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며 크게 기뻐했다. 딸에게 어여쁜

이름을 지어줄 만도 하지만 그는 계집의 이름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논개'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유는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 개를 낳은(놓은) 것과 같고, 그것을 거꾸로 읽으면

'놓은개'가 된다. '놓은개'를 빨리 발음하면 '논개'로 발음되니 그 발음 그대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 순탄치 않은 논개의 어린 시절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했으며 효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그런데

 화목을 누리며 살았으나, 5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논개 모녀는 몇년동안 모진고초를

겪는다.

의지할 곳이 없던 모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朱達武)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주달무는 형과 달리 거의 인간말종에 가까운 위인이라 매일 노름에 빠져 가산(家産) 말아먹기에바뻤다고

 한다. 결국 집까지 죄다 날려먹자 숙부는 풍천마을에 사는 김풍헌(金風憲)이란 사람에게 조카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는 멀리 줄행랑을 쳤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모녀는 외가가 있는 함양 안의(安義)로 급히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고발로 장수 관아로 압송되고 만다.

 ♣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와의 만남
그 시절 장수현감(長水縣監)은 장차 논개의 지아비가 되는 최경회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한다.
최경회의 부인인 나주김씨는 그들이 오갈게 없는 처지임을 알고 내아(內衙)에서 지낼 것을 권했다.

최경회 내외의 배려로 내아에서 생활하게 된 논개는 낮에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김씨 부인

간호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였다.
몇 해가 흘러 논개의 어머니가 별세하고, 최경회의 부인마저 병으로 죽는다. 서로의 소중한 존
재를 잃은 최경회와 논개는 서로를 더욱 의지하며 같이 살게 된다. 두 세대에 버금가는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연분은 점점 커져만 가고, 결국 담양부사(潭陽府使) 재직

 중이던 1590년 혼인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최경회의 나이는 58세, 논개는 겨우 17세였다.
1591년(혹은 1590년 후반) 모친상을 당한 최경회는 3년상(喪)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능주(綾州, 화순군 능주면)로 가면서 논개를 장수로 보냈다

♣ 임진왜란 발생과 최경회의 죽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경회는 다시 장수를 찾았다. 그는 월강리 들판에 의병청(義兵聽)


을 세우고 의병을 모아 매일 훈련에 임했다. 논개는 동네 아낙들과 함께 의병들의 식사와 병영
청소, 빨래 등을 도맡아 하며 최경회를 도왔다.
그의 의병은 무주 우지치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격퇴시킨 것을 시작으로 산청, 김천,

성주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다.
1593년 4월 조정에서는 그의 공에 대한 답례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를 재수하였다.
최경회는 논개를 데리고 부임지인 진주로 떠났는데, 진주로 온지 채 1달도 되지 않은 1593년 6
월 19일, 왜군의 13만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다.
전쟁이 한참일 때 최경회는 성 밖으로 나가 후일을 기약하라고 하였다. 그의 권유에 논개는 밖
으로 빠져나가 외진 곳에 숨어 있으면서 전황을 살폈다.
1592년 진주성 대첩과 달리 이번에는 왜군에게 승리의 여신이 돌아가면서 성은 끝내 함락되고
만다. 6만의 관,군,민은 거진 전사하고, 최경회는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

최후를 마친다.

♣ 도도히 흐르는 남강 위에 한송이 꽃이 되어 떨어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죽었다는 소식에 논개는 비통에 사로 잠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힘겹게 진주성에 입성한 왜군은 1년 전, 김시민(金時敏)에게 당한 개망신을 만회한 기쁨을

 누리고자 7월 7일 기생들을 죄다 불러놓고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연을 열기로 하였다

논개는 이 때가 기회다 싶어 진주 수안기생(首安妓生)에게 기생들의 명단이 적힌 기적(妓籍)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줄 것을 부탁하고 오로지 칠석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진주 기생의 협조를 얻어 촉석루로 들어선 논개는 누각으로 오르지 않고,

 강가 바위쪽으로 내려갔다. (몇몇 자료에는 누각에 들어가 왜장과 잠시 어울려 놀았다고도 함)

승리의 기쁨에 취한 왜장은 기생들의 미모와 곡차에다시금 취하면서,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만간다.
그런 왜장 중에는 진주성 공격의 선봉이었던 게야무라로쿠스케(毛谷村六助)란 체격이 좋은

장수가 있었다.
그는 문득 강가를 바라보니 왠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에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저도 모르게 강가로 내려갔다. (진주 기생들이 논
개를 돕기 위해 내려가 보라며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논개는 그를 계속 유혹하고, 그녀를 덥썩 안으려는 순간, 그의 허리를 단단히 껴앉고 남강에

 몸을 던져 최경회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뒤따르니, 그녀의 나이 불과 19살이었다.

 그 이후
논개에게 얼떨결에 폐기처분된 게야무라의 고깃덩어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발견되어

 왜국으로 수습해 갔다고 한다. 논개의 시신 역시 부근에서 발견되어 장수 근처인 '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유택을 만들어 모셨으나, 관리소홀로 그만 무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근 300년 이상 무덤의 위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으며 '의암사적보존회'와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1976년 간신히 무덤을 찾기에 이른다.

후세 사람들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하였으며, '의암'은 점차 논개
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친 일종의 시호(諡號)라
고나 할까..? 안다니골 카페에서

 172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촉석루 뒤편에  의암사적비를 세웠으며,

1739년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의기사라는 조

그마한 당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진주목사 정현석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가 열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 이

처럼 진주성에는 사적비와, 의기사가 조촐하여  뭇사람들은  진주성에 들

러서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 주씨가 태어난 장수에는 두산리에 “논개

생장향수명비”와 남산자락1956년 의암사를 촐하게 조성하였으며,

1960녀대부터 점차 성역화사업을 하면서 2만여평 부지에 의리 의리한 의

암사를 조성하였다. 영정은 충남대학교 화가 석천 윤여환교수의 작품으로

조선시대영정기법으로 제작되였고,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이 친필 휘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은 주씨가 태어난 곳으로

생가마을이 있는데, 또한 크게 성역화 되었다 .

 

논개 표준영정은 가로 110cm, 세로 180cm 크기의 비단바탕에 천영채식으로 된 정면 전신입상이다

조선 헌종 12(1846)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 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옮겨져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에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삼강록(湖南三岡錄)·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장수군내 각계 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때 이당(以堂) 김은호 (金殷鎬)가 여러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그린 영정봉안하고, 의암사(義岩祠)라는

 현판은 당시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의 친필 휘호로 각자하여 걸었다.

그 후 1960년대 후반부터 의암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전체 2만 여 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사우(祠宇)

이건(移建)하였다.

구조는 삼문 안의 안마당중문으로 막은 사당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층을 이룬다. 삼문 좌우로 사당채 뒤까지 담을 두르고

, 중문 좌우에서 역시 담을 둘러 영역을 확연히 구분하였다. 조성은 안마당 영역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마련하였으며,

사당 영역은 안마당에서 다시 층계를 오른 후 중문을 통해 들어가게 하였다. 묘당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의암사가 창건된 후에 장수군은 매년 9 9일을 택하여 논개제전을 열다가 1968년부터는 장수군민의 날로 지정하고,

군민의 날 행사와 겸하여 대제(大祭)를 지내고 있다. 이영정은 충남대학교 석천 윤여환교수의 그림으로 2008년에

교체되었다고함 

 

 

 

 

 

 

 

 

 

 

                            술병과 기름병들

                      그시대 사용했던 그릇들

여인들이 사용한 비녀와 노리개 등의  여러 장신구들

                  그시대의 그릇과 신발

▲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지는 논개

 


때는 1593년 7월 7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진주 촉석루(矗石樓)에서 왜장(倭
將)들의 진주성 점령기념 승전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강제 징발된 기생들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며 부어라 마셔라, 춤추자~ 흥이 오른 왜장들 중에는 진
주성 공격의 주장(主將)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도 있었다.
술잔을 들이키며 취기를 즐기는 게야무라는 문득 강가를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
다.  강가에는 왠 이름모를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
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술취한 몸뚱이를 간신히 겨누며 강가로 내려갔다.논개는 계속
웃음을 띄워 보내며 그를 유혹하고, 게야무라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비틀비틀 그녀에게
다가선다.

논개는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그를 안으려고 하고,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군침을 삼키며 그녀에게 안기려 든다.
떡 안긴 순간, 논개는 그를 힘껏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왜장의 목
숨을 선물로 진주성 싸움에서 숨져간 군사와 백성, 그리고 남편 최경회의 곁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상이 코 흘리게 어린애도 줄줄 외고 있다는 논개의 순절 부분이다.
논개는 임진왜란이 낳은 수많은 영웅 중의 하나이다. 비록 칼과 활을 들고 싸우진 않았고, 남자가
아닌 연약한 여인네였지만, 왜군과의 싸움에서 숨져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
진 논개의 의기와 충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이순신(李純臣)과 더불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대중적인 위인~ 논개, 하지만 논개의 성씨를 비롯하
여 그녀의 생애, 신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너무 적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주성에서 몸을
던진 부분만 너무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더불어 임진왜란 시절, 조선 여인의 의기를 잘 보여준 논개는 장수지
역 3명의 의인(義人)을 뜻하는 장수 3절(節)의 하나이자, 장수 고을이 낳은 여걸(女傑)로 장수 사
람들의 자랑이다.

장수 고을에는 논개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다.  장계면 대곡리에는 그녀가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
가 복원되어 있고,  장수군청 앞에는 그녀가 심었다고 전하는 '의암송'이란 소나무가 무럭무럭 자
라고 있다. 또한 읍내 동남쪽에는 그녀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의암사(義巖祠)가 있다.

 

 

 

 

 

                       의암사 앞에는 이렇게 멋진호수와 산책로가 마련돼있다

 

 

 

                     산책로에는 소원을 적어서 달아놓은 리본들이 매달려있다

 

 

                          꼭 소원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램을 뒤로하고 이동을 한다

 

        장수에는 처음 와보지만 저녁에 도착하니 어디가 어덴지도 잘모르겠고 숙소를 찾아 뺑뺑

        돌기를 몇차려 겨우 모텔을 잡아 짐을 풀었으나 오래된 건물이라 영 맘에 안든다 그래서

        잠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날이 밝자마자 의암사로 달려왔다

        다행이 문은 열려있어 돌아보는데 불편한점은 없었다 아침공기 마시며 의암호를 여유있게

        주민들과 산책하며 대화도 나누었다 시골이라서인지 사람들이 참 친절하다

 

 

 

                                    

 

 

 

 

 

 

Brigh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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