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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충혼탑과 장수향교

 

                                                           충혼탑

                                                        의암루

                                                    의암루 천정 단청

                                 의암루에서 바라본 읍내모습

전북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 (장수리)

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하였다.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877년(고종 14)에 현감 홍우정

(洪佑鼎)이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중수하고 1970년·1973년·1975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사마재(司馬齋)·양사재(養士齋)·고사(庫舍)

·부강문(扶綱門)·정충복비각(丁忠僕碑閣) 등이 있다.

대성전은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보존되고 있다.

 그 구조는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 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명륜당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정충복비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90종 237책, 사본 32종 57책의 총 122종 294책이 있으며, 이 중 『청금록(靑衿錄)』

·『장수현도유안(長水縣都儒案)』·『유안(儒案)』·『수정향안(修正鄕案)』·『향교조례(鄕校條例)』·

『선안(仙案)』·『향헌(鄕憲)』 등의 필사본은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향교의 특징은 원노(院奴)인 정충복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부장 안코쿠시[安國寺惠瓊]가 장수에 침입하였을 때, 원노인 정경손(丁敬孫)이 교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아 경서를 외우며 말하기를,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고 하였다. 이에

 왜군들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비롯한 열읍의 향교가 거의 소실되었으나 오직 장수향교만 전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정경손의 공로였다. 그리하여 후인들이 그의 의행(義行)을 기리기 위하여 향교 문전에 의거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비는 장수의 삼절(三絶)로 이름나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맡고 있다.

 

            

장수향교는 1407년(태종 7)에 지금의 장수읍 선창리 당곡마을에 창건되었다. 2차례의 왜란으로

 인해 전국에 있던 향교는 거의 다 소실되었지만 장수향교는 다행히 무사하였다. 그 이유는

정경손(丁敬孫)이 향교에 불을 지르려 하는 왜적들을 막자 적장이 그의 의기에 감복하여 출입을

 금지하는 신표(信標)를 써 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장수향교는 전국적으로 향교를 재건할 때 표본이

 되기도 했다.

1681년(숙종 7)에는 장수향교 터가 가라앉고 비가 새자 유림들이 조정에 이건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1685년(숙종 11) 3월부터 현 위치에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명륜당(明倫堂), 동·서재(東西齋)

 등의 이건공사를 착수하여 이듬 해 2월에 완료하였다. 1877년(고종 14)과 1935년에 각각 중수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장수향교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과 동·서 양재(兩齋)로 이루어진 강학(講學) 영역은 앞에 있고,

그 뒤에는 문묘(文廟) 영역이 자리하여 전체적으로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구성을 하고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고직사와 새로 신축한 충효당이 있고, 외삼문인 부강문(扶綱門) 앞쪽에는

 충복(忠僕) 정경손의 비각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남서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명륜당 뒤쪽에는

 경성재(敬誠齋)와 진덕재(進德齋)가 자리하여 소위 ‘전당후재(前堂後齋)’형의 강학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내삼문 서쪽에는 사마재(司馬齋)가 있으며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자리하고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다

장수 향교의 명륜당은 보기드물게 단청이 돼있다

 

 

평지에 세워진 향교는 서울 성균관,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에서 볼 수 있듯이 앞에 대성전이 있고

 뒤에 명륜당이 자리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장수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본래 경사지에 있던 건물을 평지로 이건하면서 본래의 배치 형식을

 따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장수향교는 일반적인 향교와는 달리 문묘영역에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건립하지 않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사적비(長水鄕校移轉事蹟碑)」(1691년)에도 동무와 서무를

옮겼다는 기록이 없어 처음부터 동·서 양무(兩廡)는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백과사전에서

 

 

 

                   대성전 기둥을보면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짐작이 간다 옆에 기둥을세워

                   무게를 지탱하게 했다

 

 

                                          이건 중수비 

          1442년(세종 24)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686년(숙종 12)·1877년(고종 14)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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