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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이
-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위키리백과
당간지주란
당(幢 : 불화를 그린 旗)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철제·금동제·목제인 경우도 있다
경남.합천.해인사 일주문 들어가기전 10 여m 전방에 사각형 이정표 표지석이 서있는데
한자로 원표(元標)라 음각되어 있으며
4면에는 합천군.거창군.진주군.고령군.대구부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김천군.성주군은 거리 표시가 없네요.
합천군은 九里 三十三町 진주군은 二十二里 九町 거창군은 十二里 十三町
고령군은 八里 대구부는 十七里 二十四町라 음각 되어 있는데
1리는 지금의 10 리에 해당되며
1정은 360자로 약 109m 정도 된다고 하면
합천군은 9리 33정으로 환산하면 약 40km 정도의 거리가 됩니다
해인사창건
남북국 시대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1]이 창건했다.[2]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3]
918년에는 승통희랑[4]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로 삼았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
》이 보관되어 있다.
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해인사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김영환은 그 공으로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고,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해탈문
해인사 보경당은 해탈문을 지나서면 오른쪽에 큰 건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봉안되어 있으며 수련회나 큰 불사가 있을 경우 집회장으로
사용하는 일종의 회관이랄 수 있습니다.
* 보경당(普敬堂)편액(扁額)은 송천 정하건(松泉 鄭夏建)글씨로 추사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검여 유희강(儉如 柳熙綱)1911~1976 으로부터 한문서예를 사사.
정하건 선생은 삼성그룹창업자 이병철(1910~1987)회장과 메이저리그 박찬호 선수의
서예스승으로 이병철 회장을 1978년부터 1985년까지 7년간 가르쳤고 박찬호도
2002년 서예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구광루
해인사 구광루에 대한 설명을 보면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아홉 곳에서 설법하시면서 그 때마다
설법하시기 전에 백호에서 광명을 놓으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수도자와스님들의 요사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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