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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달성 구지 도동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구지면)

이곳 구지는 우리 며느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고 또한 서흥김씨 김굉필의 후손이기도하다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 정구가 심었다 한다.

수령이 400년 된 은행나무로 대부분의 은행나무가 곧게 위로 자라는 반면

도동서원 은행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려 운치를 더하는데 높이 25m

은행나무를 두고 김굉필나무라 한다. 정작 심은 사람은 외증손 정구가 아닌가.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1]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서흥(瑞興)이다. 한성부 출신.

 

김굉필의 글씨

김굉필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김굉필의 글씨

 

수월루는 도동서원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지만 옛스러움을 잃어 버렸다. 외삼문과

누각이 올려진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88년 화재로 소실 된 후

 1973년 복원한 건물로 수월루란 강물위에 드리워진 달을 연상하게 한다는 의미로

김태수가 쓴 글이다.

수월루를 지나 마음의 근본이라 부르는 일각문인 환주문으로 들어선다. 환주문은

 높게 문을 올려 만들 수 있지만 고개를 숙여 들어 오도록 낮게 만들어 놓았다.

그 뿐만 아니다. 문이 낮고 좁아 동시에 두명이 들어 설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수월루를 지나 오르는 계단길도 조심스럽게 걷도록 높낮이가 높지 않은 대신 넓게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성스러운 공간으로 누구던 고개숙여 인사하고

들어서도록 만들어 놓은 듯 보여진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 자기 마음의 주인을

 찾는다 등으로 해석되며, 빗물 누수를 막기 위해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절병통을

올려 놓았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으로 가는 돌길과 석단이 만나는 자리에 돌거북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앙다문 입 양쪽에 튀어나온 송곳니와 잔뜩 힘이 실린  눈매가 매섭게 보인다.

배움의 학당 중정당 공간에서 학생들이 지켜야 할 엄한 규율을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강당 기둥머리에 하얀 종이의 띠를 둘러친 것을 “상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서원 사당에 모신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인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선생에 대한

존숭尊崇의 예禮를 표하는 휘장徽章이다. 

전국 650개 서원 중 도동서원에만 이 흰 띠가 둘러져 있다.

 

 

 

 

 

 

    

▲ 도동서원 현판과 정료대

 

 

 

정면 5칸, 측면 2칸 반 주심포 계통의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로 첫번째 외부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한 곳이다. 중정당으로 오르면 도동서원 현판이 2개가 정중당과 함께 총 3개가

일직선으로 걸려 있다. 현판 앞으로 팔각기둥에 네모난 모서를 다듬어 놓은 석재가 있는데

불을 밝히던 정료대로 대부분 서원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이곳 도동서원은

 아래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중정당 정면 마루 앞 자리에 보행을 방해 할 정도로 가깝게

설치하여 놓았다. 정료대는 행사가 있을때 솔가지, 기름통 등을 이용하여 불을 밝히는 곳이다.

정료대

 

 

 

 

 

 중정당 독특한 단 모습

 

 

 

 

우리 선조는 건축을 할때 일정한 크기의 돌을 재단하여 건축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의 돌을 사용한 건축물이 더러 있다. 경주 불국사 담장에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는데 이곳 도동서원은 돌을 퍼즐 맞추듯 재미있게 서로의 공간을

 채워가며 만들어 놓았다. 우리나라 돌쌓는 건축양식으로 말하면 막돌쌓기에 해당되는

 걸까? 제각기 다른 돌을 정교하게 이어 놓은 솜씨가 그저 놀랍고 지혜로움이 묻어나 있다.

 이 돌쌓기가 막돌헛튼돌쌓기라 한다.스토리에서 가저온글

 

 

 

수월루를 지나 환주문을 거치면 정면 중정당(中正堂)과 좌우 거의재(居義齋)와 거인재(居仁齋)

  있으며, 뒤편 내삼문을 거쳐 제향을 하는 공간으로 들어선다. 건물 중심인 중정당에는 크기가

 서로 다른 돌을 쌓아 단을 만들었으며, 돌과 흙 그리고 암수 기와를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고

기단에 용머리 조각상 4개가 돌출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낙동강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일종의

 주술적 의미로 만들었다 전한다. 또한 다른 서원과 달리 기둥에 흰종이를 감아 놓았는데

 이를 상지(上紙)라 부르며. 서원 중 최고라는 의미 표시이다.

 

 

 

 

 ▲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중정당 기단부에 막돌을 사용하여 올린 후 일정한 간격으로 양쪽 오르는 계단을 내고 중앙을

중심으로 각각 4마리의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그 중 한마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남은 3마리는 물고기를 물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물고기 표현은 아니며 용의 머리부분만

익살스럽게 보인다. 낙동강물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책으로 만들었다 하는데 용의여주를

물고 있는것이 건물 만들 당시 조각상이며, 다른 모습은 용두를 분실한 후 만들어 넣은 것으로

색상이 다르다.

 

                                              거인제

                                                 거의제

                          


장판각藏板閣은 중정당의 왼쪽 한단 낮은 지대에 위치하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다.

경장각經藏閣, 서고書庫 등으로도 불리며, 서책을 보관하거나 책을 찍어 낸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서원은 향교와는 차이가 있다. 서원이 오늘날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공립학교이다.

서원은 학문에 열중하는 반면 향교는 과거를 위한 준비하는 공간을 성격이 약간 다르다.

김굉필은 1454년 한성 출신으로 27살에 생원시에 합격 후 마흔에 정6품 벼슬인 형조좌랑을

 지냈으며, 1504년 세상을 뜬 성리학자로 사림파 시조 김종직을 스승으로 두었다.

 강당의 정면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이 4개의 용머리는 서원 앞 낙동강 물이 넘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책으로 물의 신 용을 상징한다. 그리고 강당 주위 담장은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답다. 장판각은 유물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독특한 디자인 담장으로 국내 유일 보물로 지정된 담장이다. 담장은 보물 제350호이다.

  

 

  

 

 

지면과 가까운 곳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 그리고 중간에 기와로 장식하였다.

 

 

담장에는 기와를 이용하여 디자인을 연출한 곳이 여럿 있다. 기와로 어떻게 다양한 문양을

 만들 생각하였지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담장으로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도동서원

담장에 크게 감동을 하지 못한다. 이게 왜 보물급인가 할 정도로 담장에 특별한 특징이 없다.

가로 기와를 놓고 중간 중간 둥근 문양을 넣었는데 이곳 담장이 유명세를 떨치는 것은 다른

지역처럼 특정한 한곳이 아니라 도동서원 전 구간의 담장이 동일한 암수기와를 이용하여

꾸몄다는 것이다. 스토리 정보에서

김종직이 죽은 후 6년이 되던 1498년 조정에서는 뜻밖의 시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림파와

 훈구파가의 정권 타툼이 심했는데 사림파 시조였던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한 편의 글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였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해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사림파였던 김굉필도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조광조를 만나게

되었고 조광조는 스승으로 삼으면서 훗날 김종직을 시작으로 김굉필, 조광조 순으로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게 된다.

 

 

                            공사중이라 밑으로 기어들어가다 머리만 한번 받첬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입을 벌리고 있는 거북 머리돌이 있다. 

                                         나오면서 바라본 관리동 현재 관리인이 거주하고있다

                      돌아나오면서 다람재에서 잠시 도동서원과 낙동강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