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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북괴산 화양구곡

                    금당실마을을 휘리릭 둘러보고 괴산 화양구곡으로 왔습니다 그저 말로만 듣던 화양구곡

                    산행을하며 선유동천 쌍곡폭포도 가보았는데 오늘비로소 구곡을 모두 답사하게됩니다

                     마을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곳 성황당

                            휴게소와 식당이 모여있는곳

      1975년에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서 동쪽으로 32km 지점에 있다.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을 이름지었다 한다. 화양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과 7km거리에 있으며 푸른 산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지이다.

            [화양구곡]
       *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경천벽이라 한다. 이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
      경천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巖)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가 있으니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암 옆에는 친명 반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가 있다.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이라고 한다. 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으로서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가족 단위의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巖)
      첨성대에서 동남쪽으로 1㎞ 지나면 이 바위가 있다. 궁석이 시내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지나면 학소대이다.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채 여기저기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 화양 제9곡 파천(巴串)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학소대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이 반석이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어 많은 세월을 새기고 있다.

 

 

 

                         입구에는 느티나무 가로수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 <경천벽은 못보고 지나왔기에 빌려온 사진임>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경천벽이라 한다. 이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만동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좁고 가파르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을 조심히 할 수밖에 없다

 

                            만동묘(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모시는곳)

                      졍료대

      정료대는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지나 송진등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한다

      정료대는 대부분 높이 1~1.5m 정도의 4각角내지 6각 또는 8각 기둥(柱) 형태로 되어 있고 상부석은

      보통 원형의 사발 모양이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22년(1696)에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건되던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숙종 42년(1716)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봉납을 강요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화양서원의 이런 행패가 극심하여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여러 번 단속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려졌다. 그것은 이 부락에 있던 지정음식점 같은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이 있는 요역기피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 ·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에도 역시 김좌근의 주청으로 금지되었다.

      이 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1999년 우암 송시열 유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된 후 2004년 송자사 · 승삼문 2동을 복원하였고,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되었던것이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었으나 광복후 찾아 다시 건립하였다.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가 있으니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년)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년)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년)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년) 건물이 헐리었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다.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찾아 세워 놓았다.

 

 

 

                                 암서재

             송시열의 서재이자 별장 주자의 운곡정사를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이라고 한다.

      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으로서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가족 단위의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금사담위에는 이렇게 너럭바위가 있고 그늘이있어 여름에 피서하기 아주좋을것 같다

 

 

 

                    비가 오지않아 계곡물이 적으니 물도 깨끗지 않고 멋진 풍광이 반감된듯하다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사신으로 북경에 간 민정중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비례부동'이란 네 글자 친필을 얻어왔고 우암이

        1674년에 그 글자를 바위에 새기게 했다"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으로 우암의 철학, 정치관과

        일맥상통한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계곡은 많다. 하지만 화양구곡처럼 역사와 철학, 이야기가 함께

      흐르는 계곡은 흔치 않다. 특히 계곡 전역에 조선 시대 주자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어 사료적인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올라가보지는 않았지만 능운대 꼭대기에는 해서체로 능운대(凌雲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함.

            여기까지오며 서원과 만동묘를 둘러보며 여러가지 설명문을 읽다보니 일행은 얼마쯤 갔는지 보이질

            않아 잰걸음으로 달려 가니 땀도나고 발바닥도 아프고 힘들다 여행이란 나혼자 다니며 여유롭게 볼것

            세세히보며 내방식대로 하고싶다    7경에서 9경은 디음장으로 넘어갑니다

 

                                               

                                                   Via Dolorosa (슬픔의 길) - Sandi Pat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