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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의성 향교와 조문국 사적지

     의성 향교(義城鄕校)는 조선 시대 지역 유생들이 머물며 수학한 교육 기관으로, 1545년(태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건립 이후 많은 유학자를 배향하였으며 향교 내에 대성전을 두어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제향적 기능도 담당하였다. 교육과 제사를 위해 향교를 출입하던 의성의 재지 사족이 이곳에서 향론을

     형성하는 등 향촌 자치 기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성 향교의 경우 창건 당시 기록이 소략한 탓에 역사를 명확히 밝히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향교 초창기의 상황은 『의성현지』 학교 항목에 수록된 「현인 남몽뢰기」를 통해 일부 파악해

       볼 수 있다. 기문의 내용을 보면 의성 지역에는 문소군 초부터 공자의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곳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성인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짐작되며, 고려 시대에는 향교의

       역할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 쇠퇴하여 그 유지만 남았는데 조선 초에 퇴락한 건물을

       복건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에 간행된 『의성 향교지』에서는 그 시기를 1394년(태조 3)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후 성종 대에 들어서 현령 이종준(李宗準)[1458~1499]에 의해 지금의 동산으로 이전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 35) 현령 허민중(許旻重)이 중건하였고, 1670년(현종 11) 현령

       이당규(李堂揆)에 의해 확장되었다. 이후에도 의성 향교는 여러 차례 중수한 흔적이 보인다. 1762년에 작성된

      「성전중수기(聖殿重修記)」, 1787년 또는 1847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향교성전중수여포우변통기

        (鄕校聖殿重修與脯牛變通記)」, 1856년 작성된 「성전중수기(聖殿重修記)」, 1871년 작성된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1889년 작성된 「성전중수기(聖殿重修記)」, 1890년 작성된

      「문소향교성전중수기(聞韶鄕校聖殿重修記)」 등을 통해 지속적인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대성전 암막새에 남아 있는 명문에 “강희이십년신유(康熙二十年辛酉)”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시기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일제 강점기에는 향교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의성 지역 유림들의 노력으로 1922년

       명륜당과 광풍루가 중수되었고, 1930년에는 위토(位土)를 정비(整備)하고 묘당(廟堂)·누원(樓垣)·

       상탁(床卓)을 개수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1950년 6·25 전쟁으로 소실된 위판을 1954년에 복향시켰다.

       1968년에 향교 일곽을 보수하였고, 1971년 광풍루, 1980년 대성전, 1982년 명륜당·광풍루를 보수하였다.

       1991년에 서재를 신축하였으며, 일곽을 보수하였다. 이후 1992년과 1993년, 1994년, 1997년에도

       각각 보수 작업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의성 향교는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988년에 『의성 향교지(義城鄕校誌)』가 발간될 당시까지

         향교에는 향교의 유래, 향교의 연혁, 의성의 향약, 의성 향교의 권과절목(勸課節目) 등의 기문을

         비롯하여 20여 건의 향교 관련 중수기(重修記), 축문(祝文) 등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6년 일반 동산 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 조사 보고서(Ⅰ)』를 보면 고문서와

         고서는 대부분 인멸되었고, 「문소성전중수기(聞韶聖殿重修記)」·「의성향교학자기(義城鄕校學資記)」

·       「향교성전중수여포우변통기(鄕校聖殿重修與脯牛變通記)」·「성전중수기(聖殿重修記)」·

        「의성명륜당중건기(義城明倫堂重建記)」 등 22개의 현판이 조사되었다. 다행히 향교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는 『의성 향교지』에 영인되어 일괄 수록되어 있으며 19세기 전후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성현지』와 1832년 경 편찬된 『경상도읍지』 등에도 일부 기문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성전으로 오르는길의 은행나무와 느티니무 숲입니다

 

        의성 향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동측 전방의 높은 터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은 서측 후방의 낮은

        터에 각각 별개의 토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 형태를 보인다.

        대성전은 조선 중기 건축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송조의 4현[주렴계·정명도·정이천·주자], 해동 18현[신라의 설총·최치원,

       고려의 안향·정몽주, 조선의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성혼·이이·조헌·김장생·김집·

       송준길·송시열·박세채]이 모셔져 있다. 동·서무는 없다. 경내의 정면과 측면에 사주문을 두어 출입하였다.

       현재 대성전 지붕에는 1681년의 것으로 보이는 ‘강희 이십년 신유 사월 일 의성관(康熙二十年辛酉四月日義城官)’

       기와와 1890년의 것으로 파악되는 ‘경술 윤 이월 의성관……(庚戌閏二月義城官……)’·‘강희 이십년

       신유 사월 일 의성관(康熙二十年辛酉四月日義城官)’ 기와 등 다수의 명문와가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명륜당은 조선후기 건축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륜당 내에는

       「의성 향교 학자기(義城鄕校學資記)」·「학령(學令)」 등 다수의 기문이 걸려 있다. 명륜당 앞에 있는

        서재는 허물어지고 동재만 남아 있었으나 1991년에 서재를 신축하였다. 누문인 광풍루는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익공계 맞배지붕의 중층 누각 건물이다. 이층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상층 내부에는 「의성 향교 광풍루

        중수기(義城鄕校光風樓重修記)」가 걸려 있으며, 전면 어칸 상부에 ‘광풍루(光風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 밖에 교직사, 비각, 화장실, 협문 3동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성전 안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현재는 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를 관람할 순 없으며 근대산업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써

       개관예정이라고 하니 그때 다시 의성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성냥공장이

       처음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5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 성냥공장은 서울에 존재했으며 이후 인천에

       대규모 성냥공장이 들어섰다.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던 성냥공장은 전국적으로 300여개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80년대 라이터 보급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해 대부분 폐업의 길을

       걸어야 했다.

               6.25 전쟁직후 1954년 2월가동하여 한때종업원 165명을 거리린 향토기업으로서 하루에 1만5천갑의

               성냥을 생산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회용 개스라이터의 출현으로 2013년 11월 조업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개방했으면 들어가 그때의 시설물들을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굳게 닫힌 문으로 내부만 들여다봤다

                   현재는 성광 성냥공장의 손진국대표가 공장건물과 기계류 그리고 공장부지 전체를 의성군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공장을 지켜주길 바란다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성냥공장 이를 보존해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남겨줬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둘러보고 조문국 유적지로 이동을 합니다

 

 

 

                          의성 조문국 유적지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라고 하는 삼한 시대 초기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고려 시대 의성부(義城府)였던 문소군(聞韶郡)은

            원래 조문국이었다고 기록된 이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의성 지역에는 조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고 밝혀 놓고 있어 조문국의 중심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벌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되어 조문군으로 편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문국유적지 야외 박물관 연자방아입니다

 

 

 

 

 

 

 

 

 

 

 

 

 

 

 

 

                                각종 생활도자기들

 

                            분수대와 탑리오층석탑 모형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 전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군이라 할 수 있겠다. 기록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중심지와 문헌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조문국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유력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조문국의 중심지는 금성산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문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 소국의 수장은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이며

          이들은 국읍에 존재하여 읍락을 통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 읍락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사로 육촌과 가락 구촌 등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울러

          소국에는 제천 의식을 주관하던 ‘천군(天君)’이 있었다. 그리고 『삼국지』에 보이는 관가의 존재는

          일정 정도의 지배 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서 관리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며, 축성 등의 일들이 있을 때

          여기에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의 소국의 신분 구조는 주수(主帥), 천군(天君),

          민(民), 하호(下戶), 노비(奴婢) 등의 계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문국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문국도 경상도 일대 여타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읍과 다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국읍은 용어 그대로 ‘나라의 중심 읍락’, ‘대읍락’인데 앞에서

          이야기한 금성면 일원일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세기 말 국읍 중심의 내부 결합을 바탕으로 군대 조직을 재편한 사로국은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조문국이 위치한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다. 경주의 사로국이 이곳을

        장악하여 조문군으로 삼으면서 일단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고,

        북방에서 정치 변동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남하하여 내려오는 유이민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 Allegro molto (0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