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築臺 위에 세운 오층석탑, 축대에 호석(보호석)을 배치해 놓고 있다. 이 호석에 성혈(청동기시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청동기 시대에 이곳이 성서로운 곳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신라의 탑 연구에 꼭 봐야 할 탑이 의성군 탑리 오층석탑이다.
이 오층석탑의 주요한 특징이 있다.
1. 백제의 목탑을 석탑양식으로 제작된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충실히 번안 소화시킨 탑이다.
2. 분황사 모전석탑 이후 신라의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잘 조화시킨 탑이다.
3. 경주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같은 전형기 석탑이다.
4. 의성 탑리 오층석탑 감실 하대에 信枋石 사용 유일한 구조
(경주 고선사지 문비아래도 신방석 사용)
5. 탑을 조성하기 위해 흙을 돋아서 축토를 한 후에 土築垈위에 탑을 세운 점
6. 축대에 사용한 호석(護石)용도의 자연석은 성혈이 나와 있는 청동기 시대 암괴들이다.
이런 점을 비쳐 볼 때 이곳은 청동기 시기에도 성서로운 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주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일종의 엔타시스(배흘림)형태이며, 기둥위에는
주두(柱頭)가 조각되어 있어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2층 옥신석부터는
네 면마다 탱주를 두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내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6단이며, 층급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는 5단이다. 추녀는 목조건물처럼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옥개석의 상·하면에서 전탑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우주의 형태와 주두,
옥개석 추녀의 반전 등에서 목조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글돋선생님의 글중에서
감실(龕室)
1층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몸돌(옥신석)의 기둥돌들도
모두 별개의 돌로 기둥돌의 안쏠림과 배흘림까지 다듬었을 정도로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문비(문틀)와 하인방(문지방)등 문을 달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신라의 석탑에 관해서 박경식(단국대교수)가 잘 정리한 내용 중 의성군 탑리 오층석탑은
백제의 목탑을 석탑양식으로 석재로 충실히 옮긴후 이를 잘 번안하여 잘 소화시킨
석탑이 탑리오층석탑이고 하였다. 박교수의 석탑에 관한 이해를 소개해 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 발생국인 백제는 중국의 목탑양식을 충실히 석재로 옮겨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오층석탑을 건립하였으며, 신라는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충실히 번안하여 善德王 3년(634)에 분황사 모전석탑을 조성하면서 우리나라 塔婆史의
一章을 열었다. 이후 한국 석탑의 전형양식을 창출한 신라는 목탑과 전탑의 양식을 잘
소화 정리하여 7C 전반기에 이르러 의성 탑리오층석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같은
類의 석탑은 모두 한국석탑의 始原樣式으로서 통일후 형성된 전형석탑의 조형이 되고 있다.
우주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일종의 엔타시스(배흘림)형태이며, 기둥위에는 주두(柱頭)가
조각되어 있어 목조건축의 수법을 엿볼 수 있다. 2층 옥신석부터는 네 면마다 탱주를 두었다.
옥개석(屋蓋石)은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처럼 낙수면과 받침에 층단을
나타내었는데, 낙수면의 층단은 모두 6단이며, 층급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는 5단이다.
추녀는 목조건물처럼 네 귀퉁이가 살짝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 사회적인 통일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까지도 포함하는 전체적인
통일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석탑문화를 발생시키게 되었다.
통일후 신라에 의해 건립된 석탑은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 고선사지삼층석탑,
나원리오층석탑으로 이를 典型期의 석탑이라 부르고 있는 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식상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① 기단은 상·하 2층기단으로 하층기단에는 3주의 撑柱(탱주)와 兩 隅柱(우주)가 각각
별석으로 조립되고 있으며 갑석 하면에는 角形(각형) 1단의 副椽(부자재 서까래)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초층탑신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② 탑신석은 양 우주를 별석으로 놓았고, 각 1매 판석으로 네벽을 이루고 있다.
③ 8매로 구성된 屋蓋石(옥개석)은 완만한 낙수면을 보이고 있으며, 상면에 角形 2단의
탑신괴임이 하면에 角形 5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④ 대부분의 석탑은 露盤(노반) 이외에는 상륜부를 결실했는데, 감은사지동·서삼층석탑은
철제찰주를 남기고 있다.
이처럼 공통된 양식을 구비한 전형석탑에 이어서 8세기 중반에 이르러 定型樣式의
석탑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定型期의 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이 계열의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건립된 모든 석탑을 일컫는 말로써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글돋선생님 글중에서
2012년10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해체복원 했다고 한다
일몰시간도 얼마남지 않아 야영장을 찾아 빙계계곡으로 왔다
건너편에는 야영하는 탠트가 두동이 있고 어제 야영객들은 다 철수 했나보다
여기도 주차장이 있고 또한 옆에보니 차량과 탠트도 있어 괜찮겠다싶어 자리잡는다
또한 저기 계곡이 가까워 저녁에 통발로 민물고기도 잡고 좋겠다 싶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보니 빈탠트였다는 사실 나홀로 외롭게 야영을 했네 알고보니 장사용차량과 탠트
화장실도 가깝고 수도가도 가깝고 단지 맨땅에 탠트를 처야하기에 비오면 불편 할 것 같기는하다
석양이되니 물고기들이 놀러나와 이리튀고 저리튀고 난리속이다 오늘 밤에보자
저녁에 비가 좀내렸는데 일어나보니 탠트가 흙탕으로 완전 젖어있다 어떠랴 물에 행구어 말리면 될것
그나저나 저녁에 넣어둔 통발에 고기가 들어 갔으려나 계곡에가서 못잡아본 때는 없는데
버들치가 통발에 꽤나 들어왔네 큰것만 몇마리 건지고 모두 살려준다 아침은 어탕 라면으로
간단히 때우고 계곡위도 돌아보고 철수를하며 빙계사터로 가보자
워낙 날이 가물어서 물이 없는편인데 여름에 피서지로서는 좋은곳인것 같다
경북팔경이라는 표지석도 담고 주위를 돌아보기로한다
계곡에는 무지개다리도 있네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 70 에 위치한 통일신라 탑입니다.
경상북도의 8군데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하나인 보현산 줄기 빙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모방한 것입니다.
탑의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단의 가운뎃돌은 기둥과 면을 이루는 석재를 딴 돌로 하여
15개의 돌로 구성하였습니다. 기단의 맨윗돌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괴임을 높게 얹었으며,
탑신부를 보면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딴 돌로 모서리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입니다. 지붕돌의 경사진 면은 각 5단의 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상의 머리장식부분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습니다.
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됩니다. 의성탑리오층석탑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나
모전석탑으로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탑안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불상을 모시는 장소로 본래 조그마한 불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가저가 지금은 불상아래 깔았던 방석만 남았는데 풍혈 올라가는 계단에 전시
동양의 삼국 가운데 중국은 벽돌탑을 많이 쌓았으므로 전탑의 나라, 일본은 나무가
많아서 나무로 많은 탑을 쌓았으므로 목탑의 나라, 우리나라는 돌탑을 많이 쌓았으므로
석탑의 나라라고 합니다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있는 이 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빙산사(氷山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아직도 주변에는
석축과 주춧돌, 그리고 기와 조각들이 남아 있습니다
탑은 높이가 8.15m이고 한 변이 4.06m인 지대석과 단층기단 위에 모전석탑 형식으로
조성된 이 탑은 파손상태가 심하여 1973년에 완전히 해체 복원을 하였는데 그 때에
3층 지붕돌 속에서 금동사리장치가 나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곳의 얼음굴을 들어가봤지만 여기처럼 시원한곳은 처음이다
이곳을 찾는 남녀노소 선남선녀들이여 여기 만고의 신비를 간직한 세계제일의 풍혈이
있노라 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빙혈에 대한 글을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글이라고 함
안개가 자욱하고 카메라 랜즈가 김이서려 명확하게 안나왔습니다
실내외의 온도차이로 유리에 김이서려 잘 보이지 않지만 하얗게 우유를 뿌려 놓은듯한 형체가 어름이다
무더운 여름에 이렇게 얼음이 얼어 있습니다
빙산사주위의 여러곳을 설명해 놓은 기록 같다
여기는 풍혈입니다 시원한 바람이 끈임없이 나오고 있는데 짖궂은 사람들이 들어가나봅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라는 글이 보입니다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0
오층석탑 감실안에 있던 부처님이 앉아 있던 방석이라 생각하면 됨
경북 팔경중 일경이라는 뜻이겠지요
전에 다녀가신 분들의 사진을보면 계곡에 물이 철철 넘치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빙계서원에 내려오니 아침이라 그런지 너무 조용하다
+ 빙계서원[氷溪書院]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氷溪里)에 있는 서원으로 1556년(명종 11)에
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이언적하니 경주 양동마을과 옥계서원이 생각난다
1556년(명종 11)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안국(金安國)·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장천(長川) 위에 세웠다.
1576년(선조 9) ‘장천(長川)’이라고 사액(賜額)을 받아 지방 인재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氷溪里 ) 빙산 사구터에
이건(移建)하면서 빙계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89년(숙종 15) 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을 추향(追享)하여 오현(五賢)으로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당시 서원에는 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
충효사(忠孝祠)·명교당(明敎堂)·전사청(奠祀廳)·주소(廚所) 따위의 건물이 있었다.
그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1868년(고종 5)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태일전(太一殿), 세심정(洗心亭)과 서원이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빙계루 모여서 시문을 논하며 휴식도 겸했을 그런장소
유생들이 공부하고 복습하고 학문을 익히는곳
사액 현판인데 불에타 다시 쓴것 같다
강당으로 쓰이는 명교당
지금 임금 즉위 6년 을사년 봄에 빙계서원 유생이 山長 金尙瑜의 뜻으로 와서 내게 그 책임을 맡아달라고 청하였다.
사양할 수 없기에 올 해 3월 16일에 서원에서 함께 모이기로 약속하고 약속한 날에 가 보았다. 그런 다음 날
내 친구 上舍 李士明이 나를 찾아와서 내게 말했다.
“이 서원의 廢興顚末은 자네가 이미 스스로 알 것이니 내가 또 어찌 자네에게 말을 하겠는가. 다만 선배의 열심은
후학들을 흥기시키는 것이 되며 우리 유학은 어떻게 하든 꼭 전해야만 하는데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마침내
그 사람과 이름이 백년도 못되어 잊혀지도록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고장 자제들의 죄라네. 자네가 그것을
쓴다면 그 죄가 무겁지는 않을 것일세. 생각건대, 이 서원이 長川에 있은 지가 오래라. 내 증조부 相國公께서
여기로 옮겨 세울 것을 가장 앞장서서 발의하셨고 내 尊府君께서 또 따라서 다시금 새롭게 하셔서 지금까지
이에 힘입어 없어지지 않았네. 내 先代께서 敎學을 일으키신 공이 어찌 크지 않은가. 내가 듣건대, 선조에 좋은
것이 있는데 자손이 능히 알지 못하면 이것은 밝지 못한 것이며, 알면서도 후세에 드러내어 전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라 하더군. 그렇다면 내가 이렇듯 서두르려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한 것이지. 다만 나는 학문함이
오래지 못하고 또 글 또한 下手라 장차 능히 내 뜻을 펴서 밝힐 수 없다네.”
그러나 흠모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紀績의 글 씀을 부탁받았으나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또 그 일이
중한지라 下手가 감히 하지도 못한 것이 또 일년이었다. 이제는 사명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아! 죽은
벗의 부탁을 내가 또 어찌 사양할 수 있으랴.
삼가 생각건대, 우리 마을은 곧 慕齋 金先生과 晦齋 李先生이 風敎를 남기신 땅이다. 嘉靖 丙辰년에 悔堂 申元祿이
마을 남쪽 5리쯤 되는 長川 가에 서원을 세워서 두 선생을 제사하기로 발의하였다. 萬曆 丙子년에 ‘長川書院’이라는
편액이 내렸으니 대개 어짊의 모범됨을 본 받으라 함이다. 이제 大明 『一統志』를 상고해 보면 중국 사람들은
程子나 朱子가 한번 말에서 내려 쉬거나 한번 시를 읊조린 곳에는 서원을 세워 높이고 받들지 않음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고장에서 두 선생을 위해 祠堂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선배가 院宇를 세워 향사하려고 한 것과
선조임금께서 사액하여 기리신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 마땅하다.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만나 院宇가 거의
무너져 없어지게 되자 마침내 長川으로부터 冰溪의 북쪽으로 옮겨 세웠다. 대개 장천 옛터는 縣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車馬가 함께 질주하고 저자거리의 시끄러움 때문에 후학들이 藏修하기에 적당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다만 兵火 때문에만 그렇게 한 것이랴. 冰溪는 마을 남쪽 40리 밖에 있는데 산이 둘러 있는 빼어난 곳이며
땅이 궁벽져서 그윽하다. 아래로는 돌 사이로 샘물이 흐르는데 샘이 맑고도 얕아 아낄만 하다. 또 風巖冰穴이 있어
한 여름에도 춥다. 辛引孫의 시에서 말한 바 ‘얼음산 명승이 우리 동쪽을 차지하고 [冰山名勝擅吾東]’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옛날에 太一殼이 있었고 또 冰山寺가 있었는데 어느 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成化 戊戌년에 太一殼은 태안군으로 옮기고 萬曆 壬辰년에 冰山寺 또한 전쟁으로 불탔다. 혹시 하늘이
또한 아끼고 숨겼다가 오늘 서원의 터를 삼으려고 했던 것일까. 이때에 相國 李光俊이 때를 잃지 않으려고
이 늙은이에게 묻고 조정에 주달하였으나 터를 잡지는 않았으니 서원을 옮길 의논을 결정한 것은 실은
萬曆 庚子년이다. 이때는 새로 큰 난리를 겪은 터라 백성과 물자가 해지고 없어서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 일을 맡은 사람이 이에 옛 재료와 남은 기와를 수습하여 편의에 따라 일을 진행하여 다음 해인
辛丑년에 공사를 마쳤다. 祠宇와 講堂 및 東·西齋와 正門樓, 童蒙齋, 公需廳까지 총 30여 칸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자 낡아서 또한 비에 상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우리 李延橚 공이 相國의
손자 肯堂의 뜻으로, 重建하는 책임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겨 朴㙉 씨와 함께 일을 시작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鄕老儒生이 힘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邑宰 또한 자기 녹봉을 덜어서 도왔다. 丁亥년 봄에 廟宇가
완성되고, 戊子년 가을에 書樓가 우뚝 섰으며, 甲午년에 廚舍를 고치고, 壬寅년에 講堂을 세우고 전후가 모두
십수 년이다.
대저 그런 후에야 전에 좁던 것이 크게 되며 누추하던 것이 높게 되며, 제단이 좁던 것이 오르내리고 이리저리
활동해도 남을 지경이 되니 장소가 좁고 누추한 근심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아아! 그 성대함이여.
李公은 永陽사람으로 字는 子長이다. 斯文의 중요한 일에 진실로 집안 대대로 淵源을 얻었고, 또 그 가슴 속에
허다한 계획이 있었으니, 이 學舍의 규모를 보니 또한 그 끝이나마 엿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공이 지금 또 늙었고
그 뒤에 있는 자는 끝이 없다. 많은 後人들이 이공이 한 일을 보고 이 서원에 대해 옛것을 더욱 새롭게 하여
영원토록 잇는다면 이 고을 斯文의 소망이 혹 없지는 않을 것이다.
丙午년 4월 乙卯에 古隱 後學은 쓰노라.
유생들이 공부하는곳
숭덕사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나이든분들이 어떻게 오르내렸을고
사당은 문이 잠겨있어 못들어갔다 어느사당이나 위폐를 모시는 방법은 다 같으니까 상상으로만
사당뒤에도 돌로 층층이 쌓아 정비를 잘 해놓았다
공수청은 서원에서 쓰는 모든 물건을 보관하는 요즘 말하는 창고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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