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마늘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의성'이라는 이름이다. '의로운 성'이라 이름 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의성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 마을'이 있는곳이 의성이다. 사촌 마을의 이름은 중국의 사진리를
본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외가에서 태어남) 등이 이곳에서 태어 났으며,
이곳 사촌마을에서 태어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18명, 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31명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 난다고 하며, 신라시대 한 명, 조선시대 류성룡
그리고 한사람이 더 태어날 것이어서 마을 어른들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애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사촌마을은 풍수상 명당으로서 딱 하나가 부족했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으로 문필봉이 떡 버티고 서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서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오른쪽 지형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우백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를 위해 방풍림을 심었는데 지금 이 숲이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돼 있는 '사촌리 가로숲"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하여 '서림'이라 부른다. 방풍림은 주로 팽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가
대부분으로, 마을을 이룰때 심은 나무들이 이제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나무들로 자라, 길이 1km에 폭은 45m
정도의 숲길을 이루며 제방을 따라 산책하기에 좋은 숲길이 만들어 졌다.
[Daum백과] 의성 사촌마을
사촌마을이 기록에 나타난것은 1392년으로 안동 김씨인 김자첨이 안동의 희곡에서 이주해 오면서 부터이다.
오래된 마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집들이 별로 없다 그 이유는임진란때 의병을 일으킨 이 마을을
왜군들이 불태웠고, 구한말에는 명성황후 시해후 이곳에서 병신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을
불태우는 바람에 황폐화 되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사촌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은 1582년에 지은 만취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으로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김사원(1539∼1602)이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세운 건물이다. 만취당은
사랑채 격이지만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서 정자같은 느낌을 준다. 본채에는 사랑채가 따로 있는데, 규모가
매우 작다, 객을 맞을 별도의 만취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촌 김씨의 문화장소로 사용해 오며,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진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비온 후 쑤(숲)의 시냇물이 3일 이상 흐르고 모기가 들끓으면 마을의 기가 다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선조들이 일러준 숲에는 지금까지 큰비가 온 후에도 몇 날씩 물이 흘러내린 적이 없다.
경북 의성군 사촌에 있는 ‘가로숲’ 이야기 이다.
낙동강 지류인 미천(眉川) 북쪽에 넓은 들판이 동서로 길게 놓여있는 사촌은 들판 동쪽 산 밑에 있다.
이 숲이 없다면 서쪽이 트이게 되어 바람의 영향을 많이 입게 된다.
물길이 짧고 모래가 많아 비가 오면 많은 물이 한꺼번에 흐르고 금방 땅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어서, 물길도
보호하고 바람도 막을 숲이 필요했던 것이다.
뒷산에서 시작해 마을 서쪽을 흐르는 물길의 둑에 느티나무와 상수리로 우거진 이 숲은 들판을 ‘가로질러’ 있어
‘가로숲’이라 하며 서쪽에 있다 하여 서림(西林)으로도 불린다.
숲은 어머니의 마음
숲 속에는
젖 향기가 느껴집니다
젖 향기는 태초의 그리움입니다
숲 속에 있노라면
요람 같은 평화로움이
나를 취하게 합니다
풀내음 속에 어머니의 박가 분이 생각납니다
하얀 모시치마 저고리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머니 냄새
숲은 어머니처럼
언제나 너그럽게 꽃을 키우고
새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숲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인자하고 따뜻합니다.
신혜림
숲에는 이렇게 정자가 마련되어 마을사람들의 휴식처로 사용하고 있다
후산정사(後山精舍)는 만취당 김사원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모여 춘추 제향을
올리던 재실이다. 이 건물은 1747년에 완성하여 사림의 공의로 봉안을 하고
백여 년 동안 제향 기능을 담당해 오다가 1868년에 헐렸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다시 재건한 건물이다. 솟을대문인 관선문(觀善門)을
통과하면 곧장 거대한 회회나무와 향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시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후산정사는 단아한
모습으로 중앙을 빛내며 서있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는
후산사(後山祠)가 있다. 이밖에 부속건물 몇 동과 배롱나무를 심은
후원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의성군 단촌면에서 점곡면 면소재지를 찾아가는 길에 있다.
그러나 면사무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눈길을 끄는 무성한 가로 숲길이
나오는데 이 숲이 사촌마을의 수문장 역할을 한다. 후산정사는
이 사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불교넷에서
철폐되었다가 1991년 다시지은 만취 후산정사
만취당과 600년된 향나무를 보기위해서는 되돌아가야되는데
다음기회에 보기로하고 그냥패스하고 고운사로 향한다
등운산 고은사 일주문
일주문지나 사찰로 들어가는 술길이 운치가 있다
불상높이56cm 무릎폭47cm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측 비문화재다
옆칸에는 불망비가 있는데 철비(鐵碑)이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신라 정치가 최치원은 크게 상심하였다. 혼자 힘으로 난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옛 조문국 땅
고운사에 은둔해 도를 닦았다. 개울을 가로질러 정자를 짓고 가허루(駕虛樓)라 명하고 그 옆에 또 집을 지어
우화루(羽化樓)라 명했다. '텅 빔을 멍에 삼고, 신선이 되리라'는 뜻이다. 훗날 가허루는 가운루(駕雲樓)로 개명됐다.
고운사 가는 숲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특히나 안개 낀 이 봄날 아침에는.
그 우화루 정면에는 고운사 현판이 붙어 있다. 가로로 '孤雲寺'라 쓰고 왼쪽에 세로로 壬寅仲夏李銖澈十歲書라 적었다.
1902년 임인년 여름 이수철이 열 살 때 썼다는 뜻이다.
열 살! 우두산인(牛頭山人)이라 불렸던 서예 신동 이수철(1893~1909)은 열일곱에 요절해 우두산에 묻혔다.
이종해(李鍾海)라고도 한다. 고운사 모선암 현판도 그 작품이다. 그런데 허망타, 요절한 천재 소년은 흔적도 유택도
남아 있지 않다
최치원의 호를따 고운사라했다고 함
대웅전과 대웅보전 大雄殿 大雄寶殿
우리나라 사찰에는 여러채의 크고작은 불전있고 그 불전들에는 각각의 이름이 붙어있다.
이와 같은 이름들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모셔진
불 · 보살들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불전의 이름을 보면 그 불전에 어떤 불 · 보살이
모셔저있는지 알수 있다. 그 중에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며,
대웅보전이란 대웅전의 격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며,이러한 대웅전이나 대웅보전은
가장중요한 불전이며 사찰경내의 중심에 위치한다.
대웅이란 석가모니불에 대한 수많은 존칭가운데 하나이다
대웅전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협시脇侍보살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협시脇侍보살
사찰의 각 불전에 중심이되는 본존불을 모시고 그 좌우에는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모신다. 협시보살은 여러 부처님들의 곁에서 중생구제를
보좌하면서 시중을 드는 보살이라는 뜻이다.협시보살의 특징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화려한 장식을 두르는등 인간적인면모를 띄고있다.-
부처님은 머리에 모자를 쓰는 경우가 없음
대웅보전
주불로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협시불로 모신다. 이때 각 부처님 좌우에 다시 협시보살을 모실수도 있다.
부처님 좌우에 협시로 보살을 배치하는 것보다는 부처를 협시로 모시는 것은 훨씬 격
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시대에 따라 조금다르게 적용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에 위치한 절 고운사는 산이름과 어울리게 절의 이름의 의미도
높이뜬구름이라는 뜻을 지닌 고운사이다. 신라시대에 의상이 창건한 고운사는 깊은산중에 있는
절이라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니만큼 공부하러 스님들이 많이 찾는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운사에
와서 글아는체 하지말라'라는 속설이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만세문을 들어서면 연수전이 나온다
약사전은 약사여래불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입니다
약사전 맞은편에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명부전은 사후에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를 형상화한 곳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명의 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죽어서 저승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묻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적묵당은 스님들의 수행정진하는 곳이다 조용조용 지나간다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으로 높이는 3.33m[10尺]이다. 현재 고운사 경내 동쪽 산기
슭에 서 있다.
이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올린 형식으로 기단부 석재 일부가 결실되었으며, 아래 기단에
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와 안기둥 1개 씩을 모각(模刻)했고, 덮개돌은 부연과 괴임
두 단을 각출했다. 탑의 몸돌은 모두 모서리 기둥만을 본떠 새겼고, 지붕돌은 제4지붕돌
에서 4단 받침 제2, 제3지붕돌에서는 3단 받침을 각출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간소화 시키고
있다. 제3지붕돌 위에서는 네모난 형의 노반(露盤)을 보존하고 있으며, 아래 기단면석에
창모양의 안상(眼象. 靈氣窓)을 새겼을 뿐 단조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일제시대에는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고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사세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간의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해방이후 쇄락하여 많은 사찰재산이 망실되고 지금은 이십여명
대중이 상주하는 교구본사로는 작은 규모의 사찰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가풍을 자랑하는 고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비롯한 고운사의 모든
대중들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참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부처님전에 발원을 멈추지 않는다.<고운사 홈페이지에서>
Bach / Concerto for 4 Pianos and Orchestra in A minor BWV 1065 (I ~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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