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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군위 제2 석굴암과 김수환 추기경 생가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보다 연대가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2.18m, 왼쪽 보살상은 1.8m, 오른쪽 보살상은 1.92m이다.

 

가운데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예로써 의의가 크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묵향님글에서

 

 

 

석굴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중국 당나라의 석굴양식을 보이고 있어

한국으로 전래된 과정으로 보아 중요한 유적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이 석굴의 조영은 700년 전후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군위에는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서 만들어진 삼존석굴이 있다. 이 석굴은 석굴암보다 발견이 늦어져

       ‘제2 석굴암’이라 불린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에 거대한 바위산 절벽을 이룬 곳에

       절벽허리 20m 높이에 남으로 향한 둥근 천연동굴에 아미타불,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의 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석굴암의 선행양식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국보 제109호로 지정됐다. 신라 소지왕 15년(493년)

      극달화상이 창건한 이 삼존불상은 고구려에서 전해진 신라불교가 팔공산 자락에서 꽃피워지고 신라 왕도

      (王都) 경주로 전해져 결실을 맺었음을 잘 말해 준다. 엄숙한 기품이 느껴지는 삼존석굴을 참배하며 불교

      유물을 살펴보고 수려한 주위 경관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봄직하다.

     제2석굴암은 1927년에 발견되고 1962년에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지상으로부터 약 6미터 높이의 천연적인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에 안치된

     이 석불은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높이 2.88미터,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

     1.8미터, 왼쪽에는 대세지보살이 높이 1.8미터이다.  이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 석굴암 석굴보다 100년 전에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1927년 11월 20일 이곳 한밤 마을에 살던 최두환이라는 사람이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소나무에 밧줄을 매고 절벽을 내려가 수직으로 뻗은 절벽 나무 틈에서 석굴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나무를 쳐내고 수억겁 쌓인 낙엽을 헤치자

삼존석굴(三尊石窟)이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전합니다
이 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이상을 앞서 만들어진 석굴 신앙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5세기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고승 아도화상이 수도 정진한 굴이 바로 군위 삼존석굴이라고 합니다.
동그랗게 파인 자연 석굴의 안쪽에 한 분의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묵향님글에서

                          여기바위도 학소대라고 하네요

 

                        해탈교 건너기전의 소나무숲

                                읍청루

 

 

                           양산서원은 굳게 닫혀있어 밖에서만 봤는데 개축한자가 얼마 않되는듯

                             양산서원앞의 왕버드나무

 

 

척서정은 모르고 패스했기에 가저온 사진입니다 

 

척서정(陟西亭)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경재의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척서정


경재는 문하사인(門下舍人:고려 종4품 벼슬로 사인(舍人)으로도 불림)으로 근무하다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고향인 부계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했다.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온 그는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면서 다시는 조정에 나갈 뜻이 없었다.

거처하는 곳에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1392년 7월4일(음력)에 병을 얻었으나 어버이 마음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달 17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자 가족이 만류했다.

그러나 "내가 밤중 꿈 속에서 태조 왕건을 만났소.

오늘이 돌아갈 날이오"라 하고 관복을 갖추어 입고

 사당에 배알한 다음 부친 진사공(進士公) 홍민구 침소에 들어가 절한 뒤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를 편 뒤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는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臣與國偕亡, 死亦何言)"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소에 들어 조용히 운명했다.

 그날 오전 사시(巳時)였고, '열혈청년(熱血靑年)'의 꽃다운 나이 27세 때였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의 제2석굴암 위쪽 계곡 옆에 자리한 척서정(陟西亭)은

후손들이 경재의 절의정신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이다.

조병유가 지은 척서정기문에 의하면, '수산(首山)과 양산(陽山)의 중간 지점에

예전에는 경재를 기리는 사당을 지어 제향을 올렸으나 없어지고,

 그 유허지에 척서정을 지어 절의를 추모하고 있다'고 전한다.

척서정사진과 글은 직접 보지를 못해서 복사한 글입니다

 

                  군위군 효령면 금매리 산15~16일대 김수환 추기경 생가를 가면서 보니 왜가리 군무가보여

                  들려봤다 전망대에서는 너무 멀어 줌으로 땡겨도 이정도 밖에 않된다

 

      왜가리는 의성군의 군조이며 길조입니다

      이곳에서 약100년전부터 매년 2월 중순경~8월말까지 집단으로 서식해

      오고 있습니다. 흰색 왜가리가 2/3, 회색 왜가리가 1/3분포하는데 회색

      왜가리가 흰색 왜가리보다 1개월 빨리 왔다가 먼저 떠나며 황새목

      왜가리과에 속하는 새로서 온몸이 희고 어깨쭉지와 날개깃이 검으며 풍요를

      상징하는 길조라고 합니다. 최고 많이 왔을 때는 2000여마리 정도였으나

      왜가리 먹이인 물고기, 개구리 등이 줄어들어 지금은 800여마리 정도 서식합니다.
      왜가리가 서식하는 마을앞산에는 평소 10여마리가 앉아있으나 만약에

      앞산에 100여마리 정도 무리 지어 앉아있으면 3일 내에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답니다

 

 

                    왜가리 서식지를 잠시 둘러보고 김수환 추기경 생가로 이동

                      조성사업을 한다고 파해처저 올라가는것도 그렇고 너무 초라함에 놀랐다

추기경의 집안은 원래 충남 논산군 연산의 양반 가문으로 충청도 땅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초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순교자의 집안이다.

조부이신 김요안 공은 광산 김씨로 병인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옥중 순교했고, 조모 강말손 여사는 남편 순교 후에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갖은 고생에도 교우들의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하였으며,

당시 유복자로 추기경의 부친이신 영석(요셉)이 태어났다. 

 

김영석은 경상도 사목을 담당했던 김보록 신부(대구교구 설립자)의

일을 도왔으며 동학난을 만나 칠곡의 장자동 옹기굴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뮈뗄, 김보록 두 신부의 중매로 대구의 유명한 신자 집안인

달성 서씨 서용서 회장의 딸 중하(마르띠나)와 혼인을 하였다.

이분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이다.

 

그 후 왜관 평장목, 김천 지대골의 옹기굴, 대구 남산동을 전전하던

추기경의 부모는 칠곡 산나무골과 선산을 거쳐 1922년 4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슬하에는 모두 6남 2녀를 두었는데 군위에 들어

해인 1922년 5월 8일 (음력)에 낳은 막내가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추기경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추기경이 8살 되던 해 아버지는 해수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으며

어려운 형편에서도 이 초가에서 공소를 열었다.

 

추기경은 군위 보통학교를 마치고 지금 대구 가톨릭대의 전신인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형인 동한(카를로)

신부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신앙과 꿈을 키웠으며,

전에 가끔 이 집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 초가(군위군 군위읍 용대리 238번지)는 2009년 2월 16일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5살 되던 해 이사와 군위보통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신앙의 꿈을 키우며 사셨던 곳으로

그동안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허물어져가는 것을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2006년 복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 추기경으로서 생전 종교의 벽을 넘어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각막을 기증하면서

사랑과 나눔, 희생과 봉사의 생활철학을 남겨놓으신 이 시대의 표상이며

“사랑과 평화와 관용을 끊임없이 이야기 하였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 나는 바보다.”라고

 하신 겸손의 말씀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경북 군위군 용대리에 있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 복원이 본격화됩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최근 장영일 신부를 `김수환 추기경 생가 성역화 담당`으로 임명하고,

       내년 2월이나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6년 말까지 완공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2만 6천여 제곱미터 부지에 조성될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에는 추모전시관과

      조각공원, 청소년 수련원 등을 들어설 예정입니다.
      대구대교구는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5살부터 7년동안 살았던 추기경의 생가와 함께

      추기경의 부친이 옹기를 구웠던 옹기굴을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추모전시관은 추기경 사진과 영상자료를 관람할 수 있도록 꾸미고, 조각공원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해 기도 공간으로 꾸밀 계획입니다. 2016년 말에 완공한다는데 이제 시작이다
      교구는 이와함께 폐교인 용대초등학교 건물을 청소년 수련원으로 리모델링 할 방침입니다. 
                                 

 


 

   9월이 오면(Come September ) - Billy Vaug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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