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국보 제 306호와 30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그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한 개인이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삼국유사>가 갖는 위대함은 일연스님이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어 채집한 우리 고대사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이기 때문이다. 그 숭고한 역사서를 집필한 곳이 바로 인각사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곳을 일연스님은 생의 마지막 안거지로
삼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백여 편의 불교 서적을 집필하고 구산문도회를 열며 역사에 길이 빛날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일연스님은 78세에 보각국사의 칭호를 얻고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내려왔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인각사에서 한평생 수집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꽃피워 후세에게 옛적의 문화를
향유하도록 했다. 그 바탕 위에 우리의 미래 또한 찬란히 열매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에 위치한 인각사는 산속 깊이 숨어 있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큰 도로변
평지에 있어 길을 가다 문득 들어가 볼 수 있다.
지난번에 다녀온 달성 인흥사지에보면 삼국유사는 인흥사에서 기초를했고 인각사에서 완성을 한것 같습니다
불상은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밭에 위치한 미륵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다.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우견편단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은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촉지인(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인각사의 창건과 관련한 중요한 불상이다.
인각사 경내를 둘러보노라면 스님의 공적비와 부도 등 곳곳에서 일연스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스님의 생애를 담은 보각국사비는 오랜 풍파를 겪은 나머지 마모가 심해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스님의 비는 훼손을 겪다가 탄생 800주년을 맞아 복원되었다. 인각사 국사전에는 일연스님의 모습을
담은 진영이 있고, 일연선사생애관에는 일연스님 관련 자료와 인각사에서 출토된 진귀한 유물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생애관 앞에 세워진 <일연찬가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보각국사정조지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유물들을 둘러보는 여행을 했다.
비석의재질은 점암판이며,지금 비록 깨어져 본모습을 짐작키 힘들지만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스님이 입적한지 6년 만인 충렬왕 21년에 세워져는데, 당대의 문장가 민지가 글짓고
, 글씨는 일연스님의 제자인 죽허가 칙명을 받고 명필 왕희지의 행서를 모았고,
또 다른 제자 청진이 세웠다고 한다.
비의 앞면에는 일연스님의 행적과 추모의 정을 담았고, 뒷편의 음기에는 비를 세운
경위와 다비식 때의 영험담과 더불어 일연스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불신과 배(舟) 모양의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적당히 살이 오른 얼굴은 원만한
인상이며, 두툼하게 처리한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흐르고 있다. 특히 뺨을 솟아나게 처리하고 눈두덩을
불룩하게 처리한 데 비해 코와 입을 작게 하고 귀를 길게 처리한 점 등을 볼 때 잘 묘사된 불상이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평행된 옷주름이 촘촘하게 물 흐르듯 새겨져 있으며, U자형으로 넓게 트인
가슴에는 속옷과 띠매듭이 드러나고 있다. 무릎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옷주름은 양팔뚝을
감싸고 흘러내린 대의(大衣)의 주름과 겹쳐져 무릎 부근에서 크게 3단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 모양은 오른손으로 촉지인(觸地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였으며,
손 위에는 조그마한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스님 어머니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윗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몸도 8각으로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이름이 있고,
뒷면에는 문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의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느리게 들려 있고, 낙수면은 급한 편이며 지붕선
끝부분에 꽃장식이 달려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려져 있다.
탑비는 국사의 제자인 법진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으며,
글씨는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지금은 비의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다행히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있다.
비문에 의하면 비를 세운 시기가 충렬왕 21년(1295)이므로, 부도탑의 건립 역시 일연이 입적한
해인 1289년에서 1295년 사이의 일로 짐작된다.
현재 인각사 오른쪽에는 오래된석재들이 발굴되어 있다 인각사를 정비하면서출토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석재가 대부분인데 이는 중요 부재만을 모아놓아 그렇다함
창건당시에는 지금의 인각사 동쪽에 절터가 있었으며 고려시대 후기로 오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왔으며 이는 현장에서 나온 유물로 알수 이다고함 남아있는 부재를보면 연화문석등대석
심초석 방형초석 원형초석 기단석등이며 2005년 극락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심초석이 확인
되면서 통일신라 시대에는 목탑이 있었던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함
보각국사 정조지탑 기단부 탁본
인각사터에서 발굴된 유물들입니다
"학소대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건너편에 위치한 바위절벽이다.
고로면 화북리에서 석산리로 가는 길에 보면 인각사 맞은 편에 바위절벽이 있으며
그 아래로 위천이 흐르고 있는 병풍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난다. 이곳이 예전에
학들이 둥지를 틀고 서식했다고 하여 학소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학소대
좌우로는 송림이 우거진 석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음풍영월하던 곳으로 그 아래는 맑고 깊은 물이 흐르고 있다. 학소대
앞에는 기린을 닮았다는 화산의 뿔에 해당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고 인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인각사가 있다. 이 근처에는 인각사와 학소대 뒤를 잇는 아미산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위천은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인각사에서 나와 몇군데 더 들려보려 했으나
거창에서 지인이 만나자는 전갈이와 거창에 갔다가 가야문화권의 고령을 몇군데 들려보려한다
사랑하는 블친님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납니다
건강하게 잘 계십시오 다음주말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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