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지도를 두 번째 바꾸다]
선산이 양반 고을은 양반 고을인 모양이다. 온전히 체신 지키면서 살아갈 마땅한 곳 없어 삶터 찾아 헤매던
안동 양반들이 선산 땅을 알아보고 영주지로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안동 양반들이 찾아든 양반 고을 선산 땅
한편에서는 공업단지를 만든다고 붙박이로 살던 양반마을 사람들을 통째로 쫓아내는 일도 있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타의에 의해 강제로 이사 간 사례들이야 많지만 여러 마을이 한꺼번에
강제로 철거되고 쫓겨난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구미에 국가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핏줄과 땅줄로 똘똘 뭉쳐 살던 다섯 개의 자연 촌락이 ‘국가 대사’ 앞에
맥 한번 못 추고 쫓겨 나간 일이 1973년에 벌어졌다. 쫓겨난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기도 하였지만 260세대는
집단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 마을이 지금의 구미시 신평2동 마을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에 선산이 안동 임하댐 수몰 지역에서 쫓겨난 안동 양반 수몰민들을 받아들여 마을 하나를 만들어 주는
일이 벌어졌다.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가 바로 그 마을이다. 집도 절도 없던 야산에 새로 마을을 만들고 이름도
새로 지어 주었으니, 어느 향토사학자의 말대로 ‘구미 지도를 바꾼’ 일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버들나무, 또 물가에 자리 잡다]
안동 임하댐 수몰 지역에 편입되어 이주한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은 물가에 삶터를 자리 잡았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이다. 그러나 ‘버들은 물가에 살아야’ 한다고 또 다시 물가를 찾아 터를 잡았다. 전주유씨의 유(柳)가
버들 류 자이니 ‘버들은 물가에 살아야’ 함이 마땅하지만 이제 버들이 물에 잠겨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이 새 삶터로 자리 잡은 일선리는 낙동강 굽이치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선산읍에서
상주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가 해평·의성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일선리를 찾아야 한다. 갈림길 있는
곳이 행정구역상 선산읍 생곡리이다. 여기서 해평·의성으로 가는 길을 골라잡아 잠시 가다 보면 일선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 지점에 일선리로 가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오른편으로 꺾어 1㎞를 내달리면 낙동강변 언덕에 똬리를 튼 일선리를 만날 수 있다. 대구에서 올라치면
천평에서 상주로 향하는 낙동강변 국도를 따라 오면 대로변에서 이 마을을 만난다.
본래 일선리 땅은 마을도 아니고 논밭도 아니었다. 도리사를 품에 안은 태조산 뒤편에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낙동강에 닿을 즈음에 자잘하게 널려 퍼진 구릉 산지였다. 이곳은 밤이면 흙을 퍼 던지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해친다는 ‘개골강지’가 출몰하는 외지고 무서운 산골이었다. 그러나 전통 마을 입지 요건의
첫 번째인 배산임수의 터전이요, 인근에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하천 부지가 있어서 은근히 양반들에게
매력을 주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등과 급제하는 좋은 땅이라는, 용하다고 소문난 풍수 말에 대대로
학문을 숭상해 온 안동 양반들이 심사숙고하였던 곳이 지금의 일선리이다.
일선리가 자리 잡은 마을 터는 2만 평은 족히 된다. 집도 절도 없던 산골짜기를 정부가 중장비로 터를
다져 마련한 곳이다. 지금의 마을 양편 가장자리는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었으나 양 봉우리는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워서 평평하게 다져 지금처럼 만든 것이다. 지금 이 마을에는 약 80여 집이 모여 산다.
이 중 전주유씨가 대략 70집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타성들이다. 타성 5~6집도 임하댐 때문에 안동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다. 나머지 타성들은 마을이 만들어진 후에 이사 온 사람들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산에 자리 잡은 안동 양반들은 누구인가]
안동 양반 전주유씨들은 누구인가. 안동에 살아 온 전주유씨들은 1500년대 초에 처음 안동에 들어온다.
안동에 처음 들어 온 전주유씨는 유성이라는 사람이다. 당시 유성은 안동과 가까운 의성에 살고 있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안동의 명문으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의성김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안동 땅을 밟는다.
안동 내앞[川前]에 자리 잡고 살면서 5부자가 등과하여 명문 중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한 청계공 김진의
사위가 되어 안동 임동면 무실[水谷]에 입향한 것이다. 무실은 처가인 내앞과 20여 리도 채 안 되는 지척에
있다. 명문가의 사위가 된 유성이 당대의 빼어난 동량임에 틀림없었지만 불행히도 일찍 죽고 만다.
유성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호가 기봉(岐峰)인 유복기와 호가 묵계(墨溪)인 유복립이 그들이다. 유성의
두 아들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유명한 외삼촌 학봉 김성일 밑에서 자라고 공부하였다. 그 후
장남 유기봉은 임진왜란 때 외삼촌 김성일과 함께 여강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일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전쟁 중에는 의병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8폭짜리 전국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나중에 정3품인
예빈시정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기양서당을 짓고 학문을 닦으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차남
유복립도 외삼촌 김성일 휘하에서 임진왜란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유복립은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김천일 장군 등과 함께 자결하고 만다. 그 충성스러움으로 나중에
충신으로 정려되어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유성의 아들 중 차남이 후계 없이 전장에서 자결하였기에 남은 자손은 장남뿐이었다. 그래서 안동 땅
전주유씨들은 대부분 유복기의 자손들인 셈이다. 다만 무실과 이웃한 박실에는 입향 시조인 유성의
동생이 마을을 일구어 ‘수남위파’라는 종파를 이루어 살았다. 유기봉은 다복하게도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 아들들을 정점으로 하는 지파들이 무실 인근과 멀리는 청송 진보와 부남에까지 분가하여 새로이
터를 잡고 마을을 일구고 살면서 박실 수남위파와 함께 무실 인근 지역을 전주유씨들의 텃밭으로
일구었다. 과히 향촌을 지배한 호족 세력이 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람들은 일선리를 문화재 단지라고 부른다. 무려 10여 건의 지정문화재가 즐비하고 이 마을 79집 중에
무려 70여 집이 무실유씨이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전후사정 모르고 찾아오는 이들이야 잘 구획된
마을 환경에 고색창연한 옛 건축물이 한 군데 모여 있으니 문화재 단지로 손색없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선리 안동 양반들이 살던 옛터와 비교하면 물속에 잠길 뻔한 문화재급 건물 몇 채만 겨우
수습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500년 정취를 몸에 담아 온 이곳 양반들에겐 반눈에도 찰 리 없다.
우선 일선리 안동 양반들은 그 많던 무실유씨 안동 양반들 중 일부만 여기에 온 것을 못내 아쉬워한다.
무실유씨의 모태인 무실에서 온 31집과 이웃 박실에서 온 29집, 한들에서 온 10집을 합해 한 70집
정도가 모두이다. 그 옛날 무실에만 무실유씨들이 86집이나 살았으니 성에 찰 리 없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그나마 박실마을 전주유씨를 이끌었던 수남위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1호)과 용와 종택,
침간정(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맛재(마령)를 대표하는 호고와 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7호), 무실마을의 ‘작은집’인 근암 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과 임하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호)이 이곳에 왔다. 이밖에도 학문과 예를 숭상해 온 전주유씨들을
표상해 해 주는 만령초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삼가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호),
동암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 대야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 등의 누정들이
이곳에 왔으니 체면은 세운 셈이다. 하나같이 조선시대 안동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 살림집과 누정 건물이려니와 안동 문화를 선산에 옮겨 심은 격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문이 열려 들어간집인데 아마 빈집인것 같다
용와종택과 아래 침간정
이집도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근년에 빈집이된듯
마을앞에 흐르는 낙동강과 안산
수남위 종택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한분이 계셔서 양해를 구하고 총와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두들마을 바래미마을 하회마을 양동마을 일선리의 전주유씨등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한시간이 훌쩍넘겼다
나도 시간이 넉넉치 않고 그분도 부모님 뵈러 주말에 왔는데 풀도 뽑아야하고 미안해서 슬며시 일어나
작별인사를 한다
그래도 수남위 종택은 후손이 살고 있고 아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관리를 하기에 참깨끗하고 정리가 잘돼있다
부모님 두분만 사시는것 같은데 큰집 관리하기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든다
후손이 살고 있으며 부모님을뵈러온 아들이 있어 긴얘기를 할 수 있었다
아래마당에는 벌통이 즐비하다 후손이 양봉을하나보다
호고와 종택 안채 들어갈 수 없어서 밖에서 겉모습만
망천동 임당댁은 일부만 담았습니다
뒤로는 높은산이 있고 양쪽으로는 낮은산이 둘러처저 있고
우측 낮은산
정중앙뒷산과 아래의 사진처럼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넘어에는 안산이 자리잡고 내눈에는 명당이다
집집마다 적게는 200평 많게는 500평의 집터를 추첨으로 분양받고, 농사 지을 논 12마지기씩을 불하받기로 하면서
안동 양반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일선리로 이사 올 때 무실유씨 양반집 할머니가 지었다는 「사향가」의
노래 말에서 안동 양반들의 체통과 타향살이에 대한 각오를 속속들이 읽을 수 있다. 한 향토사학자가 적어 놓은
것을 여기에 옮겨 보자.
단지 단지 숱한 단지/ 어디가서 사드라도/ 유가((柳家) 본색 잃지 말고/ 제2고향 건설하여/자손 유념 또 할세라/
(중략) 나라에 주선으로/ 땅 넓고 물 맑은 땅/ 선산 해평 명기(名基) 잡아/ 낙동강 칠백리에/ 산 넘고 물 건너니/
고향은 아득하다/ 굽이굽이 다리 놓여/ 우리 살 곳 여기로다/ (중략) 삼촌의 우리 친척/ 형제같이 합심하고/
서로 동정 아껴 가며/ 무실 한들 박실이니/ 다 같은 자손으로 허물 말고 기탄없이/ 일심동체 결의하여/
보람차게 살아보세/ (중략) 서로 항상 조심하고/ 타향에 가서라도 /안동 양반 양반이라/호평 듣고 잘 삽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일선리에서 도개면 신곡리가 얼마 않되는것 같아 신곡리 문수사 궁기동 석불을 보러 떠난다
이문화재를 보기위해서 골짜기 꾸불꾸불 어려운길을 찾아서 왔다. 문수사 극락보전
Honesty - Billy J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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