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는 약 7m이며, 다리 밑에는 연화(蓮華)를 새긴 대(臺)를 갖추었고, 머리 위는 별석(別石)으로 갓 모양을
갖추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일부가 파괴되어 원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머리카락은 아래로 내려져 있고,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는 소발(素髮)에 둥글고 충만한 얼굴은 거의 비만형에 가깝다.
큰 귀는 양 어깨에 닿아 있고, 가늘게 뜬 눈 위에 간격을 두고 새겨진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평평한 코의
윤곽선과 연결되었으며, 작고 굳게 다문 입술 밑에는 주름진 아래턱을 표현하여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 두 귀는 어깨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수인은 두 손을 가슴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엄지와 소지를 대고 있고, 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으나 표현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얇게
밀착되어 어깨 아래로 풍만한 육체의 굴곡선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얇은 천의(天衣) 안에서 노출되어 상당히
회화적인 면을 강조한 듯하다.
가슴 부위를 약간 노출한 듯한 천의의 선은 곱게 U자선을 이루었고, 발끝은 연화대(蓮華臺)에 좌우로
약간 벌리고 서 있는데, 풍만한 각선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의습선은 대체로 형식적으로 처리한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하반신에 표현된 옷주름은 다리의 굴곡을 따라 형식화된 의문(衣文)을 반복하여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복련(覆蓮)의 대좌 위에 새겨진 두 발은 특이하게 발끝이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표현하였다. 연화대는 중앙 앞면의
연화판(蓮華瓣)을 크게 조각하였고, 좌우로 돌아가면서 차츰 작게 조각하는 등 상당히 회화적인 데 치중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위 면이 고르지 못하고 균열과 박락이 심하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암벽 위에는
별도의 판석을 얹어 불두를 덮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야외 불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형태이며,
불상은 바위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율동적인 느낌을 주지만 자세는
정제되지 않고 부자연스럽다.
어깨와 팔, 다리 할 것 없이 몸 전체가 풍만하고, 특히 하반신을 둔중하고 비대하게 강조하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자비스러운 모습이며, 시각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커다란 불상이다. 일반적으로 고려불(高麗佛)에서 비슷한 유형을 찾을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변에 기와조각과 탑편(塔片)이 나타나, 옛날에는 근처에 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에 관한 문헌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조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어 10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바위가 균열이가서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상황 위험 천만이다
마애란 자연암석을 깍아 그위에 문자나 화상등의 부조나 선각을 조각한 것을 의미하며 여래는 부처를
모셨던 석가모니를 뜻한 것으로 암벽을 깍아 조각한 서있는 불상을 마애여래 입상이라하고 앉아있는
모습을 마애여래 좌상이라한다
마애사라는 조그마한 암자는 굳게 닫혀있고 너무 조용하다
태조산 도리사라는 일주문이 몇km전방에 있습니다
일주문을지나 느티나무 턴널이 참 시원하게 보입니다 여기서도 한참달려 제1주차장에서 파킹할까말까
망설이다 그냥 더오르기로 했지요 가파른 경사길을 계속오르면 또하나주차장 또으르면 또 주차장 날은
더운데 언덕을 걸어오르기도 그렇고 주차장을 몇번지나고 마지막인가 싶어 주차 했는데 차한대가 앵하며
오르는데 그차는 어찌알고 마지막 주차장에 파킹을 하네요 그래도 조금 걸어서 도리사 안내판을 접합니다
도리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440년(눌지왕 24)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고 있음을 보고 절을 지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도리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최초의 절이라 하며 원래의 절터는 태조산(太祖山) 기슭에
있는 옛 절터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 조선 중반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677년(숙종 3)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1729년(영조 5) 대인(大仁)이 아미타불상을 개금하여 인근의
금당암(金堂庵)으로 옮겨 봉안하고 도리사로 개칭하였다.
전내 본건물의 중수(重修)·단청(丹靑)에 관계된 현판을 보면 「강우선산부동태조산도리사금당암중수기
(江右善山府東太祖山桃李寺金堂庵重修記)」 말미(末尾)에 ‘가경십이년무진팔월일(嘉慶十二年戊辰八月日)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1807년(순조 7)에 해당된다. 1823년(순조 23)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했다.
1876년(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고 1922년 칠성각을 건립했다.
「선산도리사법당중수기(善山桃李寺法堂重修記)」에는 ‘대청광서이년병자(大淸光緖二年丙子)’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876년(고종 13)이다. 「도리사중창기(桃李寺重創記)」에는 ‘불기이구오구년신미양월하완
(佛紀二九五九年辛未陽月下浣)’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30년에 해당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약 70년 간격으로 중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도리사의 본당의 기능을 하고 있으나 원래는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이며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법당 내에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법당의 판벽에 그려진 벽화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설선당은 강선과 참선을 승려와 일반 신도들이 수학정진하는 곳이다
큰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인듯
갖가지 소원을 적어 걸어놨는데 하나를 집어보면 남편에게 힘을 아들에게 건강을 딸에게 지혜를
나에게는 웃음을 ~~~~
아도화상
1977년 세존 사리탑을 해체복원하다가 금동육갑탑형태를 띤 사리구와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콩알만한 크기의 큰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중 가장 값어치 있는 사리로 평가되며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다 여기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종각앞에는 저런 수막새가 있는데 무슨 뜻에서 세웠을까?
소나무 숲에는 이렇게 의자들이 놓여 있는데 불교강좌를 하는 곳인가봅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직지사의 황악산이 보인다는데 날이 흐려서 ~~~
석탑은 현재 해체 복원작업중이다
보물 제470호. 높이 3.3m. 석탑은 극락전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양식을 달리하는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단면이 네모난 석탑은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서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相輪)을 겹겹이 올린 모습이다.바닥돌은 길고 큰 10장의 돌로
조립되었는데, 윗면에는 받침돌을 받치기 위해서1단의 네모진 굄이 새겨져 있다. 받침돌은 네
귀퉁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서 그 사이의 각 면마다 길고 네모난 널돌을 여러 장씩 세워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면석을 조성하였다. 면석의 널돌은 북쪽면만 7장이고, 다른 면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남쪽면 가운데에는 네모나면서위아래가 긴 문비(門扉)가 오목새김되어 있다.
받침돌의 덮개돌도 네 귀퉁이에 길고 넓으면서 얕은 돌을 놓은 뒤 그 사이를 각 면마다 3장의 돌로
채웠다. 윗면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평평하다.
[Daum백과] 구미 도리사 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탑신부는 3층으로, 각 층마다 10여 개의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마치 모전석탑(模塼石塔)처럼 보인다.
곧 1층 몸돌은 각 면마다 길고 네모난 돌을 3중으로 쌓아 만들었는데, 동쪽면은 15장의 돌로 이루어졌고,
남쪽면의 돌은 13장이다. 1층 몸돌 위의 지붕돌은 일반적인 석탑의 지붕인 지붕돌과 달라서 밑면의
받침이 없고, 윗면인 낙수면도 없으며, 전탑이나 모전석탑과 같이 윗면이 몇 단의 층단을 이루고 있다.
각 층단은 받침돌의 덮개돌처럼 네 귀퉁이에 길고 큰 돌을 놓고, 그 사이를 몇 장의 크고 긴 돌로 결구(結構)하였는데,
위에는 2단의 층단이 있다. 이 2층 층단은 동쪽면의 위아래층이 4장의 돌로 구성된데 반해, 남쪽면은 아래층이
5장, 윗층이 4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 몸돌은 각 면마다 길고 큰 돌을 2중으로 겹쳐 조성하였는데, 동쪽면은 7장의 돌로 구성되었지만
남쪽면의 돌은 8장이다. 남쪽면에는 가운데 부분에 2짝의 문비를 새긴 널돌을 끼웠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
크고 긴 돌을 놓고 그 사이의 각 면을 길고 네모난 돌로 메웠는데, 동쪽면은 2장의 돌로 되어 있고, 남쪽면에는
3장의 작은 돌이 보인다. 2층 지붕돌 위의 층단은 3단이다. 3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지붕돌 밑면에는 네모난 1단의 받침이 있고, 윗면인 낙수면에는 2단의 굄을 두고 상륜부를
올렸다. 머리장식인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돌기둥, 연꽃이 조각된 둥근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각각 놓여 있다.
이 석탑은 지붕돌 윗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고, 받침돌은 각 층마다 작은 돌을 겹쳐 결구하였다. 이러한
양식을 고려할 때, 이 석탑은 오히려 모전석탑 양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석탑을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고
일컫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건립 시기는 남쪽면 위아래에 조각된 문비 2짝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 각 부재를 다룬 수법
[Daum백과] 구미 도리사 석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느티나무는 온몸으로 돌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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