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리나라 3대 양반촌이면서 장원급제자가 특별히 많았던 마을이 있다.
최근 방송을 타면서 조금씩 유명세를 얻고 있는 칠곡 매원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왜관IC에서 북동쪽으로 2㎞ 거리에 매원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칠곡 매원마을 등을 일컬어 영남의 3대 양반마을이라고 한다.
매원마을은 4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6.25전만 해도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일하게 전통 기와집이 즐비하게 보이는 곳이
매원마을이었다고 한다.
매원마을은 원래부터 광주이씨가 개척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야로송씨와 벽진이씨가
살았다. 임진왜란 이후 이 마을에 광주이씨가 입향하면서부터 집성촌을 이루었다.
번성기(1905년)에는 400여 호에 달했지만 6.25 당시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현재는 고택 60여채를 포함해서 1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특히 광주이씨 입향조 이윤우의 후손 가운데 대과 장원급제자만 12명이나 배출된
문향이라 해서 일명 장원방(壯元坊)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을 동쪽 봉우리를
장원봉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또한 근대 인물로는 이수목, 이두석 선생 등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애국지사도 6명에 이른다.
사송헌은 박곡 이원록 선생을 추모하기위한 광주이씨 제실이다
지경당은 문이 굳게 잠겨있어 밖에서 몇장 담아봤다 건물이 낡아 보수를 안해서 볼성사납다
중방댁(中芳宅)
중방댁은 1860년에 건립된 상류주택으로 정침과 대문간채 일부가 남아 있다. 매원마을 해은고택
바로 앞집으로, 넓은 평지에 정침과 우익사`대문간채가 ‘ㄴ’자형으로 남아 있다. 대문간채 옆으로는
아래채, 아래채 전방에 부속채 1동이 있었으나 근년에 퇴락해 소실됐다.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1.5칸 규모의 ‘一’자형 집이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정지 2칸, 큰방 2통간,
대청 2칸, 아랫방 2칸을 배열하고 정지를 제외한 6칸 전방에는 툇마루를 갖췄다. 공간 구성을 보면
, 먼저 2칸 규모로 널찍한 부엌과 2칸을 통간으로 개조한 큰방이 있다. 큰방 뒤로 벽장은 창호와
벽체를 없애 넓혔고, 정지 상부에는 큰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이 2칸에 걸쳐 축조돼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깐 2통간 규모이며, 전면에 유리문을 달아 내부화했다.
오래된건물인데 아무런 표식이 없다
풍각댁(대원군 벼루사건)
풍각댁은 매원마을에서 삼천 석의 부잣집으로 영남 일원에 소문이 나 있었다. 부자인 만큼 인색하지 않았다.
누구든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식사 대접을 다 했다. 이래서 풍각댁 범절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주인은 이동형의 현손인 상림이었다.
상림의 집에는 수대를 내려온 보물인 벼루가 있었다. 먹물을 한번 적셔 편지를 한 장 정도는 쓸 수 있는
특이한 벼루였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대원군이 상림의 매제가 승지로 있을 때 수차 그 벼루를 가져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상림은 번번이 거절했다.
대원군이 과객 차림으로 직접 상림을 찾아와 마루에 앉자마자 민비에 대해 욕을 했다. 상림은 연유도
모르고 대원군과 동조해 욕을 하고 말았다. 보름쯤 지났을 무렵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상림을 붙잡아갔다.
그 후 상림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됐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헐리는 수모를 당하는
등 가세가 풍비박산했다고 한다.지금은 그자리에 한옥을지어 민박을 한다고함
매원마을을 나와 묵헌종택으로 가는데 왜관철교에서 집회를 하던 사람들이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로3길 13-5
광주이씨 인걸보니 매원마을 광주이씨와 연관이 있는것 같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일자형(一字形)의 사랑채와 n자형의 안채로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의
우측 후면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지형관계로 기단을 다소 높게 축조하였으며 자연석 덤벙 주초를놓고 각주를 세웠다.
홑집으로 가운데에 중문을 두지 않고 10칸이 연접되어 있는 특이한 평면을 하고 있는데 우측에는
큰사랑을 좌측에는 작은 사랑을 배치 하였다.
큰사랑은 2칸, 사랑방과 2칸 사랑마루로 구성하였으며 그 앞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좌측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를 설치 하였다. 아궁이가 설치된 탄은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후면은 막아 안채로
통할수 없게되어 있고 상부는 다락으로 꾸몄다.
작은 사랑은 좌로부터 1칸 반 규모의 책방과 반칸의 아궁이 그리고 작은 사랑마루, 작은방, 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으로의 출입은 배면으로 하게 되어 있다.
사랑마루의 배면에는 쌍여닫이 울거미널문을 설치하였는데 상.하의 문틀에는 가운데 설주를 닥았던 홈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원래 후면과 같은 형태의 쌍여닫이 울거미널문이 있었다 한다.. 3량가로 대량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는 간결한 구조이다.
아래 본채와 사당은 살림을하고 있어 들어가지 못해 빌려온사진임
안채는 나지막하게 조성한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2통간 안방과 3칸 대청을
정면에 두과 좌.우로 회첨시켜 방을 배치하였는데 좌측에는 부엌과 아랫방을, 우측에는 고방과
건너방, 부엌을 두어 n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3량가이며 제형판대공이 마룻대를 받고 있다.
뒤로는 사당이 있다
묵헌종택을 돌아보고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도착했는데 너무 조용해 입구에 파킹하고 조심스럽게 올라가본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13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네딕도회(Ordo Santi Benedicti)란 가톨릭 교회 내의 수도승 수도회들(Ordines monastici)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으로부터 1500 년 전 이태리 누르시아(Nursia)출신 성 베네딕도(St. Benedictus,480-547경)가
저술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 이하 RB)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聯合, Confederatio)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왜관수도원은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하나의 자치 수도원(Abbatia)으로
정식 명칭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으로 보통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또는 그냥 줄여서 왜관 수도원 이라 칭하며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는 베네딕도 성인의
두 직제자로서 왜관 수도원은 이 두 분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왜관 수도원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서 1952년 7월 6일에 현재의 왜관에서 설립이 되었습니다
1909년 두 명의 베네딕도회 수도자가 독일의 상트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서 서울로 파견되어
한국에서의 수도생활이 시작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도 의욕 있게 북한의 원산 인근의 덕원 수도원과
만주의 연길 수도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과 문화사업을 하였다. 한반도의 북측 지역에 널리 자리를 잡고
활동을 하였는데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공산주의 정권에 희생된다. 2009년 12월, 당시 희생된 성직자와
수도자를 대상으로 한 시복 소송을 시작하였다.1952년 7월 6일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있던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과 중국에 있던 베네딕도회 연길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월남하여 경상북도 왜관읍의
현재의 터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2013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 경기도 남양주시, 전라남도 화순군,
아메리카합중국 뉴저지에 분원이나 수도원이 있다. 아메리카합중국 뉴저지의 수도원은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2002년 1월 25일에 왜관 수도원에서 인수하여 대한민국인 수도자 8명이 파견되어 있다.
남양주의 성 요셉 수도원은 1998년 3월 19일에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2014년 3월 19일에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2006년 11월 1일에는 전라남도 화순군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위키백과에서
현재 140여 회원 중 70여명이 본원이 있는 왜관을 중심으로 남·여 중·고등학교 등 교육사업, 출판업,
인쇄업, 유리 화공예실, 시청각 연구회, 목공소, 농장경영, 금속 공예실, 양로원 등의 운영과
칠곡 지역에 있는 왜관, 석전, 낙산, 약목, 신동 성당과 대구 대명성당 등 여섯 곳의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나머지 70여 회원은 서울·부산·대구·남양주·화순 및 미국 뉴저지 등지에 분원 및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왜관수도원에서는 순심중학교, 순심여자중학교, 순심고등학교, 순심여자고등학교 등 교육 사업을
비롯하여 분도출판사, 분도인쇄소, 분도유리 화공예실, 분도시청각연구회, 분도목공소, 분도농장,
분도금속공예실, 분도노인마을(양로원), 피정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칠곡군 내에 있는 왜관,
석전, 낙산, 약목, 신동 성당과 대구 대명성당 등 여섯 곳에 수도원 소속 신부가 본당 사목을 맡고 있다
. 서울 피정의 집·부산 피정의 집·대구 교리신학원·남양주 농장경영·화순 및 미국 뉴저지 등지의 분원 및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09년에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수도원으로부터 2명의 수도자가 서울에 파견되어 서울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1909~1927)이
설립되어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1927년 이후부터는 북한의 함경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1927~1949)과 중국 연길에 성(聖) 십자가수도원(1928~1946)이 설립되어 본당 사목, 신학 교육
, 출판사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사업으로 수도 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해방 후 38선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수도원이 폐쇄당하고, 6·25전쟁을 전후하여 70여 회원들이 체포·구금되어 30여 회원이 피살되거나 4년여의
강제수용소 생활 도중 옥사하였다.
1952년 7월 6일에 함경도 덕원수도원과 중국 연길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일부는 본국으로 추방되고 일부는
월남하여 다시 모여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 후 수도원 가족이 크게 늘어나 왜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1964년 2월 17일에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오도하스(Haa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왜관수도원은 확고한 자립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1971년 4월에 이동호 신부가
제2대 아빠스로 선출되었고, 1985년 5월에 이덕근 신부가 제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1995년 7월 12일에
이덕근 신부가 아빠스를 사임하면서 2001년 8월 23일까지 김구인 신부가 관리원장을 맡아왔다.
저아래 건물은 여러가지 작업장인것 같다
성 베네딕트회는 노동과 기도를 중시하기에 모든 수도자가 한 가지 이상 노동한다.
북한의 덕원 수도원 시절부터 출판업과 인쇄업에 종사했는데 현재 분도출판사를 직영한다.
해당 회사는 평신도 직원들과 수도자들이 함께 일을 한다. 그외 성당의 성물이나 가구를
제작하는 분도목공예사와 금속공예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양초 공예실이나 조각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실 등이 있다. 또한 인근의 논에서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쌀농사를
짓고 있다. 성 베네딕트회에서 생산되는 세공품은 국외 공장에서 수입되는 성상이나
양초가 아닌 국내에서 수도자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이기에, 타사에서 판매되는
성물보다 가격이 비싸지만 품질은 좋은 편이다.위키백과
수도원을 나와 칠곡보 오토켐핑장에 도착 수속을하고 탠트를치고 저녁식사를 끝내고 주위를
살펴본다 강건너 태극기가보이는 건물이 호국평화기념관이다
오토캠핑장 모습 나는 끝자락 코너에 아주 널직히 24호지정석에 자리잡았는데 너무 조용하다
5분만에 한대씩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밤잠을 제대로 자질지 걱정이된다 하루종일
많이 돌아다녔고 저녁식사때 소주도 적당히 마셨으니 잠이 잘 오겠지 일단 일찍 취침에든다
간밤에 약간의 비가내려 조금 불편했지만 잠은 잘 잔것같다 강가라서그런가 안개가 잔득끼어
떠오르는해가 마치 저녁달 같다 달성과 칠곡을 대충 돌아봤으니 오늘은 구미로 떠나보자
Plaisir D Amour (사랑의 기쁨) - Mary Hop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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