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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칠곡 구상 문학관

      구상 시인은 본적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이며,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한 후 20여년간 이곳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에 칠곡군은 2002년 왜관읍에 구상문학관을 건립, 헌정하였다.

       이에 구상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23천여권의 도서와 자료를 기증하였다. 구상문학관은 개관 이후

      칠곡군 지역민들을 위한 문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칠곡문인협회의 모임이나 행사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최근에는 구상문학관 내의 문학세미나 교실에서 만난 문학동인들

       (시나루, 언령, 꽃자리)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문학관의 시설 규모는 부지 면적이 1,611(487.33)이고 건물 연면적은 699.87(211.71)이다.

     주요 시설을 보면 1층에 전시실, 영상실, 사무실, 관수재가 있는데 이곳에는 문단 활동 당시 시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觀水齋)는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한다.

      2층은 도서관, 열람실,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구상 시인이 기증한 27,000여권의

     도서와 그림, 액자, 병풍, 기념패 등 소장품 300여 점이 있다.

 

          구상 시인은 강과 물을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다. 낙동강은 구상시의 원천이었다.

          현대식으로 지은 문학관과는 다르게 이곳의 관수재(觀水齋)는 고풍스런 모습이다.

          관수재의 단골손님은 친구였던 이중섭이었다고 한다. 지인들과 함게 삶과 예술을

          토론하며 노래했던 당시의 체취를 읽을 수 있다. 관수재는 시인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수(水)와 심(心)은 통하는 글자이기에 관수(觀水)와 세심(洗心)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인 바, "마치 매일예배를 보듯/ 나는 오늘도 강에 나와

          있"('겨울강 산조(散調)')곤 했던 것이리라. 천병학님글에서

      구상문학관을 들어서기 전, 뜰 한 쪽에는 그의 작품인 「그리스도폴의강 24 」를 새긴 시비가 서있다. 

      이 시비는 한국과 일본에서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폴의강 모임 」

      이 2008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그리스도 폴은 예수 그리스도 발현에 접한 전설적인 카톨릭 성인이다.

       그의 전반 생애와 그 삶은 세속을 끊어버리고 자신의 소임과 수덕으로 하여 마침내

       구원을 받은 초대교회 시대의 인물일 것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볼

       목적으로 남을 위한 구제의 수범을 보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곧 그리스도 폴이다.

       구상은 이 성인을 자신의 신앙과 시와 삶의 전범으로, 카톨릭이 바라고 가르치는 바

       회심과 그 수덕을 본받아 구원의 빛을 받고자 하는 데서 이 장시의 발상이 틀 잡힌 것이었다.

 

 

          구상(1919. 9.16-2005.5.11) 시인은 서울 이화동 출신이다.

          어머니가 43세 되던 해에 구상시인을 낳았기 때문에 어릴 때 만득이라고 불렀다.

          아버님이 왜관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욱사업을 하였고 형이 구대준 신부였다.

          그런 가정환경으로 인해 신부가 되려고 하였으나 문학을 하게 되었다.

           6.25때는 종군작가단의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53년부터 74년 까지 왜관에서 기거를 했는데 이때 왜관사람들은 ‘병원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후 서울에서 생활을 했는데 집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한강을 주제로 강 연재시를 계속 쓰다

           63빌딩이 생기면서 ‘강’시를 못썼다고 한다. 천병학님 글에서

 

 

 

 

 

 

 

 

 

 

 

        구상 시인은 또 하나 남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너무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때문인지 문학은 항상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주된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다.

        그래서 구상 시인은 일본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도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과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심을 가다듬기 위하여

        복음의 묵상서《나자렛예수》와 신심시선《말씀의 실상》을 펴냈다.

 

 

                     구상시인은 도자기를 좋아해 수집에도 열중이셨다

 

 

 

 

 

 

 

 

 

 

 

 

 

 

 

 

 

 

 

 

                    2층서재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수는 없었지만 책이 전체를 찾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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