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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탈리아 폼페이

밤늦게 도착해 호텔에서 바라본 로마시가지의 야경을 바라봅니다

로마시내의 야경입니다

아침에 6시20분에 폼베이로 가면서 창밖으 풍경을 담아봅니다

나폴리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폴리 앞바다 지중해가 보입니다 아래 베수비오산도 보입니다

저산의 화산 폭발로 폼베이가 화산재에 묻히게 됩니다

폼베이를 집어삼킨 베수비오산입니다

 

폼베이의 유적지 출입문에 도착 했습니다

당시 폼베이는 로마제국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위락시설로

로마귀족들 사이에는 인기가 매우 높은 휴양도시였다

폼페이는 로마만큼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고대 이탈리아 민족의 일족인 오스코족에의해 기원전 8세기에 도시가 세워지고 폼페이라 이름지어졌단다.

내륙과 바다를 끼고있는 폼페이는 주변 강국이 노린 육로와 해로의 요지로서 그 풍광이 멋진 곳이다.

기원전 525년 ~ 474년간 50여년간 한창 팽창하다가 에투루스코족에 정복되고, 그후 산니타족에 다시 정복당한다.

그후 기원전 310년에 결국 로마인들에게 패배당해 로마로 흡수된다.

마찻길은 야광으로 되어 있을 정도이고, 인도와 마찻길이 구분되어 있는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수난을 겪는 동안 정복자들은 이곳에 자기네 민족의 풍속과 예술을 폼페이에 이식시켜 화려한 발자취를

 조성해오다 결국 서기 79년 8월24일 정오가 조금지난 시간에 베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눈 깜짝할 사이에

태양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검은 연기와 재가 3일간 계속되면서 두께 5~7m의 화산 재와 유황가스가 도시를 삼켜,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그 당시 27,000여명의 인구의 10%는 사망하고 90%는 탈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후 그 무서운 저주가 두려워손을 대지 못하다가 1600여년이 흐른 1748년부터 발굴이 시작 되었으니 건물의

지붕은 거의 원형대로 발굴되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린 상태였다.

 

이곳에 이미 아름답게 개선문을 만들었는가하면 마차도엔 과속방지턱이 있고, 물이 귀한 것을 대비 지붕낙수물을

 받아 사용하는 형태도 발견되었으며, 수도를 설치하여 부유층은 수돗물을 음용했으며, 공창. 극장. 약국. 간이주점.

 빵굽는집. 대중목욕탕 등 현재 우리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도시였다.

 

발굴을 시작한지 300년이 가까워 옴에도 전체면적의 3/4 만 발굴한 상태라니 아직도 신비감이 그대로 묻혀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삶을 사는 내 자신이 1세기 당시 즉 20세기전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은 나만의 감회는 아닐성 싶다.

자연 앞에 서건 역사앞에 서건 인간도 하나의 티끌에 불과하다는 순리를 알게하는 곳이다.

마리나 문.왼쪽은 사람이 다니고 오른쪽은 마차가 다녔다고함

 

 제우스 신전. 티베리오 개선문. 마첼룸시장. 라리신전. 둠비리관청. 수도관.

법관사무실. 아폴로신전. 바실리카. 스타비아목욕탕. 아본단자대로.개인주택. 요정의 음화. 검투사들의

 경기장을 둘러보고.실내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대부터 음악이나 무언극공연을 위해 마련된 실내극장. 기원전 80년에 두 집정관 C.구인티우스

 발구스와 M. 포르치우스에 의해 지어졌다.

계단층의 상층과 중간층은 총체적으로 17개의 음회암으로 만든 큰계단이고 왼쪽 맨아래 다섯 개의

 돌계단에는 폼페이 유력자들이 근접해서 구경하게 한자리,지금과 견주지면 vip석이다. 맨 윗부분에

 남아있는 고리같은 것은 비나 햇빛을 피할수있게 천막을 친 것으로 건축되었다...

 

 

Pompeii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1700년 동안 7~8 미터 화산 잿더미 속에 말없이 파묻혀 있었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 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 곳이

어디인지 행적을 모르다가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법을 심판하던 곳 지금의 법원

 

여기는 그리스신화의 주피터 신전입니다. 화산폭발로인해 예전의 제모습이 많이 없어졌지만
복원하시는 분들의 손길로 신전의 모습을 많이 갖췄습니다

양쪽에 보이는문은 티베리오 개선문이라 하네요

비가오면 물이 마차길로 흐르나봅니다 징검다리가 놓여 있네요ㅛ

지붕은 다 봉괴되고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아폴로신전 리라신전이라고도 한다

중앙광장 앞에 보이는게 주피터 신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석이 돼버린 인간의 모습과 생활도구들입니다

 

그시절에도 마차가 다니는 길과 인도가 구분이 잘되어 있습니다

저위에 문은 칼리큘라황제의 개선문이라고 함

 

다행히 목욕탕은 천장이 튼튼해서 화선재에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제우스신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왼쪽아래 맛사지 받는 곳이랍니다

현대 최고급 일류 호델 사우나보다 더 우아하고 훌륭한 사우나 시설에 경탄이 절로 난다.

이때가, 신석기 시대로서 우리나라 선조가 몽촌토성 움막에 기거할 때 쯤이다.

목욕탕 천정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은 자연채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수증기가 빠져나가는 목적도 있습니다. 
또한 목욕탕의 영업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왼쪽 창에 빛이 들어오면 영업이 시작된것이고,

우측 창으로 해가 빠져나간다면 영업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하니..

그냥 뚫려있다고 쉽게 지나치면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돔형태로 되어 있으며, 돔을 자세히 보면 홈이 파여져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정에 수증기가 모여 물방울이 생기면 바닥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고 홈을 타고 벽으로 타고 내려오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니.. 오늘 사우나갔다가 천정에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을 맞은 저로서는 2천년전 그들의 지혜에 
놀랄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리석으로만든 분수대

탕을 대리석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거의 2천년전에 이렇게 화려한 탕을

 만들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위와 같이 시원하게 뚤린 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도로 청소까지 자동화 되도록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도로 중간 중간에 수로가 있는데 여기서 물이 나와 도로를 항상 청소를 한다네요 

 

 

폼베이의 부자집이다. 돈자랑은 과거에도 똑같았나보다. 

입구에는 HAVE라는 글이 적혀있다.

 폼베이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입구라고 한다.  

 

이 파이프는 이 우물로부터 폼페이에 세워져있는 이 시대의 부유층집에 연결되어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수돗세를 내고 물을 기르러 우물까지 가지않고 집에서 물을 틀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음부분을 이렇게 납으로 물이 새지 않게 처리를 했습니다

그시대 납을 많이 사용해 납중독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시대의 멧돌입니다

여기서 멧돌로 밀가루를 만들어 빵을 구었나봅니다

스타비아나 거리에 있는 모데스토의 베이커리에서는

 밀가루 반죽 도구와 탄화된 빵 덩어리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식당 주방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목욕하고 나오면서 한잔 하는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시계방향으로 도리아식 기등으로 지어진 집. 벽화 성기를 저울로 달고 있는모습

바람에 베일이 날아가면서 알몸으로 조가비 안에 기대어 누은 비너스가 두명의

큐피드와 함께 바다위를 유유자적 떠다닌다.

제단을 향해 기어가는 큰뱀이 인상적이다. 뱀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 한다.

베티의 집(House of Vettii)벽화

 

폼페이 유적 중에서 제일 유명한 곳으로 두명의 부유한 상인, 아울루스 베티우스 레스티투투스

( Aulus Vettius Restitutus)와 아울레스 베티우스 콘비바(Aulus Vettius Conviva)이

거주했던 곳이다. 비교적 잘 재건된 저택과 잘 보존된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들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을 잘 보여준다. 도로에서 저택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통해 들어가면 내부 정원처럼

 꾸며진 아트리움이 나온다. 1층 건물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보행자들이 안을 들여다 보는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트리움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회합과 어린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아트리움에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빗물을 모으는 수반(impluvium)이 있고,

 창고와 침실, 서재 등이 아트리움을 둘러싸고 있다. 화덕과 집 밑으로 열기가 흐르는

 관을 통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난방을 했다. 수로는 도로의 수관과 몇몇 가옥은 설치되어 있는

 관을 통해 물을 공급받았고, 하수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정원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그러하듯이 그림과 조상, 분수들로 꾸며져 있다. 저택 앞에 자리하고 있는 가옥은

점원들에게 임대해 주었을 거라 추측된다.

 

 

좌측"환락과 불벼락" 벽화입니다.

할랑벗고 남여들이 환락에 취해잇을때 "베스비오"화산이 폭팔하여

용암과 불덩이가 집으로 굴러들어오자 모두가 놀래는 장면의 벽화입니다.

 우측그림은 사창가에 있는 벽화입니다 

다양한 벽화들이 많습니다 

빗물 홈통이 아닐까요?

이거는 하수관 같기도 하고 빗 물 혼통 같기도 하다

부호 메난드로(Menandro)의 저택                                                           부호 파우노(Fauno)저택

부자 미스테리 (Mysteries)의 집벽화

신비의 저택(Villa of Mysteries)에 있는 프레스코화이다. 디오니소스의 신비로 들어가는

 의식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으로 알려진 이 벽화는 실물크기의 인물들이 붉은색을

배경으로 하여 대담하고 화려하게 표현되어있다. 우측에 춤을 추는 무희,

그 왼쪽에 채찍질 하는 모스. 왼쪽 벽면에는 하녀와 함께 재물을 바치는 모습이

역동적인 자세로 이천여년 시간을 뛰어넘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집앞에 개조심이라는 문구와 그림을 모자이크 방식으로 표현했어요 가이드 말로는

 당시 엄청 부자가 살던 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기로 방향 표시를 해놨는데 그때의 사창가 안내표시 아닐까?

 

오른쪽에 항아리 같은것은 술독 같아요

보고계시는 여기는 79(서기 0079)년의 술집이에요 여기는 바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폼페이는 성적으로 많이 문란했던 도시였다고하는데 여기도 단란주점같은 곳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베레네 궁전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폼베이의 반원극장

반원형의 바닥 가운데 부분이 돌비 써라운드 입체 음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스팟이다. 

가운데 서서 말을 하면 내 목소리가 0.5초 정도의 간격으로 메아리를 이루어

극장 주변을 돌고 다시 내 귀로 들어온다.

 

원형 극장 전경 :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정도라는 기록인데, 실제 보면 20,000명도 넘게 들어 가는 수준이다.

발굴에 최대 공헌자는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하임 빙겔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이다.

1764년 "로마고대 미술사"를 편찬하여 학문적 체제를 확립하였고, 그 영향이 세계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격투에 열광했는데, 번 벌로의 ‘매춘의 역사’에 따르면

경기장에서 행해지는 가학적 행위는 구경꾼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사창가와 매춘부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로마 시내 사창가들 대부분이 막시무스 대경기장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로마시대 후기 국가 공인의 공창(公娼)이 로마에만 45개에 달했고 폼페이에는 7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폼페이의 공창 중 한 곳은 이발소에 딸려 있었다고 하니 이발소와 퇴폐영업은 그때부터 단짝을 이루었던 모양이다.

 매춘 세금은 1세기에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 즉위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매겨졌다고 합니다

검투사들의 생활공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원형극장 뒤로 돌아가봤습니다

여러문으로 통하는 뒷길입니다

 

여기는 검투사들이 훈련을했던 훈련장입니다

 

 

 

 

 

폼베이 유적지를 돌아보고 점심을 먹고 쏘렌토로 가기위해 폼베이 역으로 왔습니다

                                                  

   

                              


 

                                            
아래 음악 중지하고 위크릭하면 재생이 나옵니다 재생크릭해 들으세요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의 민요입니다. 루이지 덴차가 작곡하고

주세페 투르코가 작사하였으며, 188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쉬운 선율이면서도 활기찬 분위기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하네요.

제목인 푸니쿨리 푸니쿨라는 케이블카를 의미합니다.

 

가사는 "케이블카가 움직입니다. 빨리빨리"로 부릅니다.

 

당시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의 베수비오 화산에 처음으로 개통된 케이블카를

시민들이 무서워 아무도 타려하지않자 케이블카 설치자 코머스 쿡이

노래를 만들게 해서 가요제에 참가시킨 후

폭발적으로 이용자가 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Her yerde kar var (눈이 내리네) - Nilu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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