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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청도 읍성과 낙대폭포

4월27일 이팝나무 꽃을 보러 위양못에 갔는데 꽃은 못보고 돌아서는 마음이 허전하여

전에 들려보고픈 청도 읍성으로 발길을돌려 화양읍으로 향한다

 

 

 

고마청

 

 

성을 깔끔하게 복원해놨다

유치원생들이 봄소풍을 나왔는지 야외 학습을 하는지 재잘거리는

모습들이 귀엽다

아직 연꽃은 피지 않았지만 아담하게 연못이 조성되었네

청도읍성은 조선 초기에 이미 석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1589년(선조 22)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대로변에

접한 주군(州郡)의 성지(城池)를 수축하라는 왕명에 따라 1590년(선조 23)에 군수 이은휘(李殷輝)가 2년에 걸쳐 개축했다.

연꽃밭의 중간 길이 태극문양을 하고 있는것도 특징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뒤 1669년(현종 9)에 군수 유비(兪秘)가 서문인 무회루를

건립했고, 동문인 봉일루는 1708년(숙종 34)에 군수 임정(林淨)이 건립했다. 한편 1870년에 군수 김이교(金履橋)가

남문인 진남루을 건립함으로써 4성문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청도읍성의 규모는 둘레 1,880m[1,570보],

 높이 1.7m[5척 5촌], 성첩 600첩이라 기록되어 있다.


1920년경 일제가 성내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성문과 성벽을 헐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강지

축조 시에 성돌을 제방 축조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로써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정밀 지표 조사 및 복수[복원] 정비 계획안 수립을 거쳐 2006년부터 연차적으로 동문지,

북쪽 성벽 일부 및 북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 2010년에 북쪽 성벽 치성과 성내지,

남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하고, 북쪽 성벽 일부 구간을 복원 정비 중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북문

성문앞에 U자형으로 방어성을 하나 더 쌓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성문을 직접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성문 바깥에는

연꽃저수지밭이 있어서 보기도 좋을뿐더러 침입자를 방어 하는데도 역활을

크게 한다고함

 

 

 

청도읍성은 청도의 진산(鎭山)인 남산[829m]에서 청도천으로 뻗은 두 줄기의 능선 사이에 남고북저(南高北低),

 동고서저(東高西低)한 해발 100∼122m의 구릉지와 일부 평탄지에 축조된 전형적인 평산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방으로는 비슬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청도천과 양안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면 형태는

 동서간 직선거리 약 930m, 남북간 직선거리 약 870m로 장방형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12년 현재 동쪽 성벽 일부만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1995년 1월 14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그 외 성벽 구간은 민가 및 경작지 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어 간헐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2009년부터

 매년 청도읍성 동문에서 북문까지 복원되어 244m 구간에서 한 줄로 청도읍성 밟기를 진행하고 있다.

 

성 안팎으로는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청도 동헌[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03호], 도주관[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향교[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09호] 등

 당시 지방 행정 및 지역사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학술 조사 결과, 청도읍성은 성벽·치성·적대·

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무슨용도로 지어젔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안내문도 없으니 그냥통과


읍성밟기

대구, 경북지역의 유일한 읍성 밟기는 ‘답성놀이’, ‘성 돌기’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녀자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산성의 능선을 따라 밟으며 열을 지어 도는 풍속을 재현한 것으로, 남자는 읍성을 지키고 여자들은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면서 무기로 활용한 돌을 머리에 이고 운반하던 데에서 유래된 전통 민속놀이이다.  

예부터 민간(民間)에 전(傳)해 내려오는 신앙(信仰)을 바탕으로 읍성을 돌면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하며

 소원성취(所願成就)한다하여 최근 가족단위나 친구, 연인 등 다양한 형태의 많은 관광객들이 읍성을 찾아

답성놀이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서문

 

 

어느집 담장엔 목련이 곱게피어있다

도주관

 

 

 

화양초등학교 여기도 어느시골 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이 몇명 않되나 보다

동헌이 화양초등학교 교내에 위치해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왕벚꽃

자주 달개비도 담아보고

성벽과 일부 터만 남아 있던 청도읍성은 2006년부터 각종 문헌 자료 등의 고증을 통해 북문인 공북루를

시작으로 복원 중에 있다고 한다. 지금도 석빙고 쪽으로 성벽을 계속 쌓고 있다.

읍성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석빙고이다. 아치형 덮개가 위태로우면서 특이하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이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

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주차한 곳으로 내려dhk 장승 앞으로 다가가니, '찻집 꽃자리, 식물원 꽃밭에서 노닐다.'라는 표지가 보인다.

그 옆에 cafe 꽃자리 전통차 & 원두커피라는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뒤로는청향정사(淸香精舍)라는 편액이 걸린 기왓집이 보인다.

손님을 받는 찻집 건물인지 음식점 건물인지 주인이 거주하는 가옥인지?

 

 

청도 남산에 있는 낙대폭포다 전에 남산에 오를 때 보았으나 그때는 물이 없어서거의 절벽에

가까웠으나 며칠전에 내린비로 수량이 풍부해 멋진 폭포가 형성돼있다

 

 

폭포를 보고 내려오는데 숲속에 미나리냉이 꽃이 활짝피어 있어 그냥 내려갈 수가 있나

다시 카메라를 조정해 본다

         내 마음의 보석상자 /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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