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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경주 동궁과 월지

  

보경사와 호미곶을거처 낮에 도착 한바퀴 돌아보고 야경을 보려고 했는데 연휴의 많은 차량 정체로

계획이 완전 빗나갔다 경주에 도착하니 벌써 어두어진다 야간인데 괜찮겠지 했는데 진입도로에 들어서니

 차가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완전 주차장이다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고 죽으나 사나 차에서 대기해야된다

1m가다 5분 또 1m가다 5분 바로 보이는 곳을 한 시간이 넘게 간다 겨우겨우 주차장에 도착하니 만차라고

전진 다음주차장으로 가란다 이래서 휴일에는 안나가는데 옆지기가 휴일이 그러하니 불평할 수도 없고

스트레스 엄청 받았다

겨우 주차를하고 매표소로가니 여기는 또 뱀사자 지그 재기 중국의 관광지 줄이 무색할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입장을하고 보니 이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첫 누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고생은 했지만 호수에 반영을 보니 너무 아름답다 감탄사연발 삼각대가 이럴때 필요한데

들고 다니는것도 귀찮으니 감수하고 자꾸 샷다를 눌러보지만 신통치가 않다

 

입장시간은 21시 30분까지이고 퇴장 시간은 22시까지 입니다.

동궁과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입장 후 보이는 목조건물은 임해전이고, 바로 옆의 큰 연못에는

 3개의 섬이 세워져 있다.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 궁터  경주 동궁과 월지입니다.

  2011년 7월에 안압지에서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1980년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새겨진 토기 파편을

발굴하면서 '안압지'라는 이름을 '동궁과 월지'로 바꾸게 됐다

사적 제18호 동궁과 월지는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동서 약 190m, 남북 약 190m 정방형 공간 속에 4,730평의 못을 조성한 것인데

서쪽과 남쪽은 건물이 서고 북쪽과 동쪽은 담이 막아서서 아늑한 원지공간(苑地空間)을 조성했던 것이다.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어 그곳에 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지는 안압지.

못의 원래 이름은 안압지가 아닌 '월지' 였다고 합니다

후에, 조선시대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 하여 안압지라는......

 

 

어렵게 찾아 온 곳 인증도 빼놓을 수 가 없지요 ㅎㅎ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궁궐터의 하나로 임해전을 비롯한

여러 부속 건물들과 함께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

하였다고 합니다 동궁은 터만남았고 아직 미복원입니다

 

 

 

 

 

 

 

수면위로 또다른 건축물의 모습 보입니다 바로 반영입니다 이 모습 때문에 동궁과월지의 야경이 더
사랑받고 많은 인파가 야경을 보기위해 몰려듭니다

어떻게 찍어야 잘나올까 자꾸 샷다를 눌러보지만 그게 그것입니다

사진실력이 딸리는 저로서는 이게 한계인가 봅니다

우리민족은 탑 쌓기를 참 좋아합니다 하나라도 더 올리려고 안달입니다

 

마치 나무가 거꾸로 서 있는 느낌입니다

 낮에 날씨가 더웠는데 밤에 약간의 물안개가 끼이는것 같습니다

많이 흐려보입니다

 

 

경주의 동궁과월지는 전체적으로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 하고 보는내내 황홀경에 빠지고 맙니다

물이 흐르는 좁은 도랑인데 조명발이 잘밭아 멋진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밤8시가 넘었는데 저녁도 못먹고 이렇게 돌아보고 나오는데 아직도 줄을서서 매표를 기두리고 있습니다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를 찾아 나섭니다  파킹하고 저녁도 해결해야 되겠는데 영업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정 안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날 시내관광을하고 떠나면서 들렸던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사랑에 얽힌 월정교를

잠시들렷는데 아직 복원이 덜된 상태입니다 이제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돼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에

 중수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으며, 그 후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경잡기’에는 현재는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고 기록해 ‘동경잡기’가 집필된 조선 현종 10년(1669)경에는 이미 교량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교량은 760년(경덕왕 19년)에 조영돼 1280년(고려 충렬왕 6년)까지

최소 520년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상세한 얘기는 위 원효대사와 월정교를 참고 하십시오


월정교에 얽힌이야기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경주의 월정교지는 통일신라시대 월정교 옛터이다.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한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혹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다.

경주 시내를 벗어나 지난번 지진의 근원지  양남면으로 이동 주상절리를 감상합니다

 

 

부채꼴 모양의 특이한 주상절리 오랫동안 군사지역에 묶여 있다가 몇년전에 개방됐다

 

 

여기는 장작을 쌓아 놓은 듯한 주상절리입니다

자연이 연출한 조각품이라 일컬어지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양남면 주상절리
해변에는 10미터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이 1.7키로미터에 걸쳐
고대 희랍의 신전 기둥처럼 줄지어 서 있는가 하면
주상전리가 원목을 포개어 놓은것 같은 형상으로 누워있고
또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 같은 신비감과 여인네의 주름치마, 부채꼴모양 꽃봉우리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질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없는 세계유일의 주상절리다

 

 

 

철도 침목같은 모습입니다

파도소리 음악회도 지금 열리고 있는데 몇몇 사람만 앞에 앉아 듣고 관광객 대부분은 관심도 없습니다

 

 

맑은 동해바다 해변에는 가족단위 해산물을 관찰하고 있나봅니다

어디를가던 바위위에 이렇게 질긴 생명력의 소나무를 자주보는데 참 신기합니다 수분을 얻는 것을 보면

 

2년전에 왔을때는 전망대가 없었는데 ~~아래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어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맑은 날에 해돋이를 봐야 하는데

양남면 주상절리를 끝으로 포항과 경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연휴중이라 아주 피곤한 여행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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