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백두산 여행 동호회 속리산 말티재 자연휴양림에서 미팅이 있는 날이다
2박3일을 내가 예약하고 주관하기에 조금 일찍 출발을하며 이른시간 상주 견훤산성을
들렸다 갈 계획이다(6/20)
상주시 화남면 문장로 902-37
출발 3시간 만에 정확히 여기 견훤산성에 도착했다
네비로 찍으면 금방 찾지만 지방도 변이라 더욱 찾기가 쉽다
요즘 자동차 네비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폰으로 다운받는 네비는 음성으로
상주 견훤산성 하면 간단히 대려다준다
많은 사람들이 올라다녔기에 오르는 길은 탄탄대로다
소나무 숲도 울창하고
내가 산행하며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계단은 누구나 걷기를 싫어하기에 거의 옆으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
15~20분만에 산성에 도착했다
동측 벽입니다.
출입구에 해당하는 동측 벽은 복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각지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기술적으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동측 벽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경북 상주시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해서
견훤산성이라 불린다. 이 산성 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4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상주쪽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성벽 둘레는 650m이고, 높이는 7∼15m이며,
너비는 4∼7m이다.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 문화재청
김해김씨 경파 파조 김목경(金牧卿)의 묘비문
동측 성벽에 이어진 산기슭에 앉은 묘가 김목경의 묘라고 함
김목경은 고려말 충렬, 충선, 충숙, 충해왕 4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정1품급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까지 올랐으며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으로 봉해졌습니다.
그 후 충혜왕의 정치가 점점 무단해 지자 이를 바로잡을 것을 수차 충언하였으나 끝내 듣지않아
당시 보령현, 지금의 보은지방으로 낙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의 기록은 끊어져
어디서 어떻게 사망하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길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다시축조한 성
화남 면소재지 풍경
무너진 성벽의 흔적
이정도의 묘에 비석도 없으며 상석에 글씨도 없는걸보니 저기 김목경의 묘가 아닐까?
김목경의 아들 김보는 공민왕때 삼중대광문하시중이란 최고 관직에까지 이르렀고
죽은 후 충간(忠諫)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영천 안장되어 있으나
그 아버지 김목경의 묘는 후손들이 찾지 못하여
광주 두암동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제를 올려왔는데,
1966년에 그 후손이 이곳 견훤산성 내에서 무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인근 마을 촌로들이 김정승묘라고 하는 곳에서 김목경의 후손이
三重大匡 金寧君 牧卿之墓 華山 乾坐라는 지석(誌石)을 발견하였다함
600여년 동안 실전되었던 무덤을 촌로들의 구전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타리님 글에서
산딸기가 곧 꽃을 피울 것 같다
엉겅퀴
옛 그대로 남아있는 성벽
나리꽃도 에쁘게 피었네
층층나무인가 가막살나무인가
작살나무인듯
북쪽에는 군데군데 성이 무너지고 흔적만 남은 곳도 있다
안내문의 글처럼 산세와 지형대로 자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견훤은 927년에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견훤이 9년뒤 왕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신세가 역전되었을까?
후백제왕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神劒),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두째, 셋째 아들 양검(良劍)·용검(龍劍)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결국 신검은 견훤에게 반발해 두 동생과 함께 난을 일으킨다
이때가 935년 견훤의 나이 69세 때이다다.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으나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그의 고향이 상주임을 감안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고 하며,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에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당시 후백제의 왕인 신검을 토벌해달라고 요청.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936년 9월 왕건은 10만 7천의 군사(삼국사기), 또는 8만 6천의 군사(고려사)를 이끌고 신검을 치러 출정을 한다.
이때 견훤이 기병 1만을 이끌었다고 한다.
한때의 군주가 상대편의 장수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본 백제군은 심히 동요했고 결국 패전하고 말았다.
자기가 세운 백제의 패전을 직접 목격한 견훤은 며칠 뒤에 황산군에서 죽었다.
서쪽 성문인 것 같다
삼국사기는 견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견훤이 서남지역인 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니까 큰 장수급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삼국사기 편찬자도 인정한 것은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는 것이다.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신검은 어떨까?
왕위 찬탈자라고 지탄받고 결국 백제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다.
단순한 권력욕때문에 견훤에게 반발했을까?
너무 억울하고 분하지 않았을까?
평생을 아비밑에서 모진 풍상을 견뎌 냈는데 이제 어느정도 안정이 되니
배다른 막내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는 아비를 보며 억울함에 치를 떨지 않았을까?
문득 조선초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오버랩된다.
단지 조선은 외부세력이 없었고
후백제에게는 위협적인 외부세력이 존재했다는 차이뿐.
다시 삼국사기 편찬자의 평가를 옮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견훤이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사랑도 사업도 전쟁도 승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나 패배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하늘타리님 글에서
천황봉에서 서편으로 뻣은 줄기는 입석 경업 신선 문장대를 이어가고
일부는 옛모습 그대로임
새로 축조한성벽
우물터가 아닌가 생각됨
청화산쪽을 한번 조망해보고...
황금 달맞이 꽃이 아닐까? 도로변에 핀꽃을 담으며 견훤사당으로 이동을 한다
청계정
저오른똑길로 올라사면 견훤 사당이 있다
상주 견훤사당(尙州 甄萱祠堂)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에 있는 사당이다.
2013년 3월 18일 경상북도의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여름에 피서지로 손색이 없는 계곡
100여m올라가니 견훤 사당이 나온다
견훤사당은 간소한 건물이지만, 청계마을의 민속인 동제의 제장으로서 늦어도 19세기 전반에는
창건된 사당이다. 유형 무형의 민속신앙인 동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민속신앙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비록 변화를 겪긴 했지만, 인근에 전승되는 견훤관련 설화와 결합되어
후백제대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작은 건물로 매우 간결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서 건축 구성상의 특이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당으로 서는 드물게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건립 초기의 구성이 현재까지 잘 유지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점 등을 고려하면
나름의 의의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견훤사당은 후백제 견훤 왕과 그의 제례에 관련되어 있는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아직까지 견훤의 넋을 기리고 있는 전국의 유일한 신당(神堂)이다.
이 사당은 선신각 혹은 선신당 이라고도 한다. 상량문에는 ‘도광19재’라는 연호가
쓰여 있는데, ‘도광23년 계묘3월2일 상량으로 1843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선신당 안에는 ‘後百濟大王神位’라는 위패가 있다.
이는 견훤을 신격화하여 옛부터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 액(厄)을 차단시켜 주는 골맥이 신으로서,
민간에서 민속신앙 즉 산신제(山神祭)로 행해지고 있는데, 주민들은 이 제(祭)를 ‘선신제’라 한다.
매년 정월 보름과 시월 보름에는 주민들이 정성껏 제물을 마련하여 견훤 사당에 제사를
드리면서 이 곳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셔 왔다
청계, 송내 마을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실은 견훤의 후백제 건국 그리고 도읍지 선정과 전쟁, 산성 쌓기 등이 있다.
후백제를 건국하며 도읍지를 선정해 전쟁을 하고 성을 쌓았던 것은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청계, 송내 마을의 민속 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후백제 건국과 전쟁을 통해 마을 주변으로 산성이 존재하게 되고 견훤과의 관련성과 견훤의 비범함 그리고
패배한 견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마을에서는 견훤을 신격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 신앙이 지금까지 민속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견훤 사당을나와 네비를 치니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지방도를 따라 속리산으로
진입하는 길로 안내를 한다
상주를 벗어나 속리산면으로 가다보니 삼가 마을 자랑비가 있어 잠시내려 살펴본다
삼가저수지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 여기를 비룡저수지라고도 한다
말티재 휴양림으로 가는중 좌측 턴널 쪽에 이정표가 있는데 선병국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보여 들렸다 가려고 방향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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