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 여객터미날에서 8시30분에 출발 10시30분에 이즈하라 국제부두에 내렸다
표민옥적(飄民屋跡)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풍랑으로 조난되어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표류되면 모두 대마도에 있던 표류민 집단 수용소 즉 표민옥에 수용했다가
조선에서 관리가 와서 적절한 협상 후에 귀국시켰다. 여객 터미널에 20미터 정도걸어
오면 해안가에 축대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까지 표민옥으로 사용되어졌다.
현재는 해상보안자위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국제여객 터미날에서 바라본 건너편 사찰과 주택들
중심부를 관통하는 시냇가에는 이렇게 참게가 낮인데도 돌아다니고 있다
이즈하라 중심을 지나는 시냇물 물이 얼마나 깨끗한지
물고기들이 떼를지어 다닌다
우리나라의 마트와 별반 차이가 없는 훼미리마트
시내에는 이러한 면세점이 여러곳 약간의 크기만 다를 뿐
이즈하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코인호텔 그리고 전화국인듯
팔번궁 신사(八幡宮神社)
일본은 어디를 가든지 신사를 쉽게 볼 수 있는데 팔번궁(하치만구) 신사는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 진구(神功)황후를 모시는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대표적인 神社로
일본 역사왜곡의 한 단면이 묻어나는 장소이다.
보물관에는 삼십육가선(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음력 8월 15일에 행해지는
팔번궁신사 대제는 예부터 대마도 사람들의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가을축제이다.
신사 뒤편의 보물전은 300엔을 내야 관람할 수 있으나 우리는 패스
팔번궁 신사
이즈하라 하치만신을 모신 하치만구 신사, 우노도 신사, 천신 신사, 와카미야 신사가 함께 있다.
하치만구 신사는 일본의 덴진, 이나리 신사와 더불어 일본 3대 계파의 신사로 일본 본토에서도
하치만구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일본 전체에 하치만구 신사가 3,000곳이나 된다고 한다.
신마
우물
몇 백년 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
금궁신사(今宮神社: 이마미야신사 - 마리아신사)
대마도 19대 번주인 '소 요시토시'의 아내 '고니카 마리아'(小西行長의 딸) 와 그 아들 '소 요시나리
(宗義成)' 를 모신 신사로 이곳 역시 일본의 통일과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슬픈 전설이 있다고 한다.
대마도에서 생산되는 농공산품 전시장인듯
시게방향으로 대마도 검찰청사.대마도 법원.대마도 공공 직업안정소.대마도 남경찰서
대마 농업협동조합
대마 천리교 회관
대마도 옛집들
대마도 보건소
나가사키현 대마 진흥국
대마도 쓰시마 유아원
고려문
이 문은 원래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끼바라 성에 있던 것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했으며
그러다가 1987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진 부재를 수습해 이곳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고려문이란 이름은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태평사 사찰
태평사(太平寺)와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
이즈하라 경찰서 옆 골목 안쪽에 태평사가 있으며 경내에는 제주 4․․3학살의 무고한 영혼을 달래는 비가 있다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때 죄도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해 제주바다에 버려진 시신이 조류를 타고 대마도에
떠내려 온 것을 이 곳 어민들이 수습하고 영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한다.
수습된 시신들을 서산선사 뒷산 대나무 숲과 태평사 뒷산에 안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가와 치 쇼이치(남.70)씨는 말한다
최근에 누가 세웠는지 모르지만 보살상을 안치해 놓았다
옮겨온글
1948년 제주 4.3사태 때 제주도에 버려진 양민들의 시체가 대마도까지 떠내려와서 시신을 거두어
태평사에 봉안하였다. 무연지제영비
이즈하라 시내 중심지에 나까무라 지구가 있는데, 헤이안시대에 만들어진 사무라이 거리이다.
‘니카라이 토스이’ 문학관으로 가는 나카무라지구 거리에는 옛날 저택의 돌담들이 보존되어 있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길이 마을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방화벽용으로 만든 돌담길이 아름답다
니카라이 토스이 탄생지’라고 쓴 돌이 세워져 있는 대문 안에 들어서니 일어와 한국어와 영어로 쓴 안내판이 걸려 있다.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기에 이렇게 한국어로 된 안내판과 이정표가 대마도 곳곳에 있을까 생각 되었다.
니카라이토스이
문학관(半井桃水館)
‘니카라이 토스이’는 1860년 12월2일 이즈하라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宗(소)가를 섬기는 의사집안으로, 아버지의 근무지인 부산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한국말을 잘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1875년 16세 때 영문학학원 공립학사에서 공부했고,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현지보도를
서울에서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1884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아사히신문에
<오시츤보>를 발표하고 이후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니카라이는 1882년에 <춘향전>을 번역해 아사히신문에 20회 연재하기도 하였다. 사실 히구치 이치요가 니카라이 토스이
보다 더 유명하였으며, 이치요의 연인이어서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토스이의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는 메이지(明治)시대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졌고, 2004년에 발행된 5000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이다.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토스이를 찾아 왔을 때는 이치요가 20살이었고 토스이가 32살이었다.
토스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된 이치요는 25살로 요절할 때까지 짧은 생애동안 계속 되었는데,
그 사실은 사후에 발표된 일기에서 밝혀졌다.
타고난 감수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여성의 감성을 표현한 천재작가인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으로는 섬세한
여성 심리를 묘사한 <매미> <십삼야> <나 때문에> 그리고 유곽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과 의식을 다룬 <흐린강> 등이 있다. 특히 17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와
<나 때문에> <해질 무렵 무라사키>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18은행
여기 대마도시청을 찾으려고 잘못들어 보건소까지 다녀왔다
택시기사 주유소 종업원에게 쓰시마 씨티 홀 어디로가냐 니까
역시 일본인들은 영어를 정말로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ㅎㅎ
킨제키죠(金石城)의 야쿠라문(櫓門)
덕혜옹주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31년 10월 덕혜옹주 부부가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팔번궁신사 경내에 ‘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 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를 건립했다.
그런데 1955년 두 사람이 이혼하자 주민들이 쓰러뜨린 후 방치하다가, 2001년 부산-쓰시마 직항선박인
씨플라워호 취항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전시용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파랑새처럼 날아가다
조국에서 잊히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덕혜옹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린 채 꿈꾸듯 살아갔다. 이런 그녀의
존재가 어린 시절 약혼할 뻔했던 김장한의 친형 김을한 기자에 의해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를 걸어 덕혜옹주의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답변을 받았다. 그는 영친왕을 만나고 나서야 그녀가 매월 1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병원을 찾아가 보니 옹주는 멍한 눈빛으로 독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한때 고귀했던 왕녀가 저토록
초라한 몰골로 변하다니…….’ 비감에 젖은 김을한 기자는 그 때부터 정부 요인들을 찾아가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영친왕의 귀국조차 용인하지 않던 속 좁은 이승만 정부가 덕혜옹주의 신변에
신경 쓸 리 만무했다.
1956년 8월 29일자 일본 마이니치신문에 덕혜옹주와 관련된 또 하나의 비보가 게재되었다. 당시 24세였던 그녀의
딸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지만 그녀는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이 흘러갔다. 한국에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과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고했고, 1961년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12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도쿄에 들렀다. 그때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를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간청했다. 그러자 망국의
왕족을 돕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익하다고 여긴 박정희는 전폭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1962년 정초에 고종황제의 손자 이우공의 부인 박찬주 여사가 둘째아들 이종과 함께 CAT 편으로 그녀를 데리러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1월 26일, 51세의 덕혜옹주는 38년 동안의 원치 않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
변씨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후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옹주를 돌봐주었다.
덕혜옹주는 곧바로 창덕궁 낙선재로 가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해 2월 8일 그녀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구황실재산법〉을 제정하고 왕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했다. 그 혜택을 받은 덕혜옹주는 7년 동안 병원에 머물다.
1967년 5월, 퇴원하여 낙선재에 들어갔다.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안에 있는 수강재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전 남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그를 미워하던 종실 관계자들이 매몰차게 쫓아냈다. 어렵사리 옛 아내를 만나러 왔던 소 다케유키는 허탈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1985년 77세의 나이에 쓰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 다케유키는 일본 왕실의 일원으로서 일왕의 명령에 따라 결혼했지만, 아내의 심화된 정신병 때문에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쓴 시에는 덕혜옹주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
덕혜옹주도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수강재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곳에는 옹주가 맑은 정신일
때 썼다는 한 장의 낙서가 남아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출처:한국사 인물열전에서
가이드의 열띤 설명을 들으며 다시한번 덕혜옹주를 생각하게 하였다
조선통신사 기념비
조선국통신사지비는 이번에 못보았기에 예전에 다녀올때 찍은 사진으로 대체하였다
대마도 민속박물관은 사진 촬영도 않되고 전에 보았는데 별로 볼것 도 없어 생략했다
성신지교린비
옆에 세워져 있는 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는 선조 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團) 467명을 시작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10여 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며 양국의 선린우호관계를 교훈삼아 21세기의 한일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운 비석이다.
우리팀이 오르는 아리아케산
한국에 털머위나 대마도 털머위나 다른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시미지야마 성터가 가까운줄 알았는데 꽤나멀다
스미지야마 성터는 옆지기가 오르기 어려운 길이라서 멀리서 사진으로만 담고
오르지 못했다 .위에 설명문 참고
봄에 피는 게 동백이 아닌가 여기에는 동백이 가을에도 피어있네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를 지나 가네이시성 정원으로 들어가본다
열린문으로 들어가니 저말리 정원을 가꾸시는 분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표정으로봐서
들어오면서 서명을 하고 들어오라는 것 같아 다시가서 기록하고 서명하고 들어왓는데
별로 볼거는 없는 것 같고 역사나 알아보자. 위에 가네이시성터 설명문 참조
옛 카네이시성 정원
반쇼인(万松院)은 소가(宗家) 20대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 요시토시(義智)를 기리며 1615년 건립한 보리사이다.
절문은 모모야마(桃山) 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며, 도쿠가와(德川) 역대 장군들의 위패와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이 있는 일본 3대 묘지중의 하나로 국가지정 사적이다. 성인 1인당 300엔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제 단풍들어가는 담쟁이 덩쿨
9세기 이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절이며 예전 조선 통신사가
숙소로 이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안내글을 적어놨습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고 조용히
사진 몇장 담는다 정원이 운치가 있고 예쁘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숙소로 사용한다고 하니까
예약만 하면 하룻밤 묵을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스파이 승려 현소 일본말로 겐소가 있던 절이라고 한다
승려 겐쇼 석탑
승려 겐쇼는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첩자와 같이 우리나라를 다니며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国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枢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부도탑이 있다
김성일선생시비(金誠一先生詩碑)
안동의 의성 김씨 문중에서 2000년 세운 비로서 조선의 명신이며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 이황의 제자이다.
나이 27세때 사마시에 들었고, 68년 선조 1년에 문과에 급제, 사국에 들어갔고 호당을 거쳐 부제학을
역임 하였으며, 90년 선조 2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선생이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었다.
부사 김성일은 일본 풍신수길을 만나보고 조선을 침략할 야욕이 없고, 전쟁을 벌일 기미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정사 황윤길 선생은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고 침략할 기미가 보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조정에서는 김성일보고만 믿고, 전쟁에
대비를 하지 않아서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황윤길선생의 혜안을 당시 조정이 정파가 다르다고 외면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김성일선생은 풍신수길앞에 당당하게 선비정신을 잃지않게 대국의 나라 체통을 지키며
풍신수길을 압도하였다. 그에 비해 황윤길은 굴욕적 자세로 임한 것이 흠이되었다. 이런 이론은
역사학계 연구에 의해 나타난 통설이다. 하지만 김성일선생은 임진난의 원인 중 하나가
자기에게 있다는 자괴심으로 왜란 발발 후 초유사로 종군, 죽산, 함양 등지에서 격문을 돌려
김면, 정인홍, 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순사 하였다.
시비는 서산사 경내에 있다
대마도 곳곳에 조용히 해주세요 출입을 금지 합니다 주차금지 별별스런
문구들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한국인의 방문으로 살아가는 대마도 이지만
또한 많은 불편을 격는게 현지인가 보다
담벽만 봐도 오래된 사찰이라는 게 증명이 되는 듯
내려 오면서 보니 이런 집들이 볼성사납게 여러채가 보인다 모두들 빈집들이다
한산한 시내거리 우리나라 관광객이 아니면 누가 찾아오랴
나가사키 신문 대마도 지국
티아라 쇼핑센터대마도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
이즈하라 중심부에 있는 대형 마트와 면세점이 있는 대마도 유통센타 내부도 돌아보고
전에 왔을 때는 이렇게 규모가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역시 한국인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라
마치 부산의 어느 대형 슈처마컽 같아 보인다 고객들도 거의 한국 사람이기에
수선사(修善寺-슈젠지)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으며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이다.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높이 9.5cm의 신라 동조여래현좌불상이 있으며 최익현선생의 순국비와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토츠안>의 묘가 있다.
수선사에 도착해 최익현선생 순국비를 보려 했는데 들어 갈 수가 없게 막아놓았다
수선사 창건에는 백제의 비구니와 관계가 있다고 전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고 한다
혹시나위에 있는가하여 올라가 보았으나 묘지들만 있고 보이지를 않는다
감귤나무가 가로수로 자리하고 있다 이태리 쏘렌토에서도 가로수로
자리하고 있던데 그만큼 따뜻한 곳이라는 말이겠지
다시 내려와 수선사의 장애물을 잠시 돌려놓고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전에 왔을 때도 공사관계로 못들어가 보지를 못했는데 ....
얼마 전까지 관리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죽고 이제는 빈 절로 남아 있다고 한다
최익현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알리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며
1906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서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대마도에 끌려오신 최익현 선생님은 일본인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으로 버티다가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의 해프닝
잠시 들어와 사진을 찍고 나와보니 뒤따라 오던 옆지기가 행방불명이다화장실에 갔나 하고 조금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 다시 올라가 보고 내려가 보고
오르랑 내리랑 몇 번을 돌아봐도 보이 지를 안는다 전화기도 로밍을 안 해서 꺼두라 했기에
전화를 할 수도 없고 일본은 치안이 잘되어 있는 곳이니 납치는 안 됐겠지 하며 부두로 달려가는데
산악회 회장 한테서 전화가 온다 부두에 도착 했다고 이제 좀 안심이들어 부두에 도착하니 적반하장
다시는 같이 안 다닌다고 화를 버럭 정말 어이가 없네 화낼 사람은 난데 ㅎㅎㅎ
걸음걸이가 나하고 차이가 나니 가면서 꼭 뒤돌아 보고 기다려 주고 같이 가는데 안 보이면 잠깐 기다리면
다시 내가 그 자리로 갈 텐데 살면서도 이렇게 안 통할 때가 더러 있다 서로 생각 차이겠지만 혼자 가려다
대마도를 안 가보았기에 같이 가려고 경비 들여 대려 갔더니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다
돌아오며 저녁 사주고 말도 걸고 내 사전에 없는 알랑방귀도 뀌고 겨우 풀었다
거북이를 닮았다는 타테가미바위 국제여객터미날여객터미날
우리가 오늘 왕복을 할 블루 쓰시마호 처녀출항이다 그래서 대폭 할인 하여 왕복 3만구천원
각종세금 만원 도합 사만구천원에 다녀왔다
부산 국제부두 야경
부산대교와 오른쪽에 우리가 타고온 블루 쓰시마호 이렇게하여 오늘 대마도여행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마치고 귀가를 한다 .왕복 6시간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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