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고,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수직사에서 바라본 운현궁
수직사
정문 우측에 위치한 수직사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당시의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행사 궁에서 파견한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수직사 내부의 생활용품들
우측에 보이는게 노안당이다 운현궁의 사랑채
권불십년(權不十年). 권력을 가졌던 초기 십 년을 빼면, 그에게 운현궁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운현궁에 연금된 채 살아간 세월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솟을대문에
이런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 문은 안과 밖이 바뀐 채 달려 있었다. 문이 거꾸로 달린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원군을 감시하던 일본이 대원군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빗장을
밖으로 둔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자기 집 빗장마저 빼앗겨 버린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이다.
이 문은 서울시가 보수 공사를 할 때 제 모습을 찾았다. 한때 운현궁에는 고종과 대원군의 전용 문인 경근문과
공근문을 포함하여 네 개의 대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 후문으로 쓰던 이 문만이 남아 있다
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노안당
노안당이라는 당호에서는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킨 늙은 아비의 흡족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노인을 편안하게 하는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당호는 『논어(論語)』의 「공치장편(公治長篇)」에 나오는
'老者 安之(노자 안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이곳에서 그의 삶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이 건물에서 그는 안동 김씨 등 당대의 세도가를 몰아내고 공평한 인재 등용과 서원 철폐로
이어지는 각종 법률 정비와 개혁 정책을 구상해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를 견제하는 주변 열강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에 의해 적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유폐된 채 살아야 했다. 만년에 눈을 감은
곳도 노안당 큰방 뒤쪽에 딸린 작은방이라고 하니, 그의 30년 정치 인생이 노안당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영화루
흥선대원군과 고종
돌사진을 찍는 부부들이 몇쌍이 보인다
구석에 자리를 잡아 전망을 확보하지 못한 사랑채의 누마루는 유폐된 채 답답한 세월을 견뎌 냈을 대원군의
분신처럼 느껴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이곳에 앉아 난을 치며 영광과 좌절을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김동인은 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시대의 풍운아로 그려 내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신문의 연재소설임을 감안하면, 백성들 사이에 그에 대한 추억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인재 등용에서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고, 동학혁명을
두둔하여 백성과 교감하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무량수각은 아미타불을 주불로모신 전각인데 여기에 현판이 왜 있을까
의아했는데 대원군이 추사의 글씨를 좋아해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을
모사한 것이라고 하며 대흥사 무량수각은 김정희 글씨라함
천하장안이 기거하던 건물이아닐까
천하장안
천하장안은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로 천희연 .하정일.장순규.안필중주 네명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흥선군의 개인 경호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일까지 도맡아했다 천하장안중 한명인 천희연이
창의 위에 청색호의를 착용하였다.
때로 한옥은 자신이 품은 역사 이야기만으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조선 시대를 마감하기
전 불처럼 일었다가 스러진 두 인물의 숨결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사적 제257호인 운현궁이다.
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갖기 힘든 것이 도시 한옥의 숙명이지만, 궁궐 목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전통 한옥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조선의 처음과 끝을 지킨 다섯 개의 궁궐이 모두 운현궁
주위에 남아 있다.
특히 창덕궁은 대원군 집권 당시 오랜 기간 고종이 머물던 곳으로 운현궁과 인연이 깊어,
함께 보면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대원군 이하응 그처럼 권력의 부침이 심했던 사람도 드물다. 세도가의 말 한마디면 왕족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던 시절, 그는 세도가의 기생에게까지 절을 해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처신이
그에 대한 세도가의 견제 심리를 누그러뜨렸고, 이하응은 조용히 사람을 규합하여 아들 명복을 고종으로
등극시킬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그가 섭정에 나서면서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노락당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나타난다. 평생 고생만 시킨 부인에 대한 대원군의 미안함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당호다.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뽀얀 기단석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인간적인 애틋함 때문이 아닐까?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다. 장차 명성황후가 되는 민씨가 고종과 혼례를
올린 곳도 이곳이다.
왕의 혼례를 이곳에서 치렀다는 사실만으로도 흥선대원군의 기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현궁의 낙성식(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에
참석한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에게 이날을 기념하여 글을 쓰게 했는데,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1자 5치(약 50cm)
밖에 안 된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대원군은 감지했을까?
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낙성식 축하 다례연
노안당과 노락당이 완공된 후인 1864년 9월 24일 고종이 대왕대비(조대비)와 왕대비(철인왕후)를
모시고 운현궁에 거동했다. 부대부인이 두 대비를 모시고 노락당에서 다례연을 베풀고 있는 모습이다.
명성황후의 부대부인 생신축하 방문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부모의 생신 병문안 상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시가를 방문 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대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명성황후는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 저고리 마고자를
착용하고 있다 세자는 오방정 두루마기 위에 사규상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좌에서 차례로 명성황후의 연두색 당의.부대부인의 송화색 마고자.세자의 사규상 오방장 두루마기
이준용의 전복 오방장 두루마기
부엌의 상궁과 나인
고종의 왕위에오른뒤 상궁과 나인이 운현궁에 배치되어 살림을 도왔다
상궁은 녹색 당의를 착용하였고 나인은 살구색 저고리에 청치마를 착용하고
앞치마를 입었다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년(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嘉禮)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운현궁의 역사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신분이 '새 임금의 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바뀌던 1863년 12월에
시작된다. 몰락한 왕족 이하응의 집은 이즈음 운현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운현'은 당시 그곳에 있던 언덕 이름이다.
12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이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 된 그해 겨울, 그는 춥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영광이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절정기의 운현궁은 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그리고 일본대사관까지를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점차 지금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고종 즉위 원년(1864년)에 지어진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뒤 지어진 이로당 정도다.
운현궁은 나라의 운명에 따라 소유자도 바뀌어 왔다. 조선이 역사에서 이름을 내린 뒤 정부 소유가 되었던 운현궁은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그의 후손에게 돌아갔다. 서울시는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후손에게서 이를 매입하여
199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노락당의 쪽마루에 해단 고급스러운 난간은 이곳이 한때 권력의 중심지였음을 말해 준다.
운현궁에서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하는 건물은 이로당(二老堂)이다. 부대부인(대원군 부인) 민씨는 이로당이
지어진 후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안채 구실을 하던 건물로, 노락당과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것도 여느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운현궁만의 특징이다. 건물 중앙에 ㅁ자형 마당을
두고 그 한가운데 굴뚝을 세워 중심성을 강조했다. 우리에게 굴뚝이 여근을 의미한다고 보면, 안채의 중심에
굴뚝을 세워 집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후손이 귀하던 당시 왕가의 처지를 애석히 여긴 때문이 아닐까? 지붕의
합각에 그려진 박쥐가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한다. 박쥐는 다산(多産) 다복(多福)을 뜻하는 동물이다.
대대손손 왕가의 번창을 기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출처: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
운현궁의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는 방문객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소다. 통로 위의 솟을지붕이 이채롭다.
경송비
고종이 어렸을 때 놀던 곳에 소나무가 있었는데 후손들이 잘 관리하여 왔으나
흥선대원군의 후손들이 궁핍하여 서울시에 운현궁을 넘길 때 경송비를
현위치로 옮겼다고함
흥선 대원군이 난을키울 때나 글씨를 쓰기위해서 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통이었다고 함 운하연지(구름아래 벼루연못)
또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물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라고도함
부대부인의 녹색원삼.흥선대원군의 적색조복
명성황후의 홍색 적의.고종의 현색 면복
척화비
상궁의 청록색 당의.명성황후의 홍색 노의
정이품 대부송
고종이 어린시절에 오르던 소나무로 왕이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에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렀다
관자: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단추 모양의 고리
밖에서 바라본 운현궁
고종의 가계도인데 참 복잡해 한참을 들여다 보아야한다
한바퀴 돌아보고 나오면서 셀프타이머로 인증을 하고 약속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어디로 갈까
망서리다가 바로 앞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북촌 한옥 마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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