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성균관은 조선 시대에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서울(現 종로구 명륜동)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 기관이다.
이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설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을 마치고, 서울의 경우 국립고등교육기관이랄 수 있는
사학(四學), 지방의 경우에는 관립고등교육기관인 향교에서 공부하면서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생원, 진사의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성균관은 고려 충선왕 때 당시 최고 교육기관이던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칭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공민왕 때 잠시 국자감(國子監)이라 불리다가 다시 그 이름을 회복하여 조선으로 이어진다.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한 뒤 종묘와 사직, 경복궁을 차례로 창건한 다음 1397년 2월에 도평의사사
(都評議使司)에 명하여 성균관의 터를 선정케 하고, 다음달에 공사에 착수해 이듬해 1398년 7월에
준공을 보았다.
서울 문묘 탕평비각[文廟 蕩平碑閣]
조선 제21대 왕 英祖가 펼친 蕩平策의 뜻을 成均館 儒生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세운 탕평비를
보호하는 비각으로, 英祖 18년(1742)에 건립하였으며, 영조가 親筆로 碑文을 썼다 하여
‘御書碑閣’이라고도 한다.
탕평책은 지나친 黨爭의 弊習에서 벗어나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官吏를 뽑는 정책이다.
圓形 礎石 위에에 원형 기둥을 세운 정면 1칸∙측면 1칸의 사모지붕건물오, 서울 文廟와
成均館의 여러 유적과 함께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碑閣 안에 보관된 탕평비에는 英祖가 成均館 儒生들에게 黨爭을 피하고
참다운 인재로 성장하라는 의미에서 직접 지은 碑文을 새겼다.
비문은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주이불차
내군자지공심 차이불주 식소인지사의) /두루 화합하고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라는 뜻이다
이것이 지금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현존하는 성균관의 출발이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점수 원점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출처:신천지뉴스
동삼문[東三門]
임금이 文廟 釋奠大祭 등 祭禮儀式에 참석하기 위하여 문묘에 출입할 때 사용하던 문으로,
‘御三門’이라고도 한다.
동삼문을 통과하면 임금이 통과하는 길인 御道가 두 줄로 나란히 깔려 있으며, 어도는
大成殿의 동쪽 基壇까지 연결되어 있다.
성균관의 역사와 제도, 운영규칙 등에 대한 내용이 담긴 正祖 9년(1785) 편찬된 <太學志>에
동삼문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大成殿의 동쪽 東廡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창고 건물인 東庫와 이어져 있다.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로, 각 칸마다 2짝씩 모두 6짝의 板門이 달려 있다.
왼쪽은 진사식당 오른쪽은 동제
명륜당(明倫堂)은 강학(講學) 공간의 중심으로 여기에서는 사서(四書) 오경(五經)을 기본으로
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역사를 배웠고 노자와 불교의 책은 금기시 되었다.
명륜당은 중당(中堂)과 좌우 3칸씩의 익실(翼室)로 구분되는 솟을집으로 중당은 맞배 지붕,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모두 마루로 되어 있으나 익실의 양끝은
원래 온돌방이었다. 명륜당은 익공계(翼工系) 건물로 중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이익공(二翼工)이고, 익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 앞에는 월대(月臺)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적이 좋지않은 유생은 이 바위에 올라가 스스로 벌했다고 하는 회초리 바위.
시계가 없던 그 시절 북소리에 맞추어 질서있게 생활을 한 유생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하다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뒤편에 위치해 있는데,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試讀)으로,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 장소(科場)로 사용되었다. 총 18칸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하여 지었다. 가운데 마루로 된 중당과 그 양옆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 날개채(翼室)로 구분하는데, 중당은 옆면에서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익실은 팔작지붕으로 중당보다 조금 낮게 구성되어 위계(位階)를 나타내 주고 있다. 지붕과 처마의 높낮이와 전체적인 건물의 균형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成均館)이라 알려져 있다.
명륜당 앞 은행나무 보름전까지만해도 아래와 같이 우람한 멋진 모습이었는데
낙엽이 지고나니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천연기념물 59호
,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尹倬)이 명륜당 아래에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었다한다.
기초가 튼튼하여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듯이,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므로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하였다.
여기는 서재인데 지금 수리중
동재와 서재(東·西齋)는 명륜당 앞에 마주하여 남북으로 20칸 길게 배치되어 있는 학생들의
기숙사 공간으로 건물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형식이다.
대성전 뒷모습
존경각
존경각(尊經閣)은 명륜당 뒤에 있는 성현들의 문집들을 보관하고 펴내는 곳으로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존경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4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담이 둘러져 있고 담 중앙에는 존경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육일각(六一閣)은 영조 19년(1743) 향관청 서쪽에 건립했으나 지금은 명륜당 동북쪽으로 이건 하였다.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의 기본 소양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례(六藝)로
문무(文武)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사청
제사준비를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재학당
전사청(典祀廳)은 성종 3년(1472) 대사성 李克基 요청으로 대성전 서쪽에 제사 음식을 차리는
동향6칸, 대학당(戴學堂)은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守僕廳)으로 남향4칸, 제기고(祭器庫)는
태조 7년(1398)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북향6칸 등 부속시설을 따로 설치하였다.
비천당(丕闡堂)은 성균관의 별당으로 대사성(大司成) 민정중(閔鼎重)이 진언하여 헌종 5년(1664)에
지어졌다.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제2시험장소(第二科場)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비천당(丕闡堂)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 큰 계책을 크게 밝혀) 억사흥정
(抑邪興正: 사악함을 억누르고 정의를 지킨다.)’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다시 복원하였다.
정록청(正錄廳)
명륜당 동쪽에 설치되어 있으며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로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심사 및 시정을 적어 보관 되었던 곳.
명륜당 동쪽에 남향 8간(間)으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되었다.
정록청이란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의 끝 글자(字)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이었다. 정록청 설립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관내의 서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대성전(大成殿)은 선조 34∼35년(1601∼1602)에 지은 건물로, 공자를 비롯해 증자·맹자·안자·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두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는 동무와 서무는
공자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선조 36∼37년(1603∼1604)에 세웠다.
동무와 서무 끝에서 시작하여 주위로 담장을 둘러 대성전 구역과 명륜당 구역을 나눈다.
삼문 앞 나란히 서있는 은행나무
대성전의 정문인 신삼문(神三門)과 신로(神路)
이곳은 대성전 사당에 모셔져 있는 신(神)만이 드나들 수 있으며 임금조차 이 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문은 일년에 두 번씩 제사지낼 때에만 개방 한다고 한다. 대성전에서 바라본 은행나무가 신삼문 옆에 두 그루 서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삼문앞 은행나무
묘정비각과 동무
묘정비각(廟庭碑閣)은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각으로 태종 10년(1410)에 변계량(卞季良)에게 작성하여 비를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 서향1칸 규모로 건립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인조 4년(1626)에 이정구(李廷龜)가 비음(碑陰)을 기록하게 명하고,
이를 이홍주(李弘冑)가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국 각지의 서원들은 강학공간이 앞에 있고, 제사공간이 뒤에 있는 前學後廟(전학후묘)의 구조을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이곳은 앞쪽에 제사공간이 있고 뒷쪽에 강학공간이 있다.
그러나 정문인 대성전 삼문은 제향때 외에는 늘 폐쇄되어 있어 동쪽 측면으로 들어가 돌아보아야 한다.
서무도 수리중
동무와 서무(東·西廡)는 대성전 앞에 마주해 있고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孔門) 제자 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가 해방 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埋安: 위패를 땅에 묻음)
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길상사
길상사는 우리가 잘 아는 법정스님이 1997년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말사(대법사)로 등록한 사찰이다.
송광사 서울분원으로 법정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길상사는 1987년 김영한이 법정스님 무소유를 접하고 이에
감명받아 당시 요정(음식점)이던 대원각 부지 7,000평과 지상건물 40여동을 기증받아 시설물을 그대로 이용하고
변경을 최소화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대원각 요정을 기증한 공덕주는 본명이 김영한(1916~1999)으로 불명은
길상화 보살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민족사의 암흑기인1916년에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뜻한 바가 있어 금하 하규일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기생에 입문했다고 한다. 1937년 천재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으로
불리웠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생전에 선가 하규일선생 약전 등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1955년 바위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였다.
그녀는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밭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법정스님에게
이곳을 절로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1997년 대원각이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한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 뜰에대 뿌려려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육신의 옷을 벗었다고 한다.
1000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내놓고도 후회되시지는 않나요?”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얼마나 그사람과 그의 시를 사랑했으면......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고 있는
절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안양교·안양문·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봉안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김영한 여사
사진이라도 몇장 남기고 가시지 겨우 이정도 그래서 도 소중할까?
김영한은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인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 <내 사랑 백석>을 펴냈다. 1997년에는 사재 2억원을 털어 백석문학상을
창작과 비평사 주관으로 제정하기도 했다.
백석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슴. 주막. 여우난골.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지장전(地藏殿),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길상사에서 유일하게 새로지은 건물(2004년10월17일) 1층은 공양간 2층은 도서관
'대원각' 안주인이었던 '김영한'씨가 마지막 눈을 감는날까지 머물렀던 '길상헌' 입니다.
요즘은 외부에서 객스님이 오실때 묶는 곳이거나 그리고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된다고
스님들의 처소
법정스님의 영정이 모셔진곳
법정스님께서 남기고가신 물품이라고함 참으로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신분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였다.
23살에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 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 밤 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 하자고 제의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 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고 한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 -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 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 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전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햇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올 곱게 간직했던 여인이였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 비평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사랑을 간직하는데는 詩쓰는 일 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 했다고 전 한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 더 알려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女 僧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이나
왠지 김영한 과의 사랑을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고풍상을 격으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모든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삶이 빛나듯이
두사람에 사랑과 인생 그리고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한다
우찌하면 평생을 올곧게 사랑 할 수 있을까
백석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최근에 백석의 시가 수능시험에 출제한 것을 보아서는
월북 시인이라고 외면 했지만 아마 복원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출처: 홍원님글에서
세심당
불교대학
관세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인 한국 조각계의 거장 최종태 씨가
불모(佛母)를 자청해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관세음보살님으로
불기 2544년(2000년) 4월에 봉안되었다고 합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상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자상
김영한 보살과 백석의 사랑 이야기를 진즉 알았지만 이곳을 찾아 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 낙산길을 걸으며 아래 보이는 길상사를 꼭 들려야겠다는 다짐을하고 숙정문에서 성북동으로
향해 드디어 길상사에 도착했다 꿈은 꼭 이루어진다(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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