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27일 공주의 지인 별장에서 남자들 4명이 지지고 볶으고 신바람나게 놀다가 서울로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다음날 28일 몇년전에 인왕산에서 숙정문까지 한양도성을 돌아봤는데 숙정문에서
동대문까지 낙산길을 걸어보지 않아 이번에 한번 걸어봐야겠단 생각으로 도전했는데 의외로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1번출구로나와 뒤돌아서서 50M정도 전진하여 우측으로 오르면
낙산으로 갈 수가 있다
흥인지문[Heunginjimun Gate, 興仁之門]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서울 도성 정동(正東)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동대문이라고 부른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霓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40 여년전 이곳을 지날때는 아래 축대도 위에 성 돌도 검정색 부분만 남아 있었는데
세월따라 복원하고 많이도 변한 모습에 감격스럽다고 해야할까 ?
중간중간에 이렇게 가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 신기하가만 하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산수유도 겨울을 격으며 명태가 황태가 되는 것처럼 쭈그리가 되겠지
어린이집 아이들도 소풍을 나왔는지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른쪽 창신동 봉제마을을 둘러보지 못해 아쉬움도 생기고
중간중간에 이런 암문이 성내와 성외를 연결해준다
자주동천(紫芝洞泉)은 단종 비 정순왕후(1440~1521)가 궁궐에서 쫓겨나 청룡사 입구에서 어렵게 살 때
빨래를 하던 터입니다. 이때 샘 주변에는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청룡사
낙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의 뜻에 따라 922년에 세운 절이니 역사깊은
사찰입니다. 한양 천도 후에 청룡사는 동대문 밖에 위치해 있어 왕실의 여인들이 주로 머무는 사찰이 됩니다.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가 청룡사에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때에 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가 경순공주의 머리를 직접 깍아주고 청룡사로 보냈다고 하니 비록 작은 사찰이지만
그 역사성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더우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사사당했을 때 단종의 비었던 정순왕후는
청룡사 옆 정업원이란 곳에 머물며 청룡사에서 불심을 키웠습니다.
청룡사 서쪽을 담을 따라 난 귀퉁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이 있습니다. 이곳이 정순왕후가 단종이
떠난 후에 60년간 살았던 집터입니다. 영조가 친히 글을 썼다는 영조의 친필 비석으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는 정업원 옛터라는 뜻입니다. 영조는 단종을 위해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모두 복권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청룡사를 방문하여 정순왕후의 절망과 슬픈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히 비문을 썼습니다.
정순왕후 송씨는 태인현 시산리(현 전북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에서 태어나 14세에 단종과 결혼하여
18세에 생이별을 하고 쫓겨나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며 매일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유배되어 있는 영월을 행하여 통곡을하며 살았다고 한다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
이 비는 1771년(영조 47년) 서울 종로에 건립된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로 영조(英祖)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도 쓴 것으로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송씨는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동안 그의 명복을 빌었다. 정업원은
여승방(女僧房)으로 원래 창덕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성 에 있는 것인데, 성 밖에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곳에 비를 세우고 비각도 짓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 송씨가 동대문 밖인 이곳에서 지냈던 사실과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던 일이 얽혀서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낙산공원
낙산구간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낙산(124m)은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낮다. 생긴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겨 낙타산, 타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낙산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여 산책하듯 걷기에 적당하다. 특히 가톨릭대학 뒤편 길을 걷다보면 축조 시기별로 성돌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볼 수 있다.
안산과 인왕산 백악산이 차례로
왼쪽 보현봉과 오른쪽 백운대와 인수봉 같고
왼쪽이 오봉 오른쪽이 수락산 아닐까?
남산의 서울타워
낙산공원 공연장
고욤나무
카토릭대학교 성신교정이 아닐까?
비우당은 ‘비를 피할 만한 집’이라는 뜻으로. 이수광(
그는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썼습니다. 또한 이 집은 이수광의 외가 5대 할아버지인 유관 대감이 살았습니다.
그는 정승답지 않게 낙산의 지봉(芝峰) 아래인 이곳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수광의 호가 지봉(芝峰)이 된 이유입니다.
유관은 비가 새서 우산으로 빗물을 막고 살았습니다. 그는 “우산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은 새는 비를 어떻게
막을까”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했던 청빈한 선비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호가 비우당(庇雨堂), 곧 비를 피하는 집입니다.
돌들이 풍화 작용에 의하여 봉괴되는 곳을 금속 지지대로 고여놓은 모습
혜화문 (동소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에 설치한 문으로 동소문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한양도성 전시관
성균관으로 가는 길초에 어느집에 빨간 감이 주렁주렁 참 보기 좋다
혜화동 전시 안내센타를 지나니 성벽이 조금 있을뿐 아래처럼 훼손돼 겨우 흔적만 남아 있다
위에 사진도 어느 주택의 담장으로 명맥을 유지
성벽을 이용한 교회의 담장
성이 끈기고 주택의 축대로 사용되는 안타까움 이곳은 국가 땅이 아닌지?
경신고등학교
이구간까지는 성벽이 복원이 되지 못하고 교회나 학교의 그리고 주택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와룡공원으로 진입 여기서부터는 성벽이 복원된 구간이 시작된다
와룡공원의 단풍은 아직도 건재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와룡공원의 가을풍경
와룡공원을 지나 말바위와 숙정문 쪽으로 이동을 한다
애기똥풀 같은데 이꽃은 봄에 피는 꽃이 아닐까?
성북동이 예전에 부자마을 이었지만 이렇게 낙후된 곳도 함께 존재한다
이정표를 보니 심우장이라고 있는데 거리가 조금 있는 것 같아서 포기하고 한용운 선생의
흔적을 여기에 옮겨본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서을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번지 1호, 2호)
심우장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 만해 한용운
(韓龍雲 : 1879~1944) 선생이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빈촌이 된 성북동의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면 판자집들에 섞여 심우장이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북향으로 지은 기와집인 심우장과 관리사로 사용하고 있는 집이
있고, 정원에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집을 북향으로 지은 것은 남향으로 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본다고 하여 그렇게 지은 것이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고 부엌 뒤로는 식사준비를하는 찬마루 방이 있다.
3.1운동 이후 33인 중에서 모두가 일제에 전향을 했지만 만해 한분만은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진정한 애국자였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근대의 대표적인
서화가였던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이는 소를 찾아 다니며 깨우침을 얻는다는 불교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한용운은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려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기도 하였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씨가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이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한용운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땅을 매입한 뒤 1933년 심우장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청각[三淸閣]
1972년 건립된 1970년~1980년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표되던 곳이다.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1999년 말 건물과 부지를 인수한 화엄건설(주)이 고급빌라를 짓기 위해 관할 성북구청에 건축허가를 신청하였으나
문화재 보존여부에 대한 판단문제로 건축허가 결정이 유보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인수하여 관리하고 있다.
성북동은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서울의 재벌들이 많이 살던 곳이며
그후로 한남동이 재벌부자 동네로 탈바꿈했다
여기서 탐방 신고를 하고 표찰을 받고 나는 숙정문에서 내려와 반납을했다
삼청각을 뒤로하고 길상사로 향하는데 이정표에 돌문화공원이 150m라 해서 찾아보았으나
네비도 뭐가 잘못됐는지 나오지를 않는다 대사관로라서 왕래하는 사람들도 없고 경찰에게 물어보니
이리저리 가르키는데 도저히 내 실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빙빙돌아 길상사로 내려간다
이렇게하여 서대문(돈의문)에서 동대문 (흥인지문)까지 세번에 걸처 답사를 끝냈다
다음기회에는 동대문에서 남대문까지 그다음에는 남대문에서 서대문까지 두번에
걸처 한양도성을 한바퀴 돌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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