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트라이엥글을 돌아보고 오후에 고산족이 모여사는 오족 마을로 왔다
아카족.야오족.라후족.빠덩(빠동)족.카렌(까리양)족.빠루앙(빠룽)족등 6개 부족인데 빠덩족이 카렌족의
일부이기 때문에 5족으로 표기한다고함 그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목에 링을차는 부족이 카렌의 빠덩족임
빠덩족이라해서 모두 목에 링을차는 것은 아니고 여자에 한해서만 링을 찬다고함
빠동은 Long Neck 즉 긴목을 의미함
태국의 고산족
태국으로 소수민족들이 이주한 것은 주변국의 공산화 (중국 1949년, 미얀마 1962년, 라오스 1975년)와 관계가 깊습니다.
멀게는 티베트 고원에서 가깝게는 미얀마까지, 살던 곳도 제각각인 민족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남하하면서
현재는 태국에 정착했습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여 태국말로 '차우 카오'라 부릅니다. 산악 민족들은 대부분 해발 600-1,200m의 산악 지대에
거주합니다. 산악 민족은 80만명 정도로 3,500개의 산악 마을에 분산되어 생활하며 태국 내에 거주하는 산악 민족은 20여개
종족인데 다수를 이루는 카렌족, 몽족, 라후족, 아카족, 미엔족, 리수족의 6개 종족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태국 땅에 정착했는데도 태국인처럼 살기보다는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며 종족마다 고유의 언어와 종교, 복장,
생활 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불리한 입장이고 이동도 일정 지역 내애서만
허용될 뿐입니다.
산악 민족은 태국에만 정착한 게 아니라 라오스와 베트남 북부 지방에도 대거 정착해 생활합니다. 동일한 종족끼리 같은
언어와 생활 풍습을 보이기 때문에, 정치적 국경에 의한 국적보다는 어떤 종족인가가 그들의 정체성을 좌우하는 요소가 됩니다.
즉, 몽족이라면 태국에 살든, 라오스에 살든, 베트남에 살든 국적에 관게없이 몽족 공통의 전통 복장과 언어를 사용합니다.
태국에 정착한 산악 민족들은 중앙 정부와 단절된 채 아편 재배 등을 통해 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태국 정부는 산악 민족의 지위를 인정하며 태국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며 특히 왕실 주도
아래 산악 민족의 생활 수준도 많이 향상된 편이다. 덕분에 아편 재배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카렌족 빠동이 목에 두르는 저링은 적은게 2.5kg 큰게4kg정도 무게다
여성이 태어나 6살이되면 황동링을 차기 시작하여 그길이를 계속 늘려간다
성인 평균 황동량은 4kg 이걸차고 생활하니 밭일이나 힘든일은 할 수가 없고
배짜는 일이나 바느질등 앉아서 하는일만 한다고함
입구에는 이렇게 아카족.카렌족.카요르족.야오족.라후족의 사진이 붙여있다
여기는 태국 정부가 만든 오부족이 모여살고 있다
마을에 들어갈 때 지팡이 같은 대나무를 하나씩 들고 가는데 이것은 수풀이나 뱀을 퇴치하기위한 것이라고
제가 90년도에 태국 갔을 때에 시골 화장실이 이렇게 물만 잇고 화장지가 없던 것을 보았는데
여기에도 그런식으로 물로해결한다
대나물를 저렇게 집단으로 심는 것은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기 위함이라고한다
처음접하는 마을의 집 이마을은 모두가 자급자족을 한다고 한다
여기도 포클레인으로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연못은 메기를 기르는 곳이라고
남녀 모양의 목각 인형은 아카족의 조상신인 ‘로콩 아다’(남성신)와
‘로콩 아마’(여성신)로 어떤 것들은 성기과장을 넘어 남녀의 성교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기도 한다.
원시사회에서부터 이어져 온 성기숭배사상과 다산사상에서 유래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로콩 아다와 로콩 아마를 신성시 여겨,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이 나무 인형을 건드리게 되면
자신과 마을에 큰 불행이 닥친다고 믿는다.
아카족마을
아카족은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이주해 온 종족으로 매싸이와 치앙라이의 해발 1,000m 이상의 산악지대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고 태국에는 약 5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아카족의 여자들은 은화나 은세공 장식, 단추 등을 단 무거운
모자를 쓰고 있으며 가슴 밴드에 짧은 까만 치마를 입고 종아리에는 각반을 찬 모습을 하고 있다. 모자를 벗으면
악령이 머리로 들어온다고 믿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물론 잘 때도 쓰고 잔다.
아카족 여성은 온화하고 소박하며 부지런해 담배나 쌀, 각종 야채와 과일 등을 재배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모든 물건에 혼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을믿기 때문에 마을에도, 산에도 심지어 빛이나 바람에도 혼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신성시 되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일은 절대 삼가 하며 마을 입구마다 신성하게 여기는
문을 세워 놓고 있으며, 커다란 그네가 있는데 그 그네는 8월에 열리는 마을 행사에 사용된다
아카족 남자들은 1명의 부인만을 가질 수 있으며, 대부분 대가족을 이루고 산다. 집안 공간은 남자들의 공간과
여자들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결혼한 부부는 본가에서 분리되어 나와 따로 집을 갖는다.
아카족 여성은 부드럽고 소박하며 부지런해 농사는 물론 집안 일까지 한다.』고 미리 설명한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괸 1층은 텅 빈 상태로 땔감과 농기구를 저장해 놓았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대나무를 쪼개서 엮은 것으로 방바닥과 벽을 만들고 나무로 지붕 틀을 얹은 다음 코코넛 잎으로 지붕을 덮은
고상식 가옥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방울같은 걸 달고 있으면 유부녀 혹시라도 만지면 절대로 안된다고한다
이렇게 민밋하고 뾰쪽한 모자를 쓰고 있으면 처녀라고함
쌍둥이와 짝수에 대한 전설
아카족들은 짝수를 저주의 숫자로 믿는다. 그래서 개를 제외한 모든 동물이 새끼를 날 때 홀수로 나면 살리고
짝수를 나면 모두 죽인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여자가 결혼하여 쌍둥이를 낳으면 조상신이 준 아이가 아니라고
여겨 화로의 재와 왕겨를 섞어서 아이의 입을 틀어막아 죽이고 쌍둥이를 낳은 여인은 마을에서 쫓겨나야 하며,
부정을 탄다고 1주일간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부부관계도 금한다. 쌍둥이나 기형아를 낳은 집은 마을의
가장 아래쪽, 물과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하고, 마을 한가운데로 다니거나 마을 공동 우물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쌍둥이나 기형아를 낳게 하는 나쁜 영(靈)이 전염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하자 지름 15cm, 길이 1m의 커다란 대나무를 바닥에 놓인 나무에 내려치며 노래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아카족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작은 심벌즈와 징을 치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 춤은 마을 청년들이 여성들을 지켜주기 위해 밤새워 대나무로 나무를 두드리면 나쁜 영혼과 대치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카족은 춤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춤은 그들의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약 2000년 전 중국 운남성 남부 지역에 살던 아카족은 다른 민족들과의 내분을 겪으면서 19세기경 점차 미얀마와 베트남
등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미얀마 지역으로 들어왔던 일부가 다시 태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아카족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부족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전통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이 생겼고, 꼭 알아야 할 것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카족은 새해가 되면 이틀 동안 모여 신화와 전설이 깃든
노래를 부르고, 또 한쪽에서는 춤을 췄다고 한다. 커다란 대나무를 나무나 바닥에 내려치면 울리는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아카족 마을 족장 아직 총각이라고한다
미엔(Mien)족 (야오족)
: 산악 민족 중에 스스로를 귀족층이라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중국의 쓰촨성, 구이저우성에서 생활하던 미엔족은 한족 황제와
결혼했을 정도로 중국 주류에 편입됐던 민족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이 심해지자 중국 남부,
베트남, 라오스, 태국으로 이주해 생활하고 있습니다. 태국-라오스 국경 지역인 난, 파야오, 치앙라이 지방에
약 4만5000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태국에서는 "야오yao"라고 부릅니다.
산악 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사용합니다. 2,000년 이상 중국 남부에 살았기 때문에 한자를
사용하며, 중국에서 생활했던 탓에 도교를 주종교로 믿습니다. 하지만 태국에 정착하면서 기독교와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다른 산악 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태국 사회에 융합된 민족이지만 전통 문화와
생활방식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얼굴 생김새도 화교(중국인)들과 비슷합니다.
농경에 의존하는 미엔족은 자수 제품, 종교용 걸개그림, 중국풍의 그림을 판매해 부수입을 올립니다.
미엔족 의상은 주홍색 털실로 만든 옷깃 떄문에 쉽게 구분됩니다. 검은색이나 감색 상의에 붉은 계통의
옷깃을 장식합니다. 머리에 쓰는 검정 스카프에도 자수를 놓는데, 바지에 비해 자수 장식은 단순합니다.
참고로, 미엔족 여성들은 결혼 전에 자수를 꼭 배워야 합니다. 심지어 자수 솜씨로 결혼 상대가 결정될 정도입니다.
야오족의 기념품점
야오족의 주거환경
야오족 여성은 자수와 바느질에 능하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1년에 바지 한 벌 정도를 만든다.
바지 외에도 겉옷, 허리띠, 모자, 터번 등을 자수로 장식한다. 전통적인 야오족 여성의 정장은 자수로 장식된 헐렁한
검은색 바지에 긴 자켓을 입고 자수장식이 된 진홍색 띠를 허리에 두르고 머리에는 자수장식이 된 검은색 터번을 두른다.
상의의 목 주변은 붉은 실을 떠서 주름으로 장식한다.
야오족 남성 또한 은세공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새해 첫날에는 온갖 은장신구로 치장하는데 은은 야오족에게
부의 상징이다. 야오족에게는 새해 첫날 만큼이나 결혼식이 중요한 날인데 신랑과 신부는 특별한 성복을 입고 각종
의식에 참여한다. 특히 신부의 머리 장식은 의복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신부의 집과 신랑의 집에서 연회가 열리며
신랑과 신부는 야오족 점성술에 따른 궁합을 본다
라후족의 공동 휴식처인듯
라후족
태국 북부도시 치앙라이 시내에서 3시간정도 떨어진 산속에 거주하는 민족. 태국 북부와 중국 운남성 등지에
넒게 퍼져 분포하고 있다. 라후족은 원래 티벳과 가까운 중국의 운남성일대에서 살았다. 후에 중국 정부당국과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족의 압제에 견디다 못한 대부분의 라후족은 미얀마로 넘어갔고,
그 일부는 태국과 라오스로 넘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라후족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태국으로 넘어왔다.
오늘 날 대부분의 라후족은 북부지방인 치앙라이, 치앙마이, 매홍손 등지에 살고 있다.
라후족의 태국식 명칭은 '무서 (또는 무수르)' 인데 이는 "사냥꾼"이라는 뜻의 미얀마어에서 따온 말이다.
하지만 모든 라후족은 무수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라후"라고 부르고 있다.
라후족에는 라후 니(붉은 라후), 라후 나(검은 라후) 라후 시(노란 라후) 라후 푸(흰 라후) 및 라후 셸레 등의
하위부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언어구조가 우리와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라후족 언어 | 우리말 |
나(1인칭) | 나 |
너(2인칭) | 너 |
나흐(1인칭복수,We) | 우리 |
너흐(2인칭복수, You) | 너희(당신들) |
라후족 | 우리말 |
나래 너 서울로 까이요? | 나와 너 서울로 갈래? |
나래너 타 도죠베요 | 나는 너 좋아해 |
나터 너터 | 나도 너도 |
서울에 방콕까가 까이요 | 서울에서 방콕까지 가요 |
나래 서울로 까이요 | 나는 서울로 가요 |
까이라 라베라 | 가려나 오려나 |
오빠 | 아빠 |
나흐 어이언니 | 우리 언니 |
나게 라오 | 나에게 와요 |
분명히 우리와 많이 닮았다. 또다른 우리와 닮은 사실. 그들이 마련한 고사상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고사 음식으로 찹쌀과
깨를 섞어서 만든 인절미와 웃는 돼지머리를 사용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고사상에 돼지 머리가 놓이면 마을의 최고령
노인이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그러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어울려 춤과 노래로 즐겁게 마무리를 한다.
서울대 이현복 교수의 말
"일설에는 고구려가 망할 때,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 10만명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이 중국을 거쳐서 태국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으나, 자세한 것은 연구가 이루워져야 한다. "
첫째, 인절미 만들기
절구통에 찐 찹쌀을 넣고 깨를 묻힌 덕방아를 넣고 찧는 것이 우리의 인절미 만들기과 똑같다.
둘째, 어린이의 놀이(공기놀이)
공기놀이라는 것을 하는데, 작은돌들을 던지며 노는 것이 우리의 공기놀이와 아주 똑같으며, 1단에서 5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동일하다.
셋째, 비석치기(사방치기)
우선 손 바닥 뒤집기로 편을 정하고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한다. 편이 정해지면 손으로 정교하게 굴려서 맞추면
이기는 놀이로 우리의 비석치기(사방치기)와 동일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편평한 돌을 이용하여 놀이를
하는데 비하여 이들은 열대의 납작한 열매를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이들은 우리의 전통 팽이치기와 같은
놀이를 하면서 논다.
넷째, 라후는 고생을 해서라도 부슬부슬한 안남미보다는 찰기가 있는 찹쌀로 지은 밥을 먹으려 든다. 때문에 라후족의
마을에서는 항상 찰기진 밥을 먹을 수 있기도 하다. 라후족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된장이나 김치 등도 있다.
(물론, 고춧가루가 없는 하얀 배추절임같은 것이다. 한국의 김치가 붉은 것은 고춧가루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부터이다.)
관광객이오면 민속춤으로 환대를 하는데 표정을 보면 매우 형식적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강강수월래와 같은 춤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중에 한명이 병이 나면, 사람들은 그 주위에 모여 춤과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하여, 악귀를 쫓아 낸다.
마을의 부족장은 제사장의 역할을 함께 하여 결혼이나 장례를 주관하고, 길흉을 점치기도 한다.
부족장의 권한은 막강하여, 마을은 부족장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따라서 부족장이 죽거나 새로운 부족장이
들어서면, 마을의 이름도 바뀌게 된다.
- 라후족은 콩을 쑤어서 만든 된장을 먹는다. 우리나라의 된장과 거의 흡사한 것이며, 야채를 소금에 절인 '와찌'
라는 것도 먹는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김치와 비슷한 것이다. 명절이 되면, 찹쌀을 대나무통에 넣고, 숯불속에
넣어 밥을 쪄 먹는다.
라후족의 음식은 김치·된장 등 우리 음식과 비슷한 것이 많아 잘만 찾아 먹으면 식사때 고민스럽지 않다.
불편한 점은 무엇보다 고도가 높아 도착해 며칠동안은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머리가 띵하고 무기력해진다
잊혀진 우리 핏줄 아카 라후 리수
소수 민족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태국의 고산족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 군사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를
잡아가 중국 남쪽 광막한 땅에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학자들뿐 아니라 소수민족 출신의 호례극이라는 중국 학자도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이들 고산족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그랬듯이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결혼 때 닭을 옆에 두고 식을 올린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은 것도 우연으로 돌릴 수만 없는 고구려 옛 풍습 그대로다.
아이를 안고 있어 사진 찍어도 되냐니까 찍으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과 거의 흡사하다
북한 사투리 '나 메홍손 가메'
학자들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한국 여행자들이라면 이들이 우리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절 때 색동옷을 입는 것이 그렇고 태국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끈기있는 찰벼를 산간에서 재배하는
것도 그렇다. 된장이나 김치를 담가먹는 것까지 우리를 닮았다.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이들의 말이 중국이나 태국말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고 우리말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라는 것이다. 라후족이이나 아카 리수족이 한결같이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하는 것을 들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지구상에 한국인 말고 어느 민족이 "나"를 "나"라고 하고 "너"를 "너"라고 할 것인가 말이다.
"나 매홍손 가이메이" 라후족의 말로 "나 매홍손에 간다"는 뜻이다. 이 말을 어찌 들어보면 "나 매홍손 가메" 라는
이북 사투리만 같지 않은가? 어쨋든 이들을 만나면 우리와 같은 핏줄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들을 우리 민족이
아니고는 세계의 어떤 민족과도 동일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의 유사점
- 외모도 태국보다는 우리네와 더 비슷했다.
- 집안의 아궁이를 쓰는 것도 우리네와 닮았다.
- 명절 때 색동옷을 입는 것
- 태국 사람들은 별로 좋아 하지 않는 끈기있는 찰벼를 산간에서 재배하는 것.
- 된장이나 김치를 담가먹는 것까지 우리를 닮았다.
- 이들의 말이 중국이나 태국말처럼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 아니고 우리말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라는 것이다.
- 라후족·아카족 등이 개고기를 먹는다.
- 라후족도 아기를 낳으면 문밖에 인줄을 쳐 일정기간 외부 사람들이 집안으로 못 들어오게 한다고 했다.
라후족의 인줄은 지푸라기를 사용해 왼새끼를 꼰 후 새끼줄 사이사이에 창호지·숯·빨간고추(사내아이의 경우)
·푸성귀를 꽂아 놓는다.그런데 탐사팀을 놀라게 한 것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인줄에 푸성귀를
꽂았다고 하는데 라후족은 지금도 푸성귀를 꽂는다는 사실이었다 .라후족에 대하여는 라브선님의 글에서캡처
4개월째 비가 안와서 물이 탁하고 적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수영도하고 즐기는 곳이리고 한다
카렌 (karen)족
: 태국에 정착한 전체 산악민족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태국 최대의 산악민족입니다. 중국과 미얀마(버마)에서 태국으로 이주한
민족으로 50만명 정도가 태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넘어온 난민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태국-미얀마 국경지대 (매홍쏜,매쏫, 깐차나부리, 치앙라이)에 카렌족 마을이
몰려있습니다. 태국에서는 까리앙kaliang 또는 양yang이라고 부릅니다.
: 카렌족은 산악민족 중에는 비교적 저지대에 살긴 하지만 해발 약 600m의 산악지대에 살기 때문에 거주 형태는 고상식을 띱니다.
고상식이란 경사가 있는 곳에 집을 지을 때 이용되는 건축양식으로 땅바닥에 기둥을 세워 집의 높낮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카렌족은 고상식 가옥에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방식을 취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핵가족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노인을 공경하는 사상은 여전해 마을의 중대한 결정은 노인들에게 물어 결정합니다.
제사 또한 철저히 지키는 편입니다. 농경에 의존하는 민족으로 거주하는 마을 내에서 일정한 경작지를 번갈아 경작합니다.
코끼리를 보유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것이 코끼리 트레킹에 사용되면서 카렌족들에게 수익 창출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종교적으로 무속신앙의 일종인 정령신앙을 믿습니다. 농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땅과 물에 대한 숭배가 강합니다.
하지만 태국으로 지속적으로 편입되면서 불교 신자가 증가하는 추세이며 또한 유럽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한 카렌족도
많다고 합니다.
카렌족은 네개 종족으로 구분됩니다. 스카우족 Skaw Karen (White Karen), 푸오족 Pwa Karen 파오족 Pao karen (Black Karen),
카야족 Kayah Karen (Red Karen)으로 분류되는데, 그중 스카우족이 80%로 가장 많습니다.
스카우족의 전통 복장은 흰색 원피스이기 때문에 백카렌 White Karen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흰색복장은 미혼 여성 전용이며,
결혼한 후에는 싸롱(기다란 치마)에 짧은 윗도리를 입습니다. 기혼 여성은 미혼 여성보다 진한 색의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귀를 뚫어서 큰 귀고리를 넣어서 다닙니다
이분은 나이도 있고 연륜이 쌓인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링의 숫자로봐서
카렌족의 배짜는 모습
가이드에 의하면 이여자는 20세 정도라는데 남편이 오면 때리고 수공예로 모은 돈을
빼았아 간다고한다
카렌 롱넥 (karen longneck)
일반적으로 카렌족이라고 불리는 목긴 고산족은 빠동족이라고도 불리는 레드 카렌족의 하위부족입니다.
이들은 미얀마를 떠나온 난민이지만 태국의 관광상품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목이 길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황동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걸이의 무게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6-20kg이며 길이는 30cm 정도 됩니다. 여자들만 목걸이를 차는데
여섯살이 되면 시작해 매년 한두줄씩 늘어납니다. 이 목걸이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다.
긴 목을 가지는 것이 미의 기준이라는 설과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도록 보호하려는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이나 다른 종족 남자들에게 첩이나 매춘부로 팔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유력합니다.
다른 종족의 남자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주어 사전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라는 말도 있습니다.
밖에서는 배를짜고 장사를하고 안에는 주거하는 방이라고한다
여기는 한칸짜리 교실이다 이마을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이라고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다
10살정도 되는 아이인데 목을보니 정말 애처럽게 보인다
사진 찍는것도 기꺼이 응해준다
저런것을 다 자기들이 짠다고하니 대단한 솜씨들이다
비가 안오니 커피나무도 시들시들
대나무로 집을 짓고 있는데 인부는 미얀마에서 대려온다고 한다 인건비 때문에
태국정부에서 관광객을위하여 이렇게 여러부족을 한데 모아 사이좋게 살으라고
마을을 형성해 입장료를 받고 수공예품을 팔아 생계유지 하게큼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하여 5부족마을을 돌아보고 이제 치앙마이로 돌아갈 시간이다
Nana Mouskouri: La chanson de Solveig (from Peer Gynt, Edvard G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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