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강화군이 60~70년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대룡시장의 특성화를 위해
‘가보고싶은 추억의 교동섬 만들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군은 10억 원을 들여 6070거리, 와글와글 거리, 제비거리, 별밤거리 등 대룡시장 내 골목길을 특성에 맞게 조성하였다.
또한, 숲속 산책로, 우물터, 쉼터, 교동초 담장 스토리텔링 등 대룡시장 주변까지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해 힐링, 휴식, 관광이 어우러지는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8/2)
대룡시장
6.25 전쟁 때 황해도에서 교동도로 월남하였던 실향민들이 휴전 이후 북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황해도를 추억하는 마음으로 황해도 연백군에 있다는 연백시장을 본따서 만든 재래시장이다.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시장이 만들어져
교동대교 큰길을 따라 4~5킬로미터를 가면 대룡시장이다. 교동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지방의 읍내보다도 작은 규모다. 골목은 짧다.
길이는 400미터 남짓. 빠른 걸음으로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골목은 어른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폭이다.
칠이 벗겨진 창틀, 손으로 꾹꾹 눌러선 입간판, ‘선팅’이 벗겨진 유리문…….
붉은 보도 블록이 깔린 길은 울퉁불퉁하다. 짧은 골목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미장원과 분식집,
통닭집, 전파사, 시계점,이발관, 신발가게, 잡화점 등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간판이다. 모두가 ‘그 때 그 시절’에나 보았을 법한 낡은 것들이다.
글자가 지워진 것도 있고 덧칠된 것도 있다. 가게 이름도 간판의 모양만큼이나 정겹다.
‘민욱이네 담배 잡화’, ‘돼지네 식품’, ‘희망소리사’, ‘중앙신발’, ‘연지곤지’, ‘임득남 미용실’, ‘
붉은노을 호프 치킨 와글와글 식당’ 등등.촌스러운 간판 이름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을 전후해 교동도와 같은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던 연백군민
3만 명이 교동도로 이주했다.
당시 교동도 본래 인구가 9000명이 채 되지 않던 때다.
3만 명이나 되는 연백군민들은 생활 기반이 전무하던 교동도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야 했고 이 가운데 절반은 강화도와 평택 등 인근
경기도 지역으로 다시 이주해야 했다.
교동도에 남은 연백군 실향민들은 한국전쟁 정전과 동시에 휴전선이 연백군과 교동도를 갈라놓으면서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교동도에 정착한 연백군 실향민들이 하나 둘 모여 생계수단으로 만든 시장이
지금의 대룡시장이다.
8월 2일 찾은 대룡시장은 마치 영화 촬영 세트장으로 일부러 꾸며 놓은 듯한 인상을 던져줬다. 1960~80년대 전성기에
200여 개나 되던 점포는 실향민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수자가 없어 폐업돼 현재 운영 중인 점포는 50~60개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발소를 운영하는 올해나이 81세 지광석 할아버지 부인을 여의고 혼자 살고 있는데황해도
연백군 호동리에서 나고 자라 13세에 북녁 땅을 떠나 여기에 정착 18세에 이발을 배워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계신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섬 교동도. 하지만 TV 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되면서 대룡시장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가장 출세한 건 ‘교동이발관’이다. 강호동과 은지원이 여기서 머리를 잘랐다. 방송을 보고 멀리 서울에서 두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러 오는 단골도 생겼다.
대룡시장에 단 하나 남은 약국. 시장에서 가장 연장자이기도 한 주인장 나의환(85세) 할아버지는 이 약국을 55년이나
운영해 왔다. 반 백년이 넘는 세월을 증명하듯 약국 곳곳에 옛 정취가 가득하다.
나의환(85) 할아버지와 세 살 터울의 할머니는 이곳에서 55여 년 째 약을 팔고 있다.
섬에는 처음 다섯 군데의 약방이 있었는데, 약을 팔던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서 동산약방만 덩그러니 남았다.황세환 시계점2016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가게에서 사용하던 시계들이 가득하고 할아버지를 닮은 밀랍인형이 가게
안에 서 있다.대룡시장의 시간들은 참으로 천천히 더디 흐르고 시계방 안과 밖에 걸린 시계들의 시간들은 멈춰 서 있다
중앙신발’ 좌판에 샛노란 아이 고무신이 살포시 놓여 있다.
조가훈(75)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나고 10여 년 후에 서울에서 교동으로 왔다.
‘세끼 밥 먹고 살면 됐지’. 교동도가 고향이나 다름없는 할아버지는
이 섬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유쾌한 광고 포스터로 단연 눈길을 끄는 신발가게. ‘조선 나이키란? 고무신입니다’
라는 재미난 글귀와 옛 추억을불러일으키는 엿장수 그림이 가게 문짝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모두 주인장의 솜씨다.
가게 안쪽은 이름답게 운동화, 장화, 고무신, 구두, 슬리퍼 등 각종 신발들로 빼곡하다.
이처럼 중앙신발은 지난 35년간 교동도 주민들의
발을 편하게 해 줬다
평일인데도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니 이집도 영업을 접고 빈집으로 남았나보다
관광지 마냥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 온 사람들도 있다.
이정현 아주머니는 2014년도 부터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빵집으로 알고 있었는데 세탁소인 것같다
클럽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교동도(喬桐島)는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의 북서쪽, 38선 근처 황해상에 있는 섬으로 강화도보다 서쪽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해 있다. 2014년 완공된 교동대교를 통해 강화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기는 하나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교동 스튜디오 대룡리 마을에서 운영하는 사진관이다.
1960~70년대식 교복과 교련복을 빌려 입고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교동 제비집은 강화군에서 민자 유치와 중앙 및 지방정부 협력으로 추진하는 '평화와 통일의 섬 교동도 프로젝트의
거점시설로 주민이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1층에는 안내 디스크, 체험공간, 자전거 대여소, 회의실, 야외무대가
있으며 2층에는 카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키가 낮은 시장 건물의 처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낯선 제비집이다. 교동도 사람들에게 제비는 지켜야 할 귀한 손님이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건물 안에 집을 지어도 내쫓는 법이 없다.
바다 건너 고향 연백평야의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는 제비를
마치 북한의 가족처럼 대하는 실향민들의 마음 때문이다.
시장 곳곳에는 제비집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은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맘껏 드나드는 제비가 부러워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이라며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간식도
제비콩을 즐겨먹는다고 말한다.
옛날 극장이 성업할 때는 저 궁전 다방도 번성을 했겠지?
옛 빨래터 조형물과 우물
택시를 대절 시켜 놨기에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온다
교동대교(喬桐大橋)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교동면 봉소리)와 강화도(양사면 인화리)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교동연륙교라고도 한다.
강화-교동 연결도로는 길이 2.11 km의 교동대교와 다리 양쪽의 접속도로 1.33 km를 합쳐 총 3.44 km이고, 90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하였다.
- 2008년 9월 25일 : 착공
- 2011년 : 당초 2012년 말 개통할 계획이었으나,
- 갯벌에 설치된 기초말뚝이 전도되어 공사가 지연됨.
- (기초 말뚝 인양 후 재시공)
- 2014년 설 연휴 기간 : 임시 개통
- 2014년 6월 20일 : 시험 개통
- 2014년 7월 1일 : 정식 개통
교동도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교동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은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 목적 등의
확인 후 출입증을 교부받아 교동대교 입구의 검문소에 그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고
야간(오후 8시~오전 6시)에는 통행할 수 없다.
이로서 강화도 3번 째 여행을 마치고 저녁 모임을 위해서 강화도를 떠난다 몇군데 더 돌아보면 좋은데
시간이 없다 운이 좋으면 다음에 다시 올 수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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