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도는 아주 옛날 상고시대에는 화개산, 율두산, 수정산을 중심으로 한 3개의 떨어진 섬이었다.
교동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입구.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든 퇴적물이 쌓이고 쌓여 섬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화개산 자락에서 보이는 교동도는 그래서 거대한 간척지를 보는 듯 너른 평야다. 강물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비옥하기 그지없어 예부터 교동의 쌀은 으뜸으로 손꼽혔다. (8/2)
교동도는 섬마을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서울에서 지척이고 국내에서 14번째로 큰 섬임에도 휴전선이
섬을 휘돌아가는 탓에 교동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엄격한 통제가 따랐다. 가깝지만 편치 않은 곳, 그래서 외면 받았던 땅이다.
하지만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 또한 막아 원형의 자연과 우리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제 이 섬을 이어주는 대교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흐를것이다.
교동도 평야
바둑판처럼 경지정리가 잘된 널따란 들판 저 너머로 야트막한 산 아래 빨강 파랑 지붕의 집들이 고즈넉한
촌락을 이루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길가에는 억새가 바람 따라 너울대는 군무(群舞)가 볼만하다.
인천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산 129.
교동도 밤머리산 끝자락에 있는 망향단 주소다. 예전에는 민통선이라 네비게이션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바로 연결된다.
대룡시장 입구인 회전교차로에서 오른쪽 3시 방향 교동북로로 방향을 바꾸면 4.3㎞로 이곳에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교동평야를 가로질러 교동정미소를 지나면 파란색 교통표지판이 설치돼 찾아가는데도 별 무리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펜스를 따라 오르면 망향대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에는 망향대(望鄕臺) 비석과 재이북부조(在以北父祖) 지단(之壇),
도와 주신 분들 명단, 그리고 고성능 망원경 2대가 북한 연백을 향해 놓여 있다. 그 옆으로 ‘북한의 모습’과 ‘6.25 한국전쟁’
사진판이 있고, 뒤로는 망향대 안내문이 있다.
강화도 터미날에서 교동도 가는 버스가 50분마다 운행을하는데 망배단에 가려면 꽤나 멀어서
자전거를 대여해서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서울에서의 약속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대절
7만원에 한 시간반 정도 돌았는데 우리가 돌아온 시간을 따지면 5~6만원이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오신 분들은 모두 자가용으로 오신분들이다
바다건너 보이는 곳은 황해도 연백이다 전에는 민둥산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나무가 자라 푸른산이 됐다고 한다
이렇게 봐사는 우리 남쪽과 별반 차이가 없는데 망원경으로 처다보면 확연히 차이가난다
이렇게 봐서는 우리나라 여느 농촌과 다름없다 아래 사진을보면 그내들의 생활상을 조금은 알것 같다
내카메라로 최대줌을 사용해도 이정도 밖에 안된다
아래사진은 빌려온 사진이다
망향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다 건너 보이는 황해도 연백군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논 밭일을 하는 사람과 바닷 일을 하는 사람 등이 보이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도 있다.
회벽을 바른 1층짜리 주민 집들은 일자로 몇 개씩 붙어 있고, 미루나무 등이 군데군데 서 있어 우리나라 1970년대
시골풍경 그대로다. 바다에는 촘촘히 나무를 박아 보트 등을 댈 수 없게 했다. 아마도 탈북 방지시설인 듯했다.
철조망이 늘어선 옆으로는 초소가 하나씩 붙어 있어 더했다.
사실 북한주민이 강화만만 건너면 교동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어 최근에만도 넘어온 사례가 종종 있다.
2013년 8월 23일 북한 주민 1명(46)이 교동도 해안에 맨몸으로 귀순해와 새벽 3시40분께 교동도 주민이 발견해 신고했다.
그는 교동도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불빛이 있는 민가로 달려가 문을 두드려 집주인을 깨운 뒤 “북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혔다.
집주인은 인근 해병대에 이 사실을 알렸고, 해병대의 5분 대기조가 출동해 신병을 확보했다.
그가 넘어온 해안은 우리 주민들의 어업지역으로 고정된 경계 초소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8월 14일 새벽 4시에는 북한 주민 2명이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의사를 밝혔다.
20대와 50대 부자지간으로 알려진 이들은 교동도로 헤엄쳐 왔다가 해병대 초병들에게 발견돼 “살려 달라,
귀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2017년 8월 11일 새벽 1시경 20대 북한 남성이 서해 교동도로 넘어와 귀순했다.
부유물에 의지한 채 바다를 헤엄친 이 남성은 경계근무 중이던 해병대 초병이 열상감시장비(TOD)로 귀순자를 발견해
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유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처럼 폭이 좁은 바다를 끼고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돌을 힘껏 던지면 이북 땅에 떨어질 듯 가깝다. 가장 가까운 곳은 2.3㎞의 거리이다.
해안가에는 높다란 이중 철책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밤이면 북한이 내보내는 대남방송도 생생하게 들려온다고 한다.
망향대
교동도 북서쪽 해안 율두산(밤머리산)에 있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와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를 올리고
망향의 한을 달래는 곳이다.
통일이되어 이곳 실향민들이 더이상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전남의 해남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였다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인물은 한양에서 먼 곳으로 보내졌지만 왕권에 치명적일 수 있는 왕족 등 거물은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격리된 곳에서 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하루,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급한 조류로
접근이 쉽지 않아 유배지로서 최적의 땅이다.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을 시작으로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그 중 꼭 집고 넘어갈 인물이 바로 조선왕조의 풍운아 연산군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은
바로 교동으로 유배돼 2달만에 사망했다. 교동의 역사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유배지가 교동 어디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봉소리의 신골, 고구리의 연산골, 읍내리 세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성희안, 박원종등이 연산군을 폐 하려고 군사를 움직인 것이 중종반정이며
9월 2일 대비(성종의 계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 그가 바로 중종이 된다.
그는 그날로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고, 그해 11월 6일 교동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자의 예로서 장사를 치러 강화에 묘를 마련하였으나 후에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였다.
실록에는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는 내용만 있을뿐 교동
어느곳이라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약 2개월후 사망하였으므로 유배지가 교동 어느곳인지 알 수 없다.
연산군은 시인(詩人)이었다. 실록의 연산군일기에 130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가 폐위 열흘 전에 지은 시를 소개해 본다.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연산군이 이 시를 읊다가 눈물을 흘리니 옆에 따르던 애첩 장록수와
전비가 따라 울자 그는 말했다. “설마 불의의 변이야 있겠느냐 마는 너희도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연산군은 다가올 일을 미리 예측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떠오르며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연산군의 무덤은 그의 처 신 씨(申 氏)가 서울 도봉구의 방학동에 이장하여 묻혀있다.
또 한 설(說)은 그가 병사가 아니고 피살 되었다고도 한다.
그가 죽을 때 신 씨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희종(1181-1237)
고려 21대왕. 최충헌에 의해 1211년 왕위를 쫓겨나 처음 강화에 유배되고 1215년 자연도(영종도)를 거쳐 교동에
유배된 후 복위운동 펼치다 1227년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사망.
안평대군(1418-1513)
세종의 3남
1453년 계유정란때에 세조에 의해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사됨
임해군(1574-1609)
선조의 첫째 서자
1608년 광해군에 의해 처음 진도로 유배되고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가 1609년 사사됨.
광해군(1575-1641)
인조반정(1623)에 의해 폐위되어 처음 강화도에 유폐됨. 1624년 이괄의 난때 태안으로 옮겼다가 난이 평정되자
강화도로 다시 데려옴.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자 다시 보내졌다가 1641년 제주도에서 사망
능창대군
조선조 선조의 손자이며 인조의 동생
능창군 추대사건인 신경희의 옥사사건으로 광해군에 의해 1615년 교동에 안치 된후 사형.
숭선군
인조의 5남
1651년의 무고로 1652년 처음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교동으로 안치되었다가 1656년 석방됨
익평군
철종의 사촌으로 헌종12년(1847) 교동에 유배됨.
이준용(1870-1917)
- 흥선대원군의 손자, 고종의 조카
1895년 법무 현판 김학우의 피살사건에 연루되어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만에 석방.
민영준, 민형식(1875-1947)
을사오적 암살 계획이 발견되어 1896년 2월, 교동에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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