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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아그라 타지마할

 

 

 

 

아그라

북부 우타르프 라테시주 야무나 강변에 있는 도시로서 인구는 200만 이다

 16세기초 시칸다르 로디가 세웠으며 무굴 제국이 다스리던 시기에 얼마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18세기말 자트족·마라타족·무굴인과 괄리오르의 통치자들에게 잇달아 점령당했으며 1803년 영국에게 넘어갔다.

 1833~58년에는 아그라 지방(뒤에는 북서부 지방)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아그라 행정구는 거의 대부분이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서쪽 끝에 구릉지대가 있다.

야무나 강과 아그라 운하에서 물을 공급받으며 주요농작물로는 기장·보리·밀·목화가 손꼽힌다.

아그라 시에서 남서쪽 37㎞ 지점에는 폐허가 된 무굴 제국의 도시인 파테푸르시크리가 있다.

 

 

 

 

 

어제 델리에서 4시간여 달려와 저녁에 뮤지컬 보고 호텔에 들어서 쉬고 아침을 호텔식으로

간단히 때우고 여유롭게 3일차 투어를 시작한다

 

 

 

우리가 어제밤 묵었던 크리스탈 사로바르 프리미어 호텔

호텔에서 타지마할로 이동을한다

거리에는 개와 소가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인도에는 소가 태어나면 암소는 젖을 짜고 숫소는 농사를 짓는 일을 시켰는데 요즘은

농기계를 사용하기에 숫소는 거의 버려져 주인없는 소로 거리에 어슬렁 거리며 먹이를 찾는데

인도에는 냉장고가 없는 집이 많아 음식을 조리해 먹고 남는것은 동물들에게 주는데 그마저도

모자라면 이렇게 쓰레기를 뒤저 먹이를 찾는다 어쨌든 인도는 동물의 천국이다

타지마할 검색대 철저한 검색을 거처 입장을 하게된다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

('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타지 마할로 바뀌었다고 한다.


1632년경에 착공되었고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는데 총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타지 마할의 중앙에는 정4각형 정원이, 남쪽에는 사암 출입구와 부속 건물이, 북쪽에는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모스크와 이와 완전 대칭을 이루는 '자와브'가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고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다음백과

 

 

 

붉은 사암(砂岩)으로 지어진 정문(正門)에 이른다.

무케두아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니 참조한다.

사암 바탕에 흰 대리석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건물로, 타지마할의

여러 문들 가운데 가장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이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이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 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출입문을 통과하자 갑자기 눈이 훤해진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하얀 대리석 건축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위스의 영화제작자 베른하트르 베버(Bernard Weber)’가 이끄는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의

(New7Wonders) 재단에서 새천년(AD 2000)을 기념하기 위해 인터넷 투표를 통해 뽑은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 七大 不可思議)‘에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린바 있는 타지마할이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이 복합체의 북쪽 끝에는 영묘·모스크·자와브 등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와 자와브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과 아키트레이브(평방)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

(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어,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색깔과 감촉에서 대조를 이룬다

인도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손꼽힙니다. 인도에서 번성했던 무굴제국은 제5대 '샤 자한'황제에

이르러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인도의 타지마할은 샤 자한이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서 건설한 것입니다. 

샤 자한 황제가 그토록 사랑한 왕비는 '뭄타즈 마할'이었습니다. 타지마할의 뜻을 보면 왕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문인 아케두아르는 아치형의 문을 3개 만들고, 가운데 문에 또 다시 3개의 아치(arch)

만든 다음, 가운데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문을 2층으로 만들고,

그 위 사방에 정자 형태의 차트리(Chattri,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크리스트어로

우산을 뜻한다)를 설치했다. 가운데 지붕 위에는 작은 돔(dome) 11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뒷면에도 11개가 있어 둘을 합할 경우 22개가 되는데, 이는 타지마할을 건설하는데

 22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샤 자한 황제에게는 5000명의 후궁과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은 뭄타즈 마할 뿐이었습니다.

뭄타즈 마할의 뜻은 '궁전의 꽃'이란 뜻인데 타지마할의 뜻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샤 자한의 정치 상의 적인 계모 '누르 자한'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틋한 사랑을 지킨 끝에 결국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후 그들은 17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고 한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단다.

 

타지마할을 짓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라서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야 겨우 밝혀졌을 정도로 신묘(神妙)한 기법이었다.

 그만큼 토목공학적으로도 수작이라는 얘기이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구조물을 벽돌과

나무 받침대에 박은 쇠테로 보강한 아치가 지탱하고, 우물을 이용하여 타지마할을

 야무나(Yamuna)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단다.

영묘(Mausoleum)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왼편에 있는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에 들러보기로 한다.

 영묘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똑 같은 건물이 하나씩 들어섰는데 이 가운데 왼편이 모스크이다.

영묘와 모스크가 있는 기단(基壇)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만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실내도 아닌 실외에서까지 맨발로 걷든지

아니면 덧신을 신고 구경하도록 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까 가이드가 입장권과 함께 나눠주었던 덧버선을

 꺼내 신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뭄타즈 마할로 불렸던 왕비 '바누 베굼'은 자식을 14명이나 낳았고, 심지어 전쟁터에도 함께 다닐 만큼 샤 자한과 애정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뭄타즈 마할은 아기를 낳다가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샤 자한 왕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며칠 새 백발로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실제로 샤 자한 황제는 2년간이나 상주가 되어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영묘(靈廟, Mausoleum)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

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룬다.

샤 자한 왕은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기 직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모 궁전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22년간이나 투자되는 대공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건축물이 바로 인도의 타지마할입니다.

죽어서도 사랑하려는 남녀의 애정이 묻어 있는 건물인 것입니다. 

타지마할 뜻은 "마할의 왕관"이며, 흰두어로는 "ताज महल"라고 합니다. 샤 자한이 건너편에 '검은

타지마할'을 건설하려고했었다는 일화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발견된 증거는 없습니다. 

 

 

연못의 네 곳 가장자리에는 각기 하나씩의 의자가 놓여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다이애나 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의 왕세자빈이었던 다이애나가 1992년 타지마할을 방문했을 때 앉았던 의자라고 한다.

그녀의 유명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포토죤으로 소문나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타지마할을 측면에서 본 모습, 높이가 75미터, 돔 부분의 무게만 13000톤 이상 나가는

 타지마할은 건축 공학의 기적을 이룬 것은 물론 이슬람과 힌두교 문화,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해 당대 최고의 예술적인 완성도를 이룩한 건축물이다. 저 무덤의 주인공인

뭄타즈 마할은 한 남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의 증표를 받았다고 봐야 하겠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인도의 대표적인 건축물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흔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고 비유되는데, 인도의 서울인 '뉴델리'의 남동쪽 도시 '아그라'에

여행을 가면 볼 수 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지만, 이슬람 국가인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는 이슬람 문화가 많은 곳이다.

아그라의 성벽에서는 세계가 심판을 받고 멸망할 때 샤 자한 왕과 뭄타즈 마할 왕비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모든 출입문들은 이슬람 건축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완(Iwan)’, 3면이 벽이고 마당으로

 향한 쪽만 끝이 뾰쪽한 아치형으로 개방되어 있는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아치(arch) 구조물은 기둥이나 벽 위에 반원 형태로 만드는데,

이완은 지지하는 기둥이나 벽을 따로 세우지 않고 양 옆이 평평한 타원 형태로 상층부에서

바닥까지 연결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역별로 전통적인 장식 요소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라베스크(arabesque)

 추상무늬가 새겨진 백색 타일을 이용하여 장식하고, ‘캘리그래피(calligraphy)’

일종의 상감기법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해 각종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로보아 페르시아지역의 유형을 따르고 있지 않나 싶다. 그물망 모양으로 만들어진 창문

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능묘의 출입문 주위는 아름다운 문양들로 가득하다.

흰색 대리석에 양각기법으로 꽃문양을 새겨 넣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상감기법으로 색상이 있는 꽃문양으로 벽면을 채워 놓았다.

출입문의 바로 옆 기둥에 그려진 문양들은 아마 코란 구절을 적어 놓았을 게다.

 

영묘 안에 있는 석관 확대 이미지

 

영묘 안에 있는 석관

타지마할은 정원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도록 설계되었는데 석관이

유일하게 대칭을 깨고 있다.

 

 샤 자한은 원래 강 건너편의 타지마할과 마주 볼 수 있는 곳에 검은 대리석으로 된 똑같은 건물을

 지을 생각이었으나

그의 사후 수많은 가족을 살해하고 황제가 된 아들 아우랑제브가 그 계획을 취소했다.

대신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영묘 중앙에 있는 어머니 석관 왼쪽에 안치했다.

 

중앙에는 어머니의 석관이, 그 왼쪽에는 아버지의 석관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석관을 천국을 찬미하는 코란의 경구가 장식하고 있지만 실제 시신은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샤 자한의 뜻은 "세계의 왕"이란 뜻이고 타지마할의 뜻은 마할의 왕관인 것처럼, 건설공사는 강력하고도 거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사에 무관심한 샤 자한으로 인해 정치는 더 어지러워지고, 퍼부어지는 자금으로 국가는

 휘청해졌다. 

 

마침내 그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샤 자한을 탑에 가두어 버렸다.

아들에 의해 폐위당한 샤 자한은 죽을 때까지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았지만, 뭄타즈 마할 곁에 안장할 수는 있게 해 주었다

인도 타지마할의 뜻과 함께 '무굴제국'과 '샤 자한' 황제에 대해 알아두면 이해가 쉽다.

 무굴제국은 인도의 마지막 제국이었는데,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존재했다. 

 

최대 영토는 인도 중북부 대부분이었으며,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도 무굴제국의 일부였다.

 초기에는 인도 북부 일부에 티무르 제국의 후예가 세웠는데,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후예이므로 스스로

 칭기즈칸의 혈통이라고 자부했었다.

힌두교를 지배하며 이슬람이 세운 무굴제국은 처음에는 잔인함으로 공포를 주는 종족이었다.

 하지만 황제들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문학을 사랑하던 의외의 모습이 있었다. 

인도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인 샤 자한 황제는 건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타지마할의 뜻처럼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약속했던 엄청난 건설작업을 시작했다.

최강의 전성기였지만 초호화 자재와 고급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한 것은 나라의 번성을 흔드는

일이 되고 말았다. 

야무나강

잠노트리 부근의 히말라야 산중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히말라야 산기슭과 인도 평원 북부를 지난 다음

 우타르프라데시 주와 하리아나 주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 이곳에서 동·서 야무나 운하에 물을 공급한다.

이어 델리를 지나면서 아그라 운하에 물을 대주고, 마투라 부근에서 방향을 남동쪽으로 바꾸어

 아그라·피로자바드·에타와를 차례로 지난다.

 

에타와 바로 밑에서 남쪽 지류와 합쳐지는데 주요지류로는 참발·신드·베트와·켄 강을 들 수 있다.

 발원지에서부터 약 1,376㎞를 흐른 뒤 알라하바드 부근에서 갠지스 강에 합류하며, 힌두교도들은 이 합류점을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야무나 강의 해상교통은 원활하며, 여름에는 아그라 위쪽 부분의 강물이 줄어드는데 그것은 운하로 많은

 강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지 않아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저 앞에는 아그라성이 흐미하게 보인다

영묘입구에는 인도 가족인듯 사진을 찍고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아까 영묘에 들어가기 전에 들렀던 모스크와 똑 같이 생긴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동서(東西)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아니 타지마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게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이 건물도 붉은 사암으로 만든 전형적인 무굴양식 건축이다.

이곳에도 역시 피에트라 두라 기법과 양각의 조각 등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기둥과 피슈타크(Pishtaq)’에도 장식이 있다.

타지마할의 유명세에 밀려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지만 이곳 역시 대단한 건물임에는 분명이다.

 

 네 개의 50미터짜리 미나레트(minaret, 모스크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를 자세히 살펴보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후에 바라본 미나레트는 바깥쪽으로 약간씩 휘어져 있다.

원근법적(遠近法的) 효과를 고려해서 건축한 탓이란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지진(地震)을 대비한 조치인데,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가운데의 영묘(靈廟) 쪽으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단다

 

타지마할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는 그 아름다움 외에도 규모와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폭 350m, 길이 580m의 크기를 가진 이 무덤은 무려 22년간이나 지어졌으며, 2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또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수학적 완성도를 보였으며,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것까지 고려된 최고의 기획물이었다.

 더불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문화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건축디자인의 특징도 남다른 점다. 

오로지 왕비를 위한 사랑으로 지어진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이탈리아 등 세계 각지의 유명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으며,

아주 먼 곳에서 최상의 대리석을 운반해 왔고, 우즈베키스탄, 프랑스 등에서까지 진귀한 보석을 가져와서 치장했었다.

 

 원근법을 이용해서 멀리서도 직선구조로 보이게 하였고, 지진이 일어나도 13000톤을 지탱하며 관이 있는 쪽으로는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기하학의 정석을 구현한 건축물인 것이다. 

샤 자한 황제의 왕비는 뭄타즈 마할로 불렸고 그 뜻은 궁전의 장미다.

그리고 인도 타지마할의 뜻은 마할의 왕관이라고 한다.

 즉 '마할'은 힌두어로 "궁전"을 의미하므로 타지마할의 뜻은 "궁전의 왕관"이 된다다.

이렇게 봤을 때, 샤 자한은 왕비인 바누 베굼을 왕국 그 자체로 생각했었나 보다. 

 

황제이기 보다 한 남자로 영원히 사랑하려던 샤 자한의 욕심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건축물을 남기고

 불행 속으로 사라졌다. 국가도 잘 되고 사랑의 끝도 행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

렇지 못했으니, 고려 말 공민왕의 일화도 떠오르는 타지마할이다

 

시계방향으로 히비스커스.마타피아.붉은 분첩나무.툰베르기아.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

 

 

인도 타지마할이 너무나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다른 의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타지마할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것일까? 

세계의 왕이라 불렸던 황제의 왕비를 위한 왕관이라는 것이 타지마할의 뜻이니, 샤 자한의 자부심도 높은

건축물이다. 심지어 샤 자한은 타지마할 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타지마할을 만들어낸

장인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붉은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지어진 회랑(回廊) 건물이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탓인지 무척 이색적이다.

 

인도의 정통 복장을 한 단체가 들어오고 있다

타지마할 들어갈 때 나올 때 타는 차

도시의 복판의 거리에 이렇게 휴식을취하고 있는 소들 누구하나 건드리지 않고

비켜가고 기다리는게 일상이 돼 있다

 

 

 

타지마할을 뒤로하고 아그라성으로 이동을한다

 

Everybody hu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