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에 자장매 보러 왔었는데 친구와 같이 또 왔다(11/9)
통도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의 하나이다. 646년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가사·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했다. 규모가 작았으나 고려 선종대에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
부도와 극락전 앞의 3층석탑·배례석·봉발탑·국장생석표 등이 건립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1603년 송운대사가 재건, 1641년 우운대사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제144호)
·국장생석표(보물 제74호)·은입사동제향로(보물 제334호)·봉발탑(보물 제471호) 등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에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율사가 이곳 연못에 사는 9마리 용을 항복시키고 대가람을 이루었는데 1마리 용만 머물게
하여 절을 수호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으며 지금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지(九龍池)가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한 규모가 작은 절이었으나 고려 선종대에 크게 확장되어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3층석탑 및 배례석(拜禮石), 봉발탑(奉鉢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등이 건립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리고 1603년(선조 36) 송운대사(松雲大師)에 의해
재건된 뒤, 1641년(인조 19) 우운대사(友雲大師)가 다시 중건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돌장승(벅수)
요약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이정표 구실도 한다.
대부분 남녀 1쌍을 세우고,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12곳에 세운다. 솟대·돌무더기·서낭당·신목·
선돌 등과 함께 동제 복합문화를 이룬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장승·장성·장신·벅수·벅시·돌하루방·수살이·수살목이라고도 불린다. 재료에 따라서 목장승·
석장승·복합장승으로 분류된다. 목장승의 형태는 솟대형·목주형·신장조상형이 있다.
성보 박물관 앞의 느티나무
삼성반월교
언제나 그자리에 변함이 없이 버티고 있는 홍교 봄.여름.가을.겨울 주위의 풍경만 다를 뿐
첫일주문 영축산문 둘째 일주문 영축총림 세째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 세개의 문을 거친다
예전에는 이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 하나 뿐이었는데
탐스러운 모과도 담아보고
증장천왕(증장천을 다스리며 자가와남의 선근을 증진 시키는 신)
광목천왕(수미산 중턱 서방에 있으면서 용신 비사신을 거느리고 서방세계를 지키는 신)
다문천왕(다문천을 다스려 북방을 수호하며 야차와 나찰을 통솔하는 신)
지국천왕(지국천을 다스리며 동방의 세계를 지키는 신)
통도사 뒷산 영축산 미세먼지도 걷히고 하늘이 맑아 손에 잡힐듯 가까이보인다
줌인해보았다
범종각
범종각은 2층 누각형태의 건물이다 건축의 초창은 1686년 (숙종12년)수오대사에 의해 이루어 젔으나
현재의 범종각은 그후 여러차례 증수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 상하층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등 사물을
배치했다 불전 사물은 조석 에불의식에 사용되는 불구로 모두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중생을 위하여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위하여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위하여 그리고 운판은 허공의
날짐승을 위하여 사용된다
삼층석탑
이석탑은 받침돌 위에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신라시대 후기의 삼층석탑이다
1987년 해체 수리당시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1.5m 정도 옮겨져 극락전과 약사전의 중심축에
맞추어 복원하였다 당시 상층 기단 안쪽에서는 조선시대 백자가 발견되었고 하층기단의 다진 흙속에서
소형의 금동불상 2구와 청동 숫가락등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탑 앞에 있던 배려석(1085년조성)과 함께 통일신라후기의 석조문화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만세루는 법회나 법요식등 사찰의 주요행사 때 사용하던 누각이다
영조 22년에 숙영대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후 여러 차례 보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누각형식으로 지어 졌다가 지금같은 형태로 고처 지어 누로남아 있다
영산전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던 곳인데,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통도사의 영산전은 건축 연도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건물은
숙종 30년(1704년)에 송곡 선사가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하여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인 것이 특징이며 내부 벽에는 다보탑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그림이 그려져 있고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도 있어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팔상도와 영산 화상도가 있다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극락세게에 머물며 중생을 위해 자비를 배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좌에는 대세지보살 오른쪽은 관음보살을 협시로 모신다
대한민국 사찰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많이 세워지는 극락전은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기 때문에
아미타전이라고도 하며 또 극락세계에서 영원히 평안한 삶을 누린다 하여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통도사 극락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에 중건된 것이다. 작은 건물이지만 팔작 지붕에
받침 기둥을 갖추고 있는 등 건물 자체가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약사전
약사전은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목숨을 연장시키는 약사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건물 내부에는 독존으로 석조약사 여래불을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후불 탱화는 약사여래와 함께 일광보살,월광보살을 비롯하여 여러대보살,신장상 등을 나타낸 1775년의 작품이다
통도사 불이문
불이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찰의 불이문과 비교해서 보더라도 통도사
불이문은 짜임새와 형태가 완벽한 불이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통도사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지었다고 하나 언제 중건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건축기술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팔작집으로 문마다
판문을 달아 놓았다. 코끼리와 호랑이 조각이 이마로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으며, 대들보 위에 삼각형의
합장재로 장혀를 걸치고 중도리, 하중도리, 종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치도록 하였다.
'불이문' 편액은 송나라 사람 미불의 글씨라고 하며, 현수막 때문에 보이지 않으나 현수막에
가려진 '원종제일대가람'은 원래 일주문에 걸려 있던 것이라고 한다.
요사채
불교 전문 강원
은목서
은목서는 가을에 피고흰색이며 금목서는 봄에피며 황금색이다
금목서
영각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 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
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전(影子殿) 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화전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원년)에 청성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 좌상을 봉안하였다. 이 불당의 특징은 건물 측면 중앙칸에 문짝을 단 것이며
공포의 구성도 다른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잇다. 곧 안쪽 공포를 5출목 형식으로
천장 높이까지 공포가 짜여져 11포의 화려한 공포 구성을 이루고 있다.이 용화전 앞에는 높이 약 2.5미터의
석조 봉발이 있다. 이 석조물은 지대석 위애 하대석을 놓고 그 위에 부등형 8각간석을 세우고 간석 위에
상대석을 놓았으며 그 위에 뚜껑을 갖춘 발을 올려놓았다.
봉발탑
봉발이란 스님이 밥을 얻으러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그릇이란 뜻입니다. 이는 발우(鉢盂 : 부처 또는 비구가 소지하는 밥그릇을 말함)를
모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가 하고서 평생 동안 가지고 다닌것이 헌옷 한 벌과 밥그릇 하나뿐이었고 평생을 무소유로
살았으니 입적하실때 수제자에게 물려줄 것 또한 밥그릇 밖에 없었으니 부처님이 입적을 하기 전 제자인 가섭존자에게 "발우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륵불이 출현하면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며 발우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륵불이 출연하면 물려주라는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석조발우가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용화전 앞에 설치된 것입니다.
보이시죠? 봉발탑 뒤로 미륵부처를 모시고 있는 용화전의 현판이.....참!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모르시는 분을 위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 세상에 나타날 부처이며 용화수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제도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제도할 부처로 수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큰스님이 입적할 때 받는 발우를 제자로서는 큰 영광으로 알았다고합니다.
세존비각.개산조당.해장보각이 한눈에 보인다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이며 해장보각에는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 율사의 영정과 고려 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다.
해장보각 내부에 모셔져 있는 자장 율사의 영정은 순조 4년(1804년)에 그려진 것이다.
개산조당은 전각 정면에 있는 독립된 3칸의 조사문으로, 가운데 칸은 높은 솟을삼문 형식이다.
양반가의 대문은 보통 3칸인데, 초헌 등의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중앙의 칸을 높게 만든다.
궁궐이나 사당 같은 중요한 건물도 출입문이 삼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개산조당은 3칸 모두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해장보각의 부속 건물인 통도사 개산조당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유교 건축의
사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해장보각
이 건물의 창건은 영조 3년(1727)이고 그 후 고종 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율사의 진영을 봉안한 해장보각은 정면 3칸, 특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內陣 : 안두리)기둥이 배치 되어 있다.
이 전각을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 장경(大藏經)진리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다.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자장스님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 이 자장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율사가 삼장(三藏 : 經藏, 律藏, 論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하였다.”『삼국 유사』전후소장사리조)고 한 내용은 이미 삼국시대에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 안(奉安) 사찰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대장경이 다른 사람 아닌 창건주 (創建主)
자장율사에 의하여 봉안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그 전각에 들어오는 문을 개산조당이라 하였고,
전각 자체를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광명전
'널리 밝은 빛을 두루 비춘다.'라는 뜻을 지닌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곳이다.
비로자나불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의 부처이자 모든 부처 중에서 근본이 되는 부처이므로 법신불이라고도 한다.
법당 안에 있는 부처는 연꽃 무늬 받침대 위에 왼손의 검지를 오른속으로 감싸쥔 형상으로 앉아 있는데 이 손모양은
곧 부처와 중생이 하나임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원년(1725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 장경각 내에 보관된 경판은 25종 801판에 이르는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변상(變相)을 새긴 목판 대장경 경판이다
통도사 세존비각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통도사에는 유독 흥선대원군 즉 석파(石坡)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일주문(一柱門)의
편액인‘靈鷲山 通度寺’의 글씨와 원통방 편액과 ‘금강계단’의 글씨 등이 모두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오층석탑 1920년도에 세웠다고함
관음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뇌를 씻어 주며 세상을 구하고 생명이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마음속에 새겨 공경하고 섬기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통도사의 관음전은 영조 원년(1725년)에 용암 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불전 내부에는 등불을 들고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안내하는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남쪽으로 구도
행각을 하는 선재동자가 반복하여 그러져 있다.
관음전 앞 석등
절 안의 어둠을 밝히고,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춰 줌으로써 온갖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통도사의 석등은 조형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시대 초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둥근 형태의 연꽃 받침대 두 개, 그 사이를 연결한 팔각 기둥, 불을 놓는 화사석과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뜻 보기에는 4각형의 석등처럼 보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흔치 않은 부등변 8각 석등이라는 점에서
석등의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 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응진전
불당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상이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다음 생에 성불하여 부처가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강원이다
큰사찰에 장독대는 여기만보인다
구룡지
통도사 구룡지는 통도사 창건 설화가 얽힌 연못이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따르면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
현 통도사 위치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제압된 아홉 마리 용들 중 한 마리는 통도사를 수호하게 하고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연못이 바로 지금의 구룡지라 전한다.
적멸보궁과 사리탑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 건물을 말한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에는 다섯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적멸보궁 뒤 솔밭
통도천에서 유유자적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오리들
계곡의 나무들도 이제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아직 밥할 시간은 아닌데 무슨연기가 나오고 있을까?
스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돌담과 느티나무
고목으로 변한 밑둥만 봐도 얼마만큼 큰 나무였는지 짐작이간다
석당간
당간이란 사찰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인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 큰 깃발을 달아 외부에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석당간이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서 몇 군데에 불과하며 통도사에 있는 당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되었지만 지주는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하에 매설된 2m가량은 원석 그대로이며 지상 노출 부분은 간공을 뚫는 등 용도에 맞도록 가공한 상태로서
전체 높이는 7.54m이다.
차를 제1주차장까지 들어왔기에 입구 무풍한송로를 못 걸어봐서 잠시 걸으며 사진 몇 장을 담아본다
무풍한솔길 100년도 넘은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마치 가로수를 연상하게 한다
성경이나 불경이나 선인들의 말씀은 진리에 가깝다 다만 지키기에 역부족이다
마음의 부처
솔밭길.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란 명찰을 달고 있다.1km 정도 걸을 수 있는 힐링길이다
바람은 춤 추고 소나무에서 시원한 향기가 나는 길이라고 한다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를보며 이제 끝마칠 시간이다